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가 강인규 Aug 10. 2018

슬픔에 대처하는 두 사람

펫로스를 대하는 아빠와 아들

 아기는 밤이 되면 잠투정을 한다. 그리고 사람은 버릇을 쉬이 버리지 못한다. 그래서 아기는 소년이 되고서도 잠투정이 자투리처럼 남았다. 뭔가 잠투정을 부리고 싶은데 하루를 너무나 행복하게 보내버린 경우가 있다. 그러면 스스로도 잠투정을 부리기가 겸연쩍은가 보다. 그럴 때 아들은 고양이별로 돌아간 고양이 사진을 꺼내본다. 그리곤 어김없이 눈물을 흘리며 나의 품으로 파고든다.


 그러면 나는 9개의 목숨을 가진 고양이 이야기나 용감한 탐험가 고양이 이야기 등을 들려준다. 보통은 이렇게 다른 이야기로 관심을 돌리면 금세 이야기의 세계로 빠진다. 하지만 보고 싶은 고양이를 떠올릴 때의 아들은 집요한 면이 있다. 동화의 세계로 가지 않고 추억의 세계에서 머물러 버린다. 그리곤 자신의 희망을 이야기한다. 


 "고양이별로 돌아간 고양이가 노란색 고양이니까, 그 아이를 닮은 노란색 고양이를 입양하고 싶어요."

 포토에세이 '고양이신전' 中  

 

난 갑자기 윤리 선생님으로 돌변하여 일장 훈계를 늘어놓는다.


 '만약 새로운 고양이를 데리고 온다고 해도 그 아이는 죽은 아이와 같은 아이가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다른 고양이를 생각하면서 새로운 고양이를 데리고 오는 것은 새로운 고양이에게 실례되는 일이다.'

 

 고등학교쯤에나 배울까 말까 하는 생명윤리에 대하여 이제 열 살 남짓한 아들에게 뜻 모를 소리를 해대야 직성이 풀리나 보다. 그러나 고양이 문제라면 집요한 아들은 이번엔 완고하기까지 해진다. 다 알지만 같은 색의 닮은 고양이를 들이고 싶다고 한다. 이쯤 되면 나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다.


  어차피 나도 상처를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환자에 불과하니까. 같은 상처를 받은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방법으로 치료를 하고자 하는 것뿐이다.

 

내가 아픈 게 너무 싫어서, 내가 하는 치료방법이 맞는 방법이라고 우길뿐이었다. 만약 내가 치료하는 방법이 틀리다면 내 아픔은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아들을 앞에 두고도 마음속으로 내 상처를 우선하다니 나 참 이기적이구나.'라는 생각이 내 가슴을 한 번 더 친다. 


 아들은 한 번 크게 운 것이 마음을 씻어 내렸는지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아니 사실 아들은 한 번도 상처로 잠을 설친 적은 없다. 단지 보고 싶은 고양이를 위한 성스러운 의식을 잊지 않고 챙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들 나름으로 그 고양이를 기억하고 기리는 방법으로 말이다. 아들은 주기적으로 고양이를 위한 제사를 지내고 또 그 의식이 끝나면 빠르게 자기 생활로 돌아온다. 그러나 나는 최대한 그 고양이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고 그러다 생각이 나면 그 늪에 빠져서 허우적거린다. 


 나는 사람보다 고양이가 강하다고 믿는다. 사람은 스스로 연민하고 위로한다. 사람은 '자신'이라는 덫에 잘 빠지는 존재이다. 사람은 보통 자기 안에 최소 두 명 이상의 '자신'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를 믿는 자신, 반대로 의심하는 자신 등 보통 갈등이라는 이름으로 둘 이상의 자신을 가진다. 그러나 고양이는 자신을 믿는다. 그 믿음이 얼마나 강력한지 그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오직 하나의 커다란 고양이가 꽉 채우고 있는 느낌이다. 그래서 고양이와 나를 비교하면 내가 조현병 환자처럼 보일 정도이다. 


영원히 아픈 손가락 랑이


 그런데 가만 보면 아들도 이미 나보다 강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들의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곳에는 이미 위대한 탐험가 고양이의 영혼이 들어가 있었다. 자신을 알고 믿는 힘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고양이에 이어 아들까지 나보다 강해지다니, 나는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가. 내가 지켜야 할 존재들보다 약한 존재라니.


 변명을 하자면 나는 늙은 고양이다. 살아오면서 상처가 너무 많이 나서 작은 상처만 보아도 지금까지 겪었던 모든 상처의 경험을 떠올리는 겁쟁이 늙은 고양이다. 


그래서 내가 달라질 수 있을지는 아직은 의문이다. 물론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은 한다. 나에게도 슬픔이 단순한 슬픔이 될 수 있도록 바뀌어야 한다. 파도가 치면 맞고 또 지나가면 보내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이루어질지 자신은 없다.


 다만 늙은 상처투성이 고양이로서 내가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은 명백해졌다. 지금 저렇게 맑은 영혼을 가진 고양이들을 내 몸으로 덮어 보호하는 것이다. 그 아이들이 상처투성이 어른이 되지 않도록, 나처럼 되지 않도록 하고 싶다. 그것이 내 사랑하는 아들이든 고양이든.










고양이신전의 이야기와 일러스트레이션은 포토에세이 '고양이신전'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91195701025


매거진의 이전글 잠의 수호자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