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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예진 Dec 14. 2020

서방 세계 속 무슬림의 현주소

넷플릭스 티브이 시리즈 Caliphate를 보고



스웨덴에서 공전의 히트를 했다는 TV시리즈 칼리페이트. 어찌나 흡인력이 쎈지 이틀동안 8부작을 다 끝냈을 정도로 정신을 쏙 빼놓고 봤다. 언제부터인가 밀레니얼 시리즈를 필두로 스웨덴 장르소설들이 신주류가 되어가고 있는데, TV시리즈 분야도 예사롭지 않다고 느꼈다. 칼리페이트도 소설이 원작이라는데 짜임새부터가 미국식 장르물의 전형성에서 자유롭고, 카메라 작업도 이색적이다. 


카메라가 이끄는 초점을 따라가다가 보면 경험에 의한 잔상 때문에 무의식으로 행하는 예측은 번번이 무시 당하고, 스릴러를 다루는 미국식 편집 영상에 내가 얼마나 길들여져 있었는지 깨닫게 된다. 인물을 비추는 방식은 극한 상황에서조차 담담하고 현실적이어서 ‘가짜’인 걸 알고 볼 때 으레 각오하는 ‘그렇다고 치고’ 봐주는 노고를 동원하지 않아도 된다.  


배경은 네 군데로, 시리아의 무장단체 소굴과 스웨덴의 경찰, 학교, 일반 가정이고, 이야기를 이끄는 중심 인물들은 대부분 여성이다. 이슬람 극단주의에 빠진 남편으로 인해 시리아에 갇혀 살게 된 아기 엄마, 시리아에서 걸려온 구조 요청 전화를 받게 되는 스웨덴 여형사, 화목한 가정에서 따뜻한 부모의 보살핌 속에 성장하지만 스웨덴 사회는 무슬림을 배척한다고 느끼는 십대 자매, 걸핏하면 딸을 두들겨패는 아버지 때문에 집을 무서워하는 한 소녀. 그리고 이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의 구심점에 소녀들이 다니는 학교의 보조교사인 ‘좋은 남자’가 있다. 그는 사교적이고 다정다감한 성격의 소유자로 많은 사람들의 호감을 얻고 ‘친구’가 되는데, 문제는 그가 이슬람 무장단체의 비밀 요원이라는 정체를 숨기고 있다는 것. 


개인적인 경험을 좀 보태자면, 살면서 여러 지역 출신의 무슬림들을 만났고, 그들 중 일부는 친구이기도 했고, 이웃이기도 했고, 자주 가는 가게 주인이기도 했고, 몇 번 말을 섞어본 사람이기도, 그냥 지나가는 행인이기도 했다. 히잡을 쓰기도, 차도르를 쓰기도 했고, 머리카락을 내놓고 생활하지만 메카를 향해 기도는 잊지 않는다는 경우도 있었다.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쪽인 북아프리카 계열이기도 했고, 스스로를 유럽 사람이라 분류하는 터키인이기도 했고, 파키스탄인이기도 했고, 이란인이기도, 시리아 출신이기도 했다.


얼핏 봐서는 실감하기 어렵지만 지구 상 인구의 상당수가 무슬림이다. 그리고 현재 그 무슬림들의 일부는 역사의 파란 속에서 온갖 풍파를 겪거나 일으키는 중이고, 세상 대부분의 정치적 혼란이 대개 그렇듯 중동 지역의 그것에도 열강 국가들의 입김, 종교를 이용한 선동, 정권 야욕에 피가 끓는 자들의 무자비한 설계로 바람 잘 날이 없다.   


유럽에 살 때나 미국으로 와서 살게 된 후에도 테러의 위험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파리에 살 때는 크고 작은 폭탄 테러가 곳곳에서 벌어졌지만 그러려니 하고 살았고, 월드트레이드 센터가 폭격 당한 911 때는 마침 문제의 비행기가 출발한 보스턴에 살고 있었는데, 바로 다음 날 나는 그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야하는 상황이었다. 무심코 아침 뉴스를 틀었는데 월드트레이드 센터 빌딩 하나에 연기가 나고 있었고, 잠시 후 또다른 비행기 하나가 날아와 나머지 빌딩에 부딪쳤다. 잠에서 덜 깬 눈으로 영화 상영 중인 건가 하면서 멍하고 있었던 게 기억난다. 그리고 보스턴 로건 공항의 모든 비행은 한동안 일제히 취소되었다. 


유럽에 살 때 중동 출신들의 소외감, 때로는 유럽인들에 대한 그들의 적개심이나 분노 같은 걸 읽은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어떤 때는 좀 심각해 보였고, 어떤 때는 그저 서운함 정도로 보였고, 어떤 때는 일상에 체화되어서 의도적으로 무감각하려는 태도로 보이기도 했다. 그 모든 것들은 우리가 일본과의 과거사로 인해 어떤 입장과 정서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식민 시대 때 명과 암 중 어느 쪽에 속해 있었는지에 따라 조금씩 다른 양상으로 나뉘었다. 더하여 그들은 인종과 종교 문화 자체가 유럽의 그것과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유럽인들 속에 거주하면서 혼란스럽고 불편한 정체성의 진동을 감당해야 했다. 더러는 정체성의 오리지널리티를 움켜쥐고 버텼고, 더러는 뼛속까지 유럽화되어 백인들에 흡수된 삶을 선택했다.


칼리페이트는 이 문제를 가리키고 있는 이야기다. 멀쩡히 살아가던 영혼들이 어쩌다가 급진적 무슬림이 되어 불구덩이로 걸어들어가는지, 신의 말씀이라는 명분 하에 세뇌된 이들이 어떤 경로로 테러 단체들의 소굴로 팔려가는지. 우리는 이러한 사회 문제가 단지 스웨덴과 시리아를 잇는 악의 고리에 국한된 것이 아닐 수 있음을 주시해야 한다. 소외되고 서러운 이들의 분노를 결집시켜 총알받이로 쓰고 원하는 것을 이루는 세력은 인류의 도래 이후 늘 존재했고, 대부분의 경우 그로 인해 극단적인 일들이 벌어지며, 총알받이들은 필연적으로 쓰인 후 버려진다. 


초연결 사회에서 이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고 다시금 느끼면서 보다가 스웨덴이 TV시리즈를 이 정도로 잘 만들 수 있는 나라인가 의문을 갖고 갸웃했는데 이내 수긍했다. 잉마르 베르그만 감독을 배출한 나라 아닌가. 탄복할만한 작품이 나온 게 새삼스러울 건 없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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