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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잉 Dec 12. 2020

신종 성범죄를 바짝 추적해온 '그들'은 누구인가

추적단 불꽃의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를 읽고


"저는 여기서 빠질게요."     


2009년 가을, 몸담았던 학생단체의 수장이 사라진 후 이듬해 각자의 활동 방향을 논의하는 자리에 나는 찬물을 끼얹었다. 다른 동기들은 대학을 졸업한 만큼 노동운동을 시작해 보자고 막 의기투합하던 때였다. 날카로운 질문이 쏟아졌다. 기자는 활동가가 아닌 관찰가에 가까운데, 괜찮아? 누군가 물었다. 네. 저는 관찰가로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대답에 반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후 언론대학원에 진학했다고 노동, 경제 분야에서 진보 성향을 띈 언론사에 입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나 자신은 알고 있었다. 눈을 돌리고 싶을 만큼 절망적이고 비참한 사회 현실을 똑바로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이런 현실과 싸우는 과정에서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고 싶지 않았다.     


'N번방'사건을 처음으로 보도한 추적단 '불꽃'의 이야기를 담은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를 읽으면서 옛날 생각이 났다. 사회 문제를 바로잡자고 말하다 도망치면서 핑계만 너절했던 시절이었다. 누군가 내 진로 선택에 합당한 의문을 제기하면, 언제나 그럴싸한 구실을 얘기했지만 그저 나는 나약함을 어떻게든 포장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의 두 주인공은 나와 달랐다. 과감했고 용감하며,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과거의 나를 돌아보게 하는 책이었다.     


사회의 부조리를 밝히는 기자가 되고 싶었던 ‘언론고시생’이었던 시절, 나는 나 자신을 한 명의 여성이나 대학생으로 인식하기보다 그저 입사를 위한 공부를 하기에 바빴다. 지금 할 일은 사회고발을 하는 언론사에 먼저 입사하는 일이라고, 사회고발은 입사한 이후에 하자고 스스로를 다독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 충실하지 않은 채 미뤄둔 문제의식은 시간이 지나면 그저 희미해진다는 사실을 이제는 경험칙으로 알고 있다. 그런 점에서 불꽃의 활동은 사회문제 해결에 가장 필요한 자격은 개선을 위한 절실한 문제의식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줬다.  


◇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더욱 커져야 한다 


책은 불꽃이 불법 촬영물을 추적하게 된 계기부터 사회에 알려지기까지의 모든 과정과 두 명이 만나 친해지게 된 계기, 여대생으로 살아오며 느꼈던 부당함 등을 담고 있다. 성범죄 피해자를 지원하기에 미비한 현행법과, N번방 같은 불법 촬영물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방안도 함께 제시했다. 이들이 여대생으로서, 혹은 언론지망생으로서 기성 언론에서 느꼈던 부조리는 과거 내가 느꼈던 문제의식과 상당히 흡사했다. 친한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 느낌도 들었다.     


추적단 불꽃이 디지털 성범죄를 알리는 과정을 가로막았던 장애물은, 역설적으로 이들 추적단이 '여성'인 '대학생', 즉 성별이나 세대 측면에서 주류가 아닌 정체성을 지니고 있어 수면 위로 드러날 수 있었다. 디지털 성범죄와 '딥페이크 기술'을 구분하지 못하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불법 촬영물에 대한 문제의식이 불분명한 남성 사수의 '애매한' 데스킹, 피해자 본인이 아니면 신고하기 어려운 현행 법 등의 문제 등이 그것이다. 불꽃이 여성이 아니었다면, 이들이 손에 쥔 것이 많은 기성세대였다면 쉽게 보지 못했을 문제들이다. 그래서 그들 자신이 ‘여대생’이기에 문제 추적에 절실했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대목에는 공감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더 젊고, 더 많은 여성들의 목소리가 제도권에 드러나고 더 많이 주목을 받아야 한다. 제21대 국회의원에서 여성의 비율은 300명 중 여성은 57명으로 전체 19%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지만, OECD 국가 여성 국회의원 평균 비율 27.8%보다는 여전히 낮은 수준이다. 여성 국회의원이 국정감사에 여성 고위직 비율·성범죄 통계나 성차별 실태조사 제안 등을 언급한 사실만 봐도, 최소한 한국은 ‘양성평등’보다 ‘여성 불평등’을 지적하는 여성의 목소리가 필요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확실한 건 지금의 현실이 과거보다는 나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그저 묻혔을 권력형 성범죄 등의 민낯에 많은 여성들이 공감해 ‘미투’로 이어질 수 있었고, 기술 발달에 따라 달라진 신종 성범죄가 밝혀지는 과정을 다루는 출판물도 서점 가판대에 올라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여성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일이, 딸을 가진 엄마 입장에선 반갑기도 하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6744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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