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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붕시인 Sep 16. 2017

Chapter.0 여행, 그러 ‘나’의 시작

Day 3. 길, 똥, 무 Bamboo, Nepal 161231

‘풍덩’
이른 새벽, 잠에서 덜 깬 듯, 발 밑에서 늑장부리고 있는 하얀 안개를 헤치고 오솔길을 따라 30분 정도 걸어 내려가면, 골짜기와 계곡 사이에 사각형으로 반듯하게 구성된 2가지 종류의 온천탕이 드러난다. 잘 조각된 온천탕 위에는 아지랑이가 몽실몽실 수줍게 피어 올라, 걷기에 지친 나를 대범하게 유혹한다. 그렇지 않아도 온천에 환장하는 나는 현재까지 아무도 찾지 않은 온천을 향해 스프링처럼 '첨벙' 뛰어든다.

트레킹의 유일한 온천, 소정의 입장료를 내면 원없이 온천을 즐길 수 있다. 멀리 보이는 건 탈의실

여자 친구의 품처럼 따스한 온천의 온도가 구석구석 나의 온몸을 위로해준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니 신선이 따로 없다. 여기가 바로 지상낙원. 따뜻한 탕 안에서 신선으로 변장한 나는 앞으로 펼쳐질 일을 미리 상상해 본다.

저 멀리 설산까지 수십개의 골짜기를 건너가야 한다. 가장 높아 보이는 산이  마차푸체르(생선꼬리)

한나절 동안 끊임없이 따라다니며 나의 보디가드가 되어줄 강력한 햇살, 오버하는 햇살을 적당히 차단해줄 듬직한 나무와 풀잎들, ‘어서 와 처음이지?’ 하고 텃세 부리며 나를 반겨줄 많은 종류의 동물 친구들, '나마스떼' 나와 마주치며 수줍게 눈인사를 나누게 될 많은 종류의 인간 친구들, 그리고 늘 나와 함께하는 나의 벗 크리샤, 이들과 함께 경험하며 마침내 최종 목적지에 당도했을 때, 새하얀 설경 위에서 두 손 들고 만세를 외치는 나의 모습. 상상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하지만, 이런 호사스러운 미소는 오늘이 마지막이었다는 것을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온천을 점검하는 크리샤, 매사에 일처리가 똑 부러진다.

 “유명한 온천이 있는데 내일 아침 들렀다 갈래요? 별로 멀지 않아요. 30분 정도 걸으면 돼요”


전날 밤, 크리샤와 나는 영어와 한국어로 내일의 일정을 토의하다, 출발하기 전, 온천에 잠시 들리기로 했다. 30분이라는 시간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이제 걷기에는 어느 정도 적응했기에, 온천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내가 결코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결국 잠을 줄이고 들르기로 했다.


“크리샤, 여기 완전 내 스타일이야, 나중에 또 여기 오자”


대만족한 온천욕을 뒤로하고, 30분을 되돌아가는 일은 그리 유쾌한 기억은 아니었다. 정갈한 마음으로 신선으로 변신한 나는 다시 찾아오게 될 이곳에는 반드시 케이블카나 에스컬레이터가 있으면 좋겠다는 나의 바람을 순찰하는 강아지에게 강력하게 어필하고 땀이 범벅이 된 채, 숙소에 도착했다.


아침밥을 먹고, 약간의 휴식을 취한 뒤, 정확히 9시에 지누를 떠난다. 촘롱이라는 곳에서 여행허가증을 발급받고 시누와에서 점심을 먹고, 뱀부라는 곳에서 일정을 마무리하자고 크리샤가 제안한다. 8시간을 걸어야 하는 강행군이긴 하지만, 우리는 강하니까, 흔쾌히 수락한다. 


그.러.나.

지누를 떠나는 순간, 할머니께서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나를 배웅한다.

첫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부터 오르막길이 심상치 않다. 그칠 줄 모르는 오르막길에 점점 말이 없어지고 숨은 턱밑까지 차오른다. 거친 숨이라도 내쉬려면 우리가 약속한 1시간을 채워야만 한다. 그렇게 너와 나는 말이 없어지고 땅만 바라보며 걷는다. 마구마구. 돌과 흙, 계단으로 이루어진 땅의 세계에서 벗어나려면, 지옥 같은 오르막길을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이 오르막길은 여행발급증을 받기로 한 촘롱까지 계속된다.


‘후~후~’,

’나는 누구냐? 나는 어디서 온거냐? 나는 지금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느냐?’

걸음이 지속되는 동안, 답도 없는 철학적 물음만이 헛되이 나를 괴롭힌다. 싸움 구경만큼 재미있는 것이 어디 있으랴? 유체이탈하여 나와의 헛된 싸움을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내리막길이 나타난다. 오르막길에 적응된 나의 다리는 적응이 되지 않는 듯 내리막길에서 전혀 힘을 쓰지 못한 채, 나의 통제에서 벗어나 이리저리 제 멋대로 움직인다.


“괜찮아요?” “I’m Okay. No Problem. Keep Going!!!”

지누에서 오르막길의 시작, 계단만 올려다 봐도 고통이 떠오른다.

크리샤는 축지법을 완성한 것이 틀림없다. 샘솟는 오기로 따라갈만 하면, 저만치 멀리서 샘솟는 땀을 닦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다. 사실 얄미운 감정 따위는 가질 틈이 없다. 그는 나의 무거운 짐마저 메고 달아나지 않는가. 그저 존경의 마음을 담아, 1시간이 채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쉬고 가자고 간곡히 부탁한다. 그렇게 오르막과 내리막길, 간곡과 요청 사이에서 실랑이를 벌이다 보면, 의식하지 못한 어느 순간, 촘롱이라는 곳에 도착한다.

오르막길을 오르는 말들, 때로는 돈을 받고 지친 트레커들에게 중요한 교통수단이 된다.

촘롱이라는 마을은 어제 내가 묵은 지누라는 곳보다 훨씬 규모가 크다. 트레킹을 하는 사람들은 주로 여기서 하루를 보내는 것 같다. 로지의 종류도 더 다양하고 레스토랑도 있는 것 같고, 주변에 아기자기한 마을과 소, 말 등의 가축도 꽤 많다. 그리고 고도가 높기에 그림 같이 펼쳐진 자연을 감상하기에도 일품이다. 이곳에서 최종 도착지인 ABC(AnnapurnaBase Camp)로 가기 위한 여행 허가증을 발급받고, 다시 발걸음을 내딛는다. 다행히 내리막길이다.  

여행허가증을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물론 처리는 나의 벗 크리샤가 도맡아서 한다.

돌계단으로 구성된 내리막길이, 끝없이 펼쳐진다. 불길하다. 내리막길이 끝날 즈음, 철로 만든 다리가 나타나더니 오르막길의 세계로 다시 인도한다. 기껏 올라왔더니, 내리막길의 시간은 순식간에 종료되고, 숨이 턱 막히는 오르막길이 다시 시작된다. 다시 올라가라고 하니 진짜 억울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것이 운명인 것을. 악착같이 올라가야 한다. ‘후후’ 나는 누군지 되새김질하면서. 그러다가 문득, 혼자라는 것이 외롭다고 느껴진다.


“안녕하세요, 한국 사람이죠? 대학생인가 봐요”

이 다리를 건너면 시누와로 가는 오르막길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 말 한마디에 나의 ‘후후’는 완벽하게 ‘하하하’ 기력이 회복된다.


“하하, 안녕하세요, 한국 사람 맞아요. 대학생은 아니고요. 연인끼리 오셨나 봐요”
“어머어머 웬일이래, 남편이에요. 호호”


어디가 끝인지 모를 오르막길의 중턱에서 주거니 받거니 '하하호호' 서로의 체력을 충전시켜준다. 축지법을 쓰는 크리샤로 인해 외로움이 잠시 엄습했는데, 한국인 일행을 만나니 반가움이 느껴진다.(그렇다고 크리샤를 비난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는 언제나 나의 좋은 벗이다) 잠시 계단턱에 걸터 앉아 쉬는 시간 동안, 짧게 서로의 '하하호호'를 충전시켜 준 뒤, 너도 그리고 나도 오아시스가 보일 때까지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계속 걸어야 한다. 토할 것 같은 오르막길이 완만한 비탈길로 바뀌면 시누와라는 푯말이 보인다.


신기루가 아니다. 신기하게도 미리 도착한 크리샤는 나를 위해 메뉴판을 가져다준다. 뒤늦게 따라온 '하하호호' 한국인 일행과 다시 조우한 뒤, 같은 테이블에서 점심을 먹는다.

말들도 지친다. 시누와로 올라오는 풍경, Sinuwa

“왜 혼자 오셨어요? 우리는 미술을 하는 부부예요, 저기 밑에 열심히 올라오시는 중년은 연극배우시구요. 얼른 와요 오빠! 저희는 광주에 살아요. 어머 그런데 동안이다.”


점점 에너지가 충만해지더니 스파이더맨이 된다. 당장이라도 안나푸르나 정상에 기어오를 수 있을 것 같다. 당연한 사례로 태국에서 구입한 매콤한 쥐포 몇 봉지를 부부에게 건넨다. 그러자 그들은 내게 매콤 상콤한 신라면 2봉지를 하사한다. 고맙습니다. 뒤늦게 올라오신 연극배우 아저씨와도 안녕하세요. 아이고 대학생이네. 에너지 충전 완료, 서로에게 지상 최고의 인사를 건넨 뒤에, 매우 자연스럽게 도란도란 함께 모여 식사를 하고 각자의 여행 스토리를 들으며 1시간의 휴식을 취한다.


때마침 맞은편에 촘롱이 보인다. 이곳에서 저곳까지. 눈짐작으로도 대충 가늠해보니, 어마어마한 곳을 건너왔다는 생각이 든다. 칭찬으로 충만해진 나의 보디에 대견하다고 셀프칭찬을 더한다.  


‘하하호호’ 라면과 쥐포 교환식으로 업그레이드된 강력한 연대감을 기억하기 위해 카메라로 기념사진 한 컷 찰칵,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카메오가 된 채, 무사안전을 기원한 후, 크리샤의 재촉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광주에서 왔다고 하는 미술을 하는 부부와 중년 연극배우 아저씨, 우리 뒤편으로 촘롱이 살짝 보인다, Sinuwa

시누와에서 뱀부까지는 심각한 오르막 계단 대신, 대부분 완만한 경사면으로 구성된 흙길로 이어져 있다. 그래서 오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걸을 수 있다. 하지만, 크리샤는 자꾸만 재촉한다. 에너지 충전으로 스파이더맨이 된 나에게 본인이 소유한 축지법이 위기라도 맞은 것인가? 달라진 그의 행동이 못내 의심스러웠지만, 그의 발걸음에 맞춰 이전보다 부쩍 좁아진 오솔길을 종종거리며 걷는다.


달라진 행동에는 반드시 그것을 동반하는 이유가 존재한다. 그러나 가끔은 한층 업된 마음이 이성을 마비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신선처럼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충만한 기운으로 여느 때와 다름없이 땅을 보며 성큼성큼 걷고 있지만, 크리샤는 언젠가부터 하늘을 보고 날고 있었다. 머리 위까지 내려앉은 구름이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져 내리게 할 것 같다. 크리샤는 그것이 걱정스럽다. 어려 보인다고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던 나와 달리, 쏟아지는 비를 걱정하는 어른스러움. 크리샤를 의심하던 내가 부끄러웠다.  

구름이 낮게 깔려 있다. 뱀부까지는 아직까지 갈 길이 멀다.

참을성 있는 하늘은 바로 비를 토해내지 않고, 뱀부로 가는 길까지 꽤 인내심 있게 기다려 주었다. 하지만, 반쯤 왔을 때, 결국 비는 쏟아지기 시작했고, 우리는 우거진 나뭇잎을 우산으로 활용하며 간신히 뱀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시간은 겨우 5시에 불과했지만, 금방 어둑해진 날씨와 더불어, 이제껏 한 번도 느끼지 못한 추위가 엄습해왔다. 씻을 수는 있으나, 나의 체온을 달래줄 따뜻한 물은 없었다. 우선 젖은 옷은 말리기 위해 침대 위에 가지런히 널어 놓고, 급하게 찬물로, 오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땀과 비를 벗겨낸 뒤에, 따뜻한 차와 계란 볶음밥으로 지치고 주린 배를 달랜다.

점점 열악해지는 숙소에서 찬물로 샤워를 한 뒤 숙소에서 한 컷, Bamboo

식당에 모여 있는 여행객은 이름을 기억하기 어려운 낯선 독일 여자 한 명뿐, 간단하게 인사를 주고받고 오늘을 복기한다. 오르막, 내리막, 억울함, 외로움, 하하호호, 우르르쾅쾅, 재촉하는 크리샤, 키 작은 하늘. 금세 신기루처럼 사라질 듯한 이 모든 기억 속 감정을 그녀에게 재빨리 전달하고 싶다. 하지만, 신호가 잡히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만의 시그널로 그녀에게 오늘을 전달한다.


'찌릿찌릿, 찌릿찌릿!'          


안녕 H, 지누에서의 아침은 온천과 함께 시작했어. 사우나에 환장하는 내가 그냥 지나칠 수 없었어. 온천까지의 거리도 무시할 수 없지만, 이제 이곳에서 30분 걷는 일은 동네 마실 가는 기분이라서, 기꺼이 아침잠을 포기하고 온천을 즐겼어. 물론, 다시 숙소로 올라오는 길에 배출된 땀으로 온천의 상쾌함은 도루묵이 되었지만, 경험하지 않으면, 상큼함도 느낄 수 없었을 거야. 오늘은 참 힘든 여정이었어. 끝없이 펼쳐지는 오르막길을 숨을 헐떡이며 마침내 올라갔는데, 또 다시 끝없이 펼쳐지는 내리막길을 내려가라고 해. 그렇게 다시 내려가기를 4번을 반복하니, 비로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어. 길이 마냥 평탄하면, 네팔이 아니지, 곳곳에 펼쳐지는 소똥, 버팔로 똥,당나귀 똥, 염소 똥, 양 똥까지 운동화 하나, 긴 추리닝 하나에 의지해야 하는 나로선 밟지 않고 지나가려고 무진장 애를 썼어. 그런 나의 의지로 인해 요리조리 피하며 걷다 보니, 체력소모는 더했던 것 같아. 계속 발밑을 보고 걸으니, 나도 모르게 어린 시절, 골목길에서 개똥 밟고는 '아싸 오늘 재수 좋겠다'는 나의 웃픈 주문이 생각이 났어. 그렇게 우리 어린 시절엔 골목길과 개똥 친구들이 한데 어우러져 매일 축제를 벌이곤 했는데, 이젠 개똥이 무서워서 산책 가기가 주저해지니 지금의 어린이들은 '어떤 추억으로 과거를 기억할까' 괜한 걱정이 들더라고. 발밑을 따라 타임머신을 소환하여 이런저런 생각으로 나의 힘듦을 지워가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이 무서워지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어. 나는 신발 한 벌, 옷 한 벌 모자 하나밖에 없는데, 난 비를 맞아도 되니, 제발 옷과 신발은 망치지 말게 해달라고 하늘을 보고 빌면서 여기에 왔는데, 어. 이런 똥!!! 난 비로 해체된 똥을 구분하지 못하고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게 정신없이 도착점에 숨가쁘게 달려온 거야. 원없이 똥을 밟은 만큼 그래서 난 오늘 자신 있게 하늘에게 소원을 빌려고 해. 내가 밟은 수많은 똥을 대신하여 좋은 일이 가득하길. 2016년은 기억에 남을 만큼 힘들고 비겁한 날들의 연속이었지만, 2017년은 내가 밟은 똥의 종류와 개수만큼,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기도해. 특히,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만나 행복하고 언제나 기쁨 가득한 일만 가득하기를 간절하게 기도해. 2016년 마지막 날, 네팔의 어느 산속, 와이파이도 안 터지고, 전화도 터지지 않아 무한정 텔레파시만 방출하고 있는 뱀부에서. 크게 한 번 외쳐 본다.


HAPPY NEW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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