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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남설 Nov 21. 2023

도시를 디자인한 찰스왕

파운드버리는 실패작일까?

아마 이번 주에는 영국과 그 나라의 왕 찰스 3세에 관한 뉴스를 자주 보게 될 것 같다. 지금 우리나라 대통령이 찰스 3세의 국빈 초청을 받아 영국을 방문 중이다.


찰스 3세는 다이애나와의 결혼과 파경 등 사생활 논란 때문에 바람 잘날 없는 왕세자 정도로 각인되어 있지만, 사실 꽤 뚜렷한 소신을 지닌 인물이다. 넷플릭스 시리즈 <더 크라운>(마침 최근 새 시즌이자 마지막 시즌 공개)에도 나오지만, 찰스 3세는 왕실이 지나치게 권위적이며 의전 등에 예산을 너무 많이 쓴다고 쓴소리를 곧잘 했다.

영국의 왕 찰스 3세. ⓒ파운드버리 공식 홈페이지(pouudbury.co.uk)

특히, 그는 기후 문제에 관심이 컸다. 이미 1970년대 기후 변화가 '인류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이라고 경고했다. 자신의 집과 차에서도 재생에너지나 태양열에너지를 썼다.


찰스 3세는 젊은 시절부터 건축과 도시 문제에도 열정적이었는데, 환경주의자로서의 면모가 그의 건축관과 도시관에서도 어느 정도 나타난다. 그는 영국의 도시 환경이 좀 더 생태적, 좀 더 인간적, 좀 더 공동체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철저하게 직선적이고 수직적이었던 모더니즘 건축은 그런 찰스 3세의 적이었다.


"왜 모든 것이 수직적이고, 직선적이며, 구부러지지 않아야 하는가?" 이것이 찰스 3세의 문제의식이었다. 그는 초고층 건축물을 "과도하게 부풀려진 남근 숭배의 건축물이자 건축가의 자아만을 드러내며 보는 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드는 진부한 안테나"라며 싫어했다. 비타협적인 모더니스트 미스 반 데어 로에가 런던 한복판에 계획한 건축물을 두고는 "거대한 유리 밑동(a giant glass stump)"이라고 폄하했다.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가 런던에 계획한 건축물 투시도. ⓒJohn Donat(Archidaily.com)

찰스 3세는 2014년 저명한 건축비평지 <아키텍처럴 리뷰(The Architectural Review)>에 직접 자신의 건축관과 도시관을 설명하는 칼럼을 기고했다. 이 글은 "지구상에 30억 명이 더 늘어날 2050년까지" 이 도전에 맞서 무엇을 할 것이냐고 모든 건축가와 도시계획가에게 묻는다. 찰스 3세는 집의 기하학적 형태부터 보행자 중심 환경까지 10가지 원칙을 십계명처럼 늘어놓는다.


찰스 3세는 왕세자로서의 권력을 그의 건축적·도시적 이상을 실현하는 데 썼다. 1993년, 런던에서 남쪽으로 200킬로미터 떨어진 왕실 사유지에 '파운드리 뉴타운(Poundbury Newtown)' 혹은 '뉴 파운드리(New Poundbury)'라고 불리는 도시를 설계하고 건설했다. 공공·상업·의료·업무 등 생활에 필요한 모든 시설에 걸어서 닿을 수 있다는 개념을 적용했다. 돈이 좀 없는 사람도 도시 중심부에 살 수 있도록 시세보다 저렴한 주택을 30% 이상 공급하는 일에도 신경을 기울였다.

파운드버리 마스터플랜(1987). ⓒ파운드버리 공식 홈페이지(pouudbury.co.uk)

파운드리는 다분히 논쟁적인 도시다. 우리나라 한 행정동만한 도시에 약 5000명 정도가 사는데, 고층 건물은 거의 없다시피 한다. 건물들의 생김새를 두고는 "빅토리아 시대에서 시간이 멈춘 것만 같다"라는 인상평이 나온다. '보행 중심 도시'를 내세웠지만, 주민 4명 중 3명이 쇼핑하러 갈 때 자가용 차량을 쓴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집의 70% 정도가 단독 주택인데, 일반적으로 단독 주택 한 채는 아파트 한 세대보다 에너지 사용량이 크다.


그래서 에드워드 글레이저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는 파운드리를 두고 "사람들은 중세 농노처럼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현대인은 에너지를 쓰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뜻인데, 찰스 3세가 왕족이라는 점도 겨냥한 듯하다)"라고 혹평했다. 반면 2000~2008년 런던 시장을 지내며 초고층화를 이끌었던 켄 리빙스턴에 대해선 자본을 대량 유치해 늘어난 세금을 복지에 쓸 수 있었다며 치켜세웠다. 에드워드 글레이저의 결론은 리빙스턴식 '도시의 승리'(그의 저서 제목이기도 하다)였다.


파운드리는 정말 패배한 도시일까? 그럴 수 있다. 이런 저밀도 전원도시는 지나치게 이상적이다. 아마 왕족이 대대로 물려받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사유지가 있었으니 가능한 작업일 것이다. 게다가 통계로 드러난 반생태성은 부정할 수 없다.

파운드버리의 풍경. ⓒ파운드버리 공식 홈페이지(pouudbury.co.uk)

하지만, 언제까지 찰스 3세의 판정패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2000년대 런던과 두바이 등 세계 곳곳에서 가동됐던 마천루 프로젝트의 결말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꼭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마천루 지수(Skyscrapper Index·호황기 착수한 마천루 건설이 끝날 때쯤 불황기가 찾아온다는 가설)'라는 말이 나온 배경이다.


어쩌면 모더니스트들의 기술, 효율, 고밀도의 강조는 그때가 마지막이었는지도 모른다. 저성장과 인구 감소를 생각해야 하는 시대는 오히려 인간, 감동, 다양성을 이야기하는 토머스 헤더윅 같은 건축가(그는 영국인이다)를 주목한다. 찰스 3세의 관점은 좀 더 무겁게 평가되어야 한다.


*참고자료

- 에드워드 글레이저, 「도시의 승리」, 해냄, 2011

- 사이먼 가필드, 「거의 모든 시간의 역사」, 다산초당, 2018

- 리처드 윌리엄스, 「무엇이 도시의 얼굴을 만드는가」, 현암사, 2021

- The Prince of Wales, 「Facing up to the future: Prince Charles on 21st century architecture」, 『The Architectural Review』, 20 DECEMBER 2014

- 신은별, 「찰스 3세가 말했다…"내가 만든 도시에선 부자와 빈자가 함께 살게 하라"」, 『한국일보』, 2023년 7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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