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9. 지금 만나러 갑니다, Seoul, Korea 170107
눈을 뜨니 마지막 아침이다.
핸드폰에서 흘러 나오는 음악을 리듬 삼아, 찬물과 열정적인 부비부비를 한 후, 거울에 비친 벌거벗은 모습을 바라본다. 거뭇하게 물든 턱수염이 이번 여행의 무게를 대신 말해준다. 나는 그 턱수염을 한 손으로 잔뜩 움켜쥔다.
‘흐음, 수염을 좀 자르고 싶은데’ 시야를 벗어나 턱밑에서 몰래 성장하는 수염이 몹시 거슬린다.
<루프탑에 위치한 식당에서는 훌륭한 카트만두의 아침을 감상할 수 있다>라는 호텔 소개서와 달리, 이른 새벽부터 곱게 내려앉은 스모그에 가려 눈에 띄는 경관을 찾아볼 수 없다. 주위에는 벌거숭이처럼 앙상한 건물들이 턱밑의 수염처럼 빼곡히 들어차 있다.
‘흐음, 스모그를 좀 없애고 싶은데’ 시야를 뿌옇게 흐린 부지런한 녀석 때문에 설산으로 둘러싸인 카트만두 분지를 감상하기는 불가능하다.
몹시 거슬린다.
“아저씨, 한국 사람이죠? 옷차림이 한국 사람이네, 혼자 왔어요?”
거리에 자욱이 깔린 스모그를 진공청소기로 잔뜩 빨아서 아저씨 입속에다가 곱게 구겨 넣어 드리고 싶다.
“네, 저는 포카라에서 히말라야 트레킹하고 오늘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등산 잘하세요, 나마스떼!”
몹시 거슬리는 턱수염을 어서 빨리 자르고 싶다.
아침 8시, 호텔 1층에서 인상 좋은 셔틀버스 아저씨가 가이드 역할을 이행하기 위해 스모그처럼 다소곳이 소파 위에 내려앉아 있다. 전날 밤 인상 좋은 아저씨는 내게, 호텔에서 공항까지 가는 셔틀버스, 아니 봉고 서비스가 운행되는데 하필 오늘은 마땅히 할 일이 없기 때문에 본인이 직접 셔틀버스, 아니 봉고를 타고 오전에는 내가 원하는 지역의 가이드 역할을 해주고 오후에는 무사히 공항으로 데려 주겠다고 제안했다. 한 손가락으로 턱수염을 잡고 택시기사와 흥정을 하는 것도 거슬릴 뿐만 아니라, 가이드 금액으로 제안하는 팁도 일반 택시 가격보다 매우 저렴했기 때문에, 흔쾌히 오케이를 외쳤었다. 그리고 몹시 거슬리던 오늘 아침, 호텔 로비에서 아저씨는 약속한 시간에 맞춰 또랑또랑한 눈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아저씨는 유창한 영어로 ‘Good Morning’을 외친다.
'잘 부탁합니다. 카트만두의 크리샤님.'
오늘의 일정은 ‘아는 형님’이 적극 추천해 준 중세풍의 예스러운 모습을 간직한 박타푸르를 오전 일찍 방문하고, 카트만두로 다시 돌아와 ‘몽키 템플’이라고 불리는 특색 있는 사원에서 이번 여행의 마지막을 정리하고자 했다. 인상과 넉살이 좋아 보이는 아저씨는 좋은 여행 경로라고 칭찬해 준다.
'후후 나의 수염, 멋있지 않아요?'
박타푸르는 카트만두에서 동쪽으로 15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14~16세기 티베트와 인도의 중계무역으로 발전하였으나, 왕국의 중심이 카트만두로 모두 이동하면서 쇠락의 길을 걷는다. 하지만 덕분에 시절이 남기고 간 시대의 모습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이질적인 경관이 관광객들을 매료시킨다고 한다.
넉살 좋고 인상 좋은 아저씨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며 도로를 가로질러간다. 도로 주변 곳곳에 무너져 내린 앙상한 건물들이 거슬린다. 1시간 여 봉고를 타고 박타푸르에 도착하니, 가이드를 자처하는 수많은 네팔인들이 내 주위를 둘러싼다. 한 손가락으로 거뭇한 턱수염을 배배꼬며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넉살 좋고 인상 좋은 아저씨가 몇 마디로 단번에 사람들을 능숙하게 해산시킨다, 그리고는 매표소에서 능숙하게 표를 산 다음, 능숙하게 유적지의 입구로 나를 인도한다. 5분 정도 길을 따라 걸으니 박타푸르 내에 위치한 더르바르 광장이 눈에 띈다. 박타푸르의 더르바르 광장은 <리틀 부다> 영화 장소로 유명하다고 하는데, 영화를 접하지 못한 나는 반가운 느낌보다는 흙과 벽돌로 가득한 갈색의 세계가 생경하게 느껴진다.
더르바르 광장에 들어서자마자, 두 눈에 동공 지진이 일어났다. 광장 주변은 무너져 버린 건물로 가득했으며, 일부 건축물은 부목을 댄 채, 겨우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넉살 좋고 인상 좋은 능숙한 아저씨의 가이드에 따르면, 2015년 인도 북부, 네팔, 방글라데시 일대를 강타한 대지진의 여파 때문에 유적의 대부분이 무너졌고, 현재는 입장료를 바탕으로 무너진 사원을 복원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능숙한 일꾼들은 오전 9시가 훨씬 지난 시간임에도 보이지 않고, 주변에 널브러진 벽돌들만이 고난도 레벨의 테트리스 게임처럼 빼곡히 쌓여 있었다. 왜 아직 공사를 시작하지 않냐는 나의 질문에 이곳 사람들의 작업 속도는 원래 그렇게 더딘 것이라며 웃으면서 나의 팔을 잡아당긴다. 경복궁처럼 완성된 유적지를 정해진 코스에 따라 구경하고 싶었는데, 무너진 유적지의 잔해들을 피해 이리저리 정처 없이 떠돌기만 했다.
안녕, 강아지, 이 주위를 떠돌던 강아지와 눈이 마주쳤다. 혀를 쭉 내 밀고 해맑게 웃고 있는 모습에 광견병을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다가가서 턱밑을 쓰다듬어 주니 배를 까뒤집고 좋아한다. 그 녀석에게는 거뭇한 턱수염이 없어서 기분이 좋다. 이런 내 모습이 대견해 보였는지 넉살 좋은 강아지 주인이 나타나서 ‘나마스떼’를 작렬한다. 무너진 유적지로 인해 좋지 않은 마음이 넉살 좋은 인사로 인해 살짝 치유되는 느낌이다.
터우마디 광장을 지나는 중, 이곳 박타푸르에서 가장 높은 사원인 냐타폴라 사원과 마주했다. 신기하게도 이 건물은 원형 그대로 보존 중이었다. 재빨리 복원을 끝낸 것인지 파괴의 신으로부터 간신히 살아남은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5층 탑으로 구성되고 높이는 30미터나 된 웅장한 건물이 압도적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곳에 잠시 발을 딛고 올라가서 갈색 세계의 장엄함에 대한 존경을 표하고, 그 주변으로 펼쳐진 무너진 사원들에게는 애도의 마음을 표했다. 보통 이런 사원에 들어서면, 나의 안위를 간절히 빌고, 나의 소원을 이루게 해달라고 떼쓰는 것이 정상인데, 어찌 된 일인지 이곳에서는 어서 빨리 이 공간이 예전의 명성대로 완성되기만을 간절히 빌었던 것 같다. 그리고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을 때, 그때 한 번 다시 찾아오겠노라 넉살 좋은 신에게 다짐을 한다.
파괴의 신이 잠시 머물고 간 자리에 새로운 유적지는 아직까지 완성되지 않았다. 하지만 파괴의 신은 나에게 무너진 것에 대한 존중과 배려심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몹시 거슬리는 것은 재빨리 완성하지 않는 더딘 작업 속도가 아니라, 정갈하게 구성된 유적지의 완성도만 기대한 채, 무너진 것에 대한 의미를 제대로 발견하지 못한 나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갑자기 나의 벗 ‘시행착오’가 생각났다.
박타푸르에서 1시간의 짧은 구경을 마치고 카트만두의 몽키 템플로 향했다.
원래 내가 가고자 했던 사원은 ‘몽키 템플’이라는 애칭이 있는 스와얌부나트 사원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원숭이들과 나의 아이스크림을 걸고 뺏고 뺏기는 추격전을 제대로 즐겨볼 심산이었다. 하지만, 이동 경로 및 스케줄 상, 스와얌부나트가 아닌, 파슈파티 사원으로 가기로 했다. 흔쾌히 동의한 이유는 그곳에도 역시 원숭이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슈파티 사원은 불교사원이 아니라 한국에서는 거의 접하기 힘든 힌두사원인데, 힌두교도들이 이 사원을 찾기 위해 멀리 인도에서도 올 정도로 이곳은 규모도 크고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곳이라고 했다. 기도를 할 수 있는 사원 내에는 오직 힌두교도들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사원군 주변만 구경할 수 있었다. 기대했던 원숭이가 빨간 엉덩이를 내밀고 사원 주변을 돌아다닌다. 신기한 광경이다. 흐뭇한 미소로 주변을 둘러보는데 퀴퀴한 냄새와 연기가 주변에 가득하다. 처음에는 고약한 원숭이 냄새인 줄 알았다. 하지만 가만히 보니, 시체를 화장 중이었다. 넉살 좋고 인상 좋고 능숙한 아저씨에 따르면 눈 앞에 보이는 조그만 바그마티강에서 이곳 사람들은 시신을 씻은 다음 6개의 화장장에서 매일 시신을 화장한다고 한다. 실제로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화장실을 줄서서 기다리는 사람처럼 하얀 옷을 입은 유족들이 질서 정연하게 자신의 화장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은 내가 기대했던 광경은 아니었다.
그런데 한 편에서는 여유롭게 풀을 뜯는 신성한 황소가 있고, 새빨간 엉덩이를 굴려가며 강가를 배회하는 원숭이가 있고, 바로 그 건너편에서는 드라마 촬영에 분주한 배우와 감독, 그리고 카메라가 있었다.
처음 겪는 신비스러운 경험이다.
‘이놈의 자슥아, 아버지라고 크게 한 번 불러봐라, 그러면 깨어날 수도 있지 않겠냐!’
신비스러운 경험이었다. 싸늘한 주검이 된 아버지의 모습을 본 것이.
중3, 어버이날 때 일어난 사건이었다.
아버지는 차가웠고, 어머니는 뜨거웠다.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어머니가 나에게 외쳐대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다. 끝끝내 나는 소리치지 않았다. 그리고 끝끝내 나는 울지 않았다. 아니 울지 못했다. 스모그가 자욱이 깔린 신비스러운 상황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드라마에서 울부짖는 장면? 그런 것은 말도 안 되는 감정 표현이었다. 아무리 소리치고 울부짖는다고 해서 돌아가신 아버지가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쓰려지셨다. 나는 구경꾼처럼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전체적으로는 22년이나 지나버려, 스모그처럼 뿌연 기억이지만, 응급실에서의 내가 본 그 때 그 상황은 22분 전에 본 무너져 버린 박타푸르의 사원처럼 선명하게 남아있다.
어버이날이 되면 가끔씩 나는 그런 생각을 한다. 그때 내가 소리를 질렀더라면, 지금 나는 더 강해졌을까? '아버지'하고 지금껏 크게 외쳐 본 적은 없다. 그래서 나는 지금이라도 크게 한 번 외쳐 보고 싶다.
아! 버!
아! 퍼!
하필이면 이 때, 아버지 원숭이가 꼬마 원숭이 손을 잡고 재빨리 도망간다. 그들이 할퀴고 간 턱 밑이 따끔하다. 광견병 걸린다는데, 이러다 죽으면 어쩌지? 고산병도 이긴 나인데. 두툼한 턱수염 때문이었을까? 큰 상처는 발견되지 않았다.
한편에선 화장 중인데, 한편에선 진하게 화장을 한 젊은 여배우가 강가에서 드라마 촬영을 하고 있다. 한쪽에선 화장 현장을 구경하고 한쪽에선 촬영 현장을 구경한다. 삶과 죽음 이것은 별개의 불연속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모든 것이 한 공간에서 연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내겐 대단히 생경하다.
어쩌면 나는 중3 때 겪었던 신비스러운 경험을 망각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기쁨과 슬픔, 화남과 즐거움 이 모든 것이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삶 그 자체라는 것을. 단지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원하고, 좋은 것의 세계로만 나가려는 나의 지나친 발걸음 때문에, 지금껏 자꾸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했던 것은 아닐까?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것. 삶이 내게 준 기쁨과 즐거움뿐만이 아니라, 아픔과 슬픔까지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 나는 지금껏 그것을 잊고 살아가고 있었다. 22년전 어버이날이 불현듯 내게 떠오른 것도 그 때문일 것이리라.
처음 포카라로 가고자 했을 때, 나는 모든 부정적 기운을 털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나의 벗 ‘시행착오’마저 포카라에서 이별을 고했다. 하지만, 나와는 전혀 관련성이 없는 이곳 힌두사원에서 내가 여태까지 겪은 부정적이고 슬프고 힘든 모든 경험과 감정들 마저도 떨쳐 버릴 수 없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깨달음이 그녀를 몹시도 보고 싶은 강력한 동기가 되었다.
이제 나는 공항으로 향한다.
그리고
지금 나는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그녀를 만나러 갑니다.
안녕 H. 이 편지를 끝으로 나도 이제 너와의 인연을 정리하려고 하니, 마음이 편하지 않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주변이 온통 너의 흔적으로 가득해서 홀로 길을 걷는 순간, 홀로 밥을 먹는 순간, 홀로 쇼핑하는 순간까지 너의 빈자리가 느껴져서 나는 오늘도 참 슬프더라. 몸과 마음이 유난히 차가웠던 그 소란했던 시절에 기적처럼 나의 일상에 나타나 준 너를 위해 네팔 여행을 경험하는 내내, 내게 다가온 너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었지.
하지만 기필코 이번에는 연애를 잘 해내고야 말겠다는 나의 강박관념, 그러나 받쳐주지 못한 나의 상황과 또 다시 반복되는 자만심, 이 모든 것이 너를 지치고 힘들게 만든 것 같아. 그래서 참 마음이 아파. 너의 마음을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했던 모든 날들이, 너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내 안의 틀 속에 너를 가두려고 했던 지난날의 아련함. 더 사랑해주지 못한 아쉬움, 시행착오를 반복한 미련함. 가슴 아리지만 이제는 가슴 가득한 미련을 털어내고 너를 보내줘야 할 것 같아.
기억이란, 좋았으면 추억이고, 나빴으면 경험이라고 하더라. 난 너에게 추억인데, 너는 나에게 아픈 경험일 것이라고 생각하니, 다시 한번 마음이 아파. 하지만 이 경험이 언젠가 더 좋은 인연을 만나는 데에 미력하나마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이제 진짜 마지막 안녕이라는 말을 해야겠구나. 한국에서의 ‘안녕’은 시작이기도 하고 끝이기도 해, 그래서 나는 ‘안녕’이라는 단어가 너무 좋아. 회자정리 거자필반. 비록 지금 나는 이별하지만, 다시 만날 것을 의심하지 않고, 다시 만나지만 이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해. 그것이 인생이고 삶이니까.
잊지 못할 추억 함께 해줘서 진심으로 고맙다.
건강해. 안녕 H.
그녀와 나는 6개월간 사랑을 했고, 시행착오가 다시 내게 오면서 아쉽게도 나의 연애는 마감하게 되었다.
그 때의 이별은 분명 힘든 일이었지만, 나를 비롯해서 나의 벗 '시행착오'까지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 작년 12월 말부터 올해 초까지 10일간의 네팔 여행을 통해 배운 깨달음으로 더 나은 삶이 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할 뿐.
시행착오를 없애는 것이 삶의 완성은 아니다. 지나온 경험을 바탕으로 반복되는 시행착오와는 능숙하게 이별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만 쿨하지 못해서 자꾸만 새로운 모습으로 내게 찾아오는 나의 벗 '시행착오'를 굳이 피해다닐 필요는 없다. 그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익숙한 시행착오는 기필코 줄이고 새로운 시행착오는 두려워하지 않고 기꺼이 맞이하는 자세. 그것만이 절대 꺼지지 않을 내 안의 번민을 지금보다 더 나은 행복으로 환하게 밝혀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안녕' 나의 벗 시행착오,
이제는 아메리카로 가자.
콜럼버스가 발견한 신대륙 바로 그 곳으로.
다시 돌아온 너와 함께라니,
묻어둔 그 때의 기억이 다시금 호기롭게 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