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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잉 Feb 04. 2021

'어른아이'가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온 사연

<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를 읽고


행복했던 유년 시절의 기억이 적지 않았지만, 당시를 회고해보면 떠오르는 건 옷장 속에 스스로 들어간 어린 여자아이의 모습이다. 그는 부모님이 싸우면서 고성을 지르거나 물건을 던지는 소리가 위협적이라고 느꼈고, 수시로 옷장 안에 들어가 자신이 이 집에 없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한편으론 이렇게 되뇌었다. '나만 여기서 안전하면 돼.'


시간이 흘러 아이는 청소년이 되고 어른이 되었지만, 위험한 상황을 맞닥뜨릴 때면 여전히 마음 속 자신만의 옷장에 스스로를 가둔다. 이제는 자신을 위협한 환경을 안전하게 바꾸기 위해 목소리도 낼 수 있고 법의 힘을 불러올 수 있을 만큼 성장했는데, 그런 자신을 인식하지 못했는지 아니면 그 방법이 편하다고 생각했는지 여전히 이 방식으로 자신을 지키고 있다.


그렇게 나는 여성으로서 안전하다고 확신할 수 있는 길만 골라서 선택해 왔다. 밥 먹는 자리에서 숟가락을 가져오는 등 사소한 일 하나도 엄마에게 주문하는 아빠에게 핀잔을 주면서도 정작 내가 그 일을 대신 하진 않았다. 성인으로서 경제적 자립은 당연한데, 여기에 가사와 육아노동까지 하고 싶지는 않아 비혼을 결심했다. 아빠같은 사람을 만나지 않겠노라 다짐하면서 이른바 '상남자' 같은 남자를 피해 연애를 하다 우연히 결혼까지 했다. 직장 역시 여성으로서 출산, 구조조정 등 외부 요인 때문에 일자리를 잃지 않을 수 있는 안정적인 곳으로 택했다.


내가 선택한 '안전지대'는 언제부턴가 허구에 가까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산을 통해 아이를 갖게 되면서다. 출산 이후 가사, 돌봄 노동을 도맡으며 체감한 엄마의 일상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다. 엄마나 아내, 며느리 등 여성에게 더 많은 돌봄 노동의 의무를 지우고 배우자와 그 부모님에게 순종을 요구하는 분위기는 나 자신의 안위만 알던 때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들었다.


더욱 위협적이라고 느꼈던 건 아이를 둘러싼 환경이었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자신의 후배에게 한 행동, 미성년 여성을 대상으로 한 디지털 성착취 범죄 등은 누구보다 미래의 아이에게 위협적인 환경이었다. 이 환경을 바꾸지 않으면 그 대가를 아이가 치르게 될 것만 같았다. 그렇게 여성주의 온라인 독서모임에 참여했고, 다른 사람과 이야기 나누고 책을 읽으면서 이기적이었던 그동안의 내 모습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결혼은 나 자신에게 많은 역할을 부여하기도 했지만, 그 관계를 통해 자를 둘러싼 주변을 알게 해 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는 이런 활동 중 하나로 읽게 된 책이다. 책에 나오는 여성들은 모두 나와 살아온 환경도, 연령대도 다르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이렇게 많은 공감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어떤 점은 안타깝고, 어떤 점은 감동적이면서 내 얘기 같았다.


딸을 키우는 부모로서 아들을 키우는 부모는 어떤 식으로 성교육을 계획하고 있는지 궁금했는데 그런 사례를 접할 수 있어 유익했고, 1인분의 자립을 위해 출산 이후에도 회사를 나오는 한 저자의 목소리에 퍽 공감이 됐다. 어린 시절부터 출산 이후에 이르기까지, 전 생애주기를 엄마의 도움을 받으며 지내는 다른 저자의 이야기 역시 내 얘기 같아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다. 페미니즘의 정확한 이론적 배경이나 내 생각의 좌표까지는 알 수 없어도, 이 실천적 풍조가 나 자신만의 안위를 지키는 일을 넘어 나와 같은 환경에 처한 다른 이들을 보도록 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는 안전하다고 느꼈던 '옷장'에서 나오려고 한다. 위협이라고 느꼈던 환경에 두 발을 딪고 서서 무엇이 문제인지 파악하고, 바꿀 수 있는 부분은 바꾸고 싶다. 그 대상은 당장 나와 살을 맞대고 사는 내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일 수도 있고, 거창하게는 어떤 제도 속 법이나 사건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됐든 옷장 밖의 세계를 안전하게 만드는 일이 결국 나와 나의 아이도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길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부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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