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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잉 Apr 07. 2021

엄마가 된 후 어려운 친척과 가까워졌다

당신과 내가 새롭게 관계맺는 순간

"엄마, 그런 거 하지 마."


밥상 앞에서 손녀에게 기도하는 의식을 알려주려던 엄마를 제지하는 말을 습관처럼 뱉었다가 순간 멈칫했다. 엄마 옆에 앉아있던 고모님이 헛웃음을 터트렸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승용차로 5시간 걸리는 전남 구례에 고모님을 보러 내려와 반가운 인사를 나눈 후 나누는 첫 식사 자리였다. 엄마는 고모님의 헛웃음을 듣고 멋쩍게 웃었다. 종교가 없는 고모님 입장에선 엄마의 그런 행동이 편하게 느껴질 리 없었을 텐데, 엄마에게 괜한 핀잔을 준 것 같아 내심 후회했다.


결혼 전까지 엄마와 고모의 관계가 어떨지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탓에 평소에 엄마에게 하던 버릇이 그대로 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딸을 키우는 입장에서 엄마와 고모의 관계를 생각해보니, 둘은 편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공고한 위계가 들어설 수밖에 없는 사이였다. 부모가 점지한 이성과 몇 번 만나보지도 못한 채 결혼하는 일이 흔하던 당시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그럴 법도 했다. 엄마 역시 병원에서 환자로 만난 아빠의 첫인상이 별로였지만, 할아버지의 인상이 너무 좋아 자신의 아들을 만나보라던 할아버지의 부탁을 못 이겨 결혼을 결정할 정도였으니까.


여행 첫날 고모님이 차려준 저녁상.


그때마다 고모는 언제나 엄마에게 따뜻하게 대해 줬다고 했다. 물론 고모님의 인품의 넉넉하기 때문이겠지만, 당신에겐 당신이 엄마에게 잘 보여야 할 이유가 있었을 테다. 키도 작고 허약한 15살 터울의 남동생인 아빠를 간호사인 엄마가 잘 돌봐줬으면 하는 마음이 커서가 아니었을까. 실제로 아빠는 2014년 간성혼수가 온 이후로 하루 중에 말귀를 이해하는 시간보다 그렇지 못하는 시간이 더 많았고, 엄마는 그런 아빠 옆에서 자신의 직장까지 퇴사하면서 성심껏 돌봤다. 내가 엄마라면 고모님에게 좀 더 당당한 태도를 보였을 텐데 엄마는 그런 기색도 잘 내비치지 않았다.


고모님의 집에 머문 지 이튿날, 아빠에게 또 한 번 엄마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왔다. 고모는 아빠의 뒤처리를 도와준 엄마를 보며 말했다. "다른 여자 같았으면 진작에 도망갔지. 나는 그래서 자네가 고맙고 미안해. 동생은 의사가 이렇게 24시간 돌봐주니 얼마나 좋아?" 그 '다른 여자'는 왠지 나 같은 사람일 것만 같았다. 나는 그 '다른 여자'의 입장에 빙의돼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다. "월급이나 제대로 주면서 돌봄을 받는지 모르겠네."


밥 차리고 치우는 일은 주로 고모님이 주도하고 엄마는 거들었다. 나도 손을 보태려고 주방을 얼쩡거리자 고모님은 "애엄마는 애나 보라"며 은근슬쩍 나를 배려해주셨다. 실제로 거실 전등 스위치를 내리려고 하는 등 사고를 치려고 시동을 거는 아이 곁에 붙어있느라 정신이 없기도 했다. 그동안 몸이 아팠던 탓이겠지만, 아빠는 그저 소파에 초점 없이 앉아 있었다. 그런 아빠가 쉬러 방에 들어가 고모와 엄마, 나, 아기가 남을 때면 육아 환경과 이후 육아 계획에 대해 대화를 나누면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고모님과의 대화가 항상 기꺼웠던 건 아니다. "애는 둘은 낳아야지", "옛말에 며느리가 주는 밥 먹으면 점심 전에 굶어 죽는다는 말이 있었어", "이모 뼈는 버려도 고모 뼈는 짊어지고 간다던데 그만큼 친가의 정이 중요한 거야" 등등. 이런 말에 내가 예민하게 반응할 자리는 아니었기에 잠자코 있었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무심코 흘려보내기 껄끄러운 말들이 섞여있는 건 어쩔 수 없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엄마는 고모님이 한순간도 쉬지 않고 음식을 만들거나 집을 치우는 등 몸을 움직이느라 자신도 덩달아 분주해졌다고 털어놨다. 정작 아빠는 평온해 보였지만, 역시나 그 순간에도 아빠는 말이 없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누이를 엄마로 여긴 지 오래라 누이의 돌봄을 받는 데 익숙해진 탓일까. 동생에 대한 사랑만 있으면 누이는 저렇게 착취당하듯 홀로 바빠도 되는 걸까. 씁쓸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친척 모임을 썩 반기지 않았다. 또래 친척도 없었고, 부모님을 따라 가면 어른들은 줄곧 첫째는 아빠를 닮았다든지 다른 식구 누군가는 언제 아이를 낳았다든지 하는 식의 대화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친척 모임은 대체로 누군가의 아들이나 딸로만 존재한 채 개인의 개성이나 고유함을 털어낸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누군가의 아들이나 딸이 아닌, 한 아이의 엄마와 배우자의 아내가 되면서 달라진 점이 있다. 앞으로 만들어갈 개인의 역사에 서로가 관여하게 됐다는 사실이다. 이런 입장이 되고 나니 부모의 과거가, 그리고 그들 형제의 과거가 새롭게 보였다. 그리고 멀게만 느껴졌던 팔순 가까운 어르신이 아들뻘의 남동생을 위해 족발이나 쑥개떡 등 먹을거리를 끊임없이 내놓는 그 마음을, 이제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언젠간 나도 이런 과거를 나침반 삼아 앞으로의 시간을 조망해야 할 순간이 오겠지. 물론 딸에게 '엄마가 이렇게 살아왔으니, 딸인 너도 이렇게 살아라' 하는 식의 조언은 하지 않을 생각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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