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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나 Sep 01. 2024

마르크스 대신 쇼펜하우워

그나마 강사로만 명맥만 이어가던 서울대의 마르크스 경제학 수업이 수강생이 없다는 이유로 폐강됐다고 한다. 거기서 마지막까지 강의를 했던 선생님은 과거 돈지랄을 할 때 내가 알았던 분이다. 아, 저기 꿋꿋이 계셨구나. (이때 나의 돈지랄이란 임신우울증에 걸리고 해결책으로 대학원 수업 듣기라는 비싼 테라피를 결정했던 것)


모두가 읽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제대로 읽은 사람이 별로 없는 책 중 하나인 자본론을 완독 할 수 있었던 게 저 선생님 덕분이었다. 매우 단호하고 단정하게 마르크스의 논지를 전달해 주셨는데 절대 웃지를 않으셨지. 웃을 일이 아예 없는 사람 같았다. 이미 월급쟁이 노동자인 상태에서 수업을 들었던 나로서는, 마르크스의 표현대로 '노예상태'이자 '허위의식'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었거나 현 세계에서 19세기의 전제가 통하지 않는 상황이 보였기 때문에 의문이 종종 생겼다. 그러나 당시 선생님에게 질문을 하면 왜 그런 당연한 게 이해가 안 가냐는 의문을 온 얼굴에 띄우고 눈 한번 깜박이는 것조차 억울한 것마냥 쏘아보며 대답을 해주셨다. 혼나는 것 같았다. 미소 한 번 없이 처절하게 현세의 조건과 싸우는 분에게 속세의 내가 미천한 질문을 했다, 싶었던 기억이 난다. 


이 선생님, 이 세상에서 평범한 생활이 가능할까라는 오지랖 넓은 걱정을 하다가 놀란 건 저녁초대를 받아 집에 갔을 때였다. 왠지 저 세계 학문에 충실하면서 이 세계 생활이 동시에 가능할 거라는 상상력이 나한테 부족했단 걸 깨달았달까. 선생님의 아내분은 자본주의가 적응을 위해 변절한 형식 내용 중 하나인 일종의 사회보장 관련 전문가셨다. 아니, 변절자와 한 팀이라니! 집에는 사회보장제도 관련 책이 선생님의 공격적? 책들과 함께 사이좋게 정리돼 있었다. 선생님은 또 저녁거리와 관련해 가성비 높은 쇼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하며 대자본이 경영 중인 유통업체를 솜씨 좋게 이용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줬다. 뭐, 지금 생각해 보면 당연한 건데 당시 나는 어딘가에서 균열이 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여하튼 그 선생님은 한 때는 설대학생 수백 명이 농성까지 벌여가며 얻어낸 마르크스 경제학 수업의 명맥과 김수행 교수의 수제자로서의 역할을 계속 유지하면서, (어쩌면 선생님 기준에서) 수많은 변절자들 사이에서 학문적 꼿꼿함을 유지하며 지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다 내가 기사에서 접한 것처럼 마르크스가 현실세계에서 정치체로서는 물론, 학문 영역에서도 폐기됐다는 선언문을 받아 든 마지막 사람이 됐다. 기분이 얼마나 안 좋을까. 한 사람이 온 맘을 다해 믿었던 것이 이런 식으로 뒤엎어져 버리면 통제 불가능한 강력한 전향자가 되기도 하는데. 나처럼 공부도 대충 하고 좋은 게 좋은 거죠, 하며 확신 없이 살면 적당히 흘러가는 삶을 살 수 있는 데 반해 확신인들은 세계가 없어지는 충격을 받는다. 실제로 믿었던 세계가 배신당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면 신은 이들이 세상을 보던 눈알 자체를 바꿔버린다. 김문수를 보라. 


서울대에서 마르크스 경제학 수업이 폐강됐다는 기사는 짧게 다루어졌다. 여적이나 만물상 같은 칼럼들은 마르크스 경제학이 교조적 이론에 사로잡혀 급변하는 시대 변화에 따라가지 못한 결과라며 당연하게 여기면서도 학문의 다양성 측면에서는 아쉽다고 평했다. 한 때는 지구인의 절반이 추종하고 전쟁까지 불사하게 만든 이즘이라면 어딘가 인류가 기억하고 연구할 만한 부분이 있는 게 분명하거늘, 이런 취급이 맞는가. 나는 그저 마르크스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전제가 틀렸다고 생각할 뿐이다. 어떻게 노동자가 소외되고 자본이 크는지에 대한 분석 자체에 대해서는 시대의 사고에 도끼질을 하는 통찰력을 보여준다. 미약한 내가 거기에 개기질 못하고 기생하며 살아서 그렇지, 학문적 성과 자체로 이어가야 할 필요는 물론 자본주의가 완벽?해 지는데 좋은 역할을 하는 근거가 돼야 할 실용적 이유가 있다. 


결국 이렇게 됐구나 마르크스여, 당신은 인간종에 대한 애정이 너무 깊었다네. 탐욕과 이기심이 얼마나 대단한 동력이고 얼마나 거대한 성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간과했고, 민족이니 겨례니 하는 상상의 공동체나 이즘에 얼마나 우리가 허약한지도 간과했다고 보네. 내가 투자한 자원의 매몰비용이 아까운 것은 물론, 이 세계에 대한 적응을 거의 마친 노인의 입장에서는, 조금 나쁜 말로는 '의식화' 조금 좋은 의미에서는 '시각교정'의 기회가 되는 학문적 접촉면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게 안타까울 뿐이네. 젊은이들이 개인이 아닌 구조 차원에서 뭔가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하는 이즘이란 게 다 사라진 시대가 됐네. 쇼펜하우워나 니체가 인기가 많아진 것도 이런 맥락이겠지. 뭔가 어딘가 잘못된 거 같기는 한데 문제의 원인은... 내 안에 있숴! 개인에게, 개인에게, 또 개인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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