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지구에서 산다는 것
눈을 감는다. 어둠이 나타나면, 의식적으로 어둠을 바라본다. 눈은 여전히 감은 채로.
어느 순간, 두꺼운 백과사전 속에서만 보던 성간과 성운, 그리고 그 사이의 막연한 빛이 두꺼운 눈꺼풀 속에서 쏟아진다. 그렇게 어두운 눈꺼풀 속에서 내 안의 방대한 우주가 열리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경험해 본 적 있나요?
경험해 본 적이 없다면, 지금 당장 눈을 감아보라. 그리고 따라해 보라. 이내 곧, 밤하늘의 우주가 내 안에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쩌면 우주는 내 머리 위 어두운 하늘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어느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음과 우주는 다르지 않다. 우주의 크기를 짐작할 수 없듯이 마음의 크기도 알 수 없고, 우주의 기원을 알 수 없듯이 마음이 어디서 왔는지도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우주와 마음이 어디에서 어디로 흘러갈지 추측만 할 뿐이다.
가끔씩 마음이 답답할 때면, 나는 하늘을 바라본다. 그리고 하늘, 정확히 말하자면 우주 공간에 떠 있는 별빛, 달빛을 바라보며 기도를 한다. 어쩌면, 여태까지 내가 했던 행동들은 별빛, 달빛을 향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불빛을 향한 기도였는지도 모른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 그리피스 천문대와 같이 하늘만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올라, 어떤 피사체의 방해도 받지 않고 그저 멍하니 새까만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순간적으로 머리가 어지러울 때가 있다. 지구는 공전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는 순간이다. 더불어 우주와 마음이 하나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마음이 어지러울 때, 눈을 감고 하늘을 향해 기도하다 보면, 지나간 순간이 문득 기억난다. 그것이 하늘을 날아갈 듯 황홀한 순간이었을 수도 있고, 땅을 치며 아쉬워하던 순간이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갑자기 떠오른 그 순간만은 영원으로 기억에 남아 마음속에 다시 기록된다. 마치 우주의 별이 부지불식간에 탄생하여 하늘의 어딘가에서 자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순간은 기억이 되고 기억은 시공을 초월하여 어느새 마음의 별이 된다.
현재를 사는 지구인들은 4차원의 벽 속에 갇혀 있다. 정확히는 4차원이 지배하는 육체의 틀 속에 종속되어 있다. 그렇기에 그 이상의 고차원 형태는 우리가 이해하거나 눈치챌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현대 우주학자들은 초끈 이론, 다중 우주론 등을 통해 우리의 세계는 11차원까지 뻗어져 있다고 하지만 차원의 확장, 그것은 우리가 아무리 떠들어대도 감각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평면의 세계가 최고의 왕국인 것처럼, 여왕을 모시며 열심히 살아가는 일개미들과 마찬가지로.
막연하게 천문학과를 꿈꿨던 나는 우주가 필요 이상으로 방대한 것에 대해서 큰 의문을 가지고 있었고, 육체에 갇힌 차원의 세계가 아닌 그것을 뛰어넘는 다른 차원의 세계가 반드시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런 나의 생각을 뒤흔들었던 것이 영화 <인터스텔라>였다. 주인공 쿠퍼가 자신을 희생하며 블랙홀의 ‘사건의 지평선’으로 빨려 들어갈 때, 쿠퍼가 마주하는 것은 육체에 갇힌 4차원 (가로, 세로, 높이, 그리고 시간)의 세계를 뛰어넘은 의식의 차원, 그 중, 우리가 가장 소중히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인 ‘사랑’이라는 감정의 잉태였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갑자기 나타난 ‘사랑’이라는 또 하나의 고차원의 의식세계를 통해 과거의 행동을 바꾸게 되고, 그것이 인류를 구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결국 인간이 지니고 있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내 마음속에 강렬하게 각인되어 있는 기억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게 하는 것. 그것이 끝없이 펼쳐진 우주 속에서 인류가 할 수 있는, 차원을 뛰어넘는 가장 고결한 행동 중의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 어쩌면 우리는 우주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티끌보다 보잘것 없는 지구라는 먼지 속에서 서로의 감정을 생채기내며 하루를 훼손하고 있을지 몰라도, 마음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우리가 생산해내는 무한한 감정들과 특정 시점에 각인되는 나의 기억들을 방대하게 넓은 하늘의 서랍속에 가지각색의 별빛, 달빛으로 저장해 놓고 있다면, 우주가 가지고 있는 방대한 크기도 어느 순간 저장공간이 가득차게 될 지도 모른다.
다시 눈을 감는다. 그리고 하늘을 바라본다. 수많은 별들 중에서 내가 보유한 소중한 기억들을 서랍 속에서 하나씩 꺼낸다. 그리고 풀어 놓는다. 나의 사랑이야기를.
첫 번 째, 나의 별 ‘Planet Vancouver, 2011’
그곳으로 이제 여행하려고 한다.
그 해, 2011년
아랍인은 재스민 혁명으로 봄을 맞았고,
북한인은 김정일의 사망으로 슬픔을 맛봤고,
붕시인은 그녀가 기다리는 밴쿠버의 바다 향기를 맡으러 떠났다.
아무튼 2011년은 그런 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