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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향인 Jul 01. 2024

살갗에 새겨진 무늬

나의 시_128

이야기가 뭔가 이상하게 흘러가네

이어서 손끝이 느끼는 미세한 이상(異常)

신경쓰지 않으면 꼭 두 장씩 넘기는

검지야, 하고 부르면 이제 대답도 아니하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자랑거리도 아니었지만

책장을 구기지 않고 넘기는 건

나 홀로 뿌듯했던 재주였다

뒷장 글씨도 읽을 수 있던 '엣센스' 영한사전

정확하게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나는 사랑했다 생생한 그리고 고개숙인 적 없던

젊어서 칼 같던 손가락을 그리고 그 표면에서

길들여지지 않겠노라 소용돌이치던 무늬를


ㅡ 나는 무인민원발급기를 이용 못 해

     지문이 인식 안 되거든

     글쎄 운전학원에서도 지문이 안 찍혀서

     매번 수기로 출석했지 뭐야


누구한테 그렇게 손을 비볐어

그러게 이쯤 비볐으면 누가 뒤를 봐줄 때도 됐는데

(그리고 내 뒤를 봐줄 이 누가 있나 정말로 따져본 건 비밀)


이 책 내용이 뭐야?

ㅡ 제가 책을 두 장씩 넘겨서요

     다시 읽어볼께요

돌멩이를 던져도 파문이 일지 않는 연못 따위

메워버려야 하지 않아?

ㅡ 그럼요 암요 암요

     제가 바로 보고서를 만들어 올릴께요


손가락에서 A4용지가 미끄러져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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