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엄마가 시각장애인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엄마들이 아이들을 위해서 하는 보통의 일들, 공부 도와주기, 소풍 도시락 싸기, 여행 가기 등등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다.
우리 엄마는 시각장애로 인해 좀 느리고 때때로 남들과 조금 다른 방법들을 활용하여 일상생활을 해야 하지만, 위에서 말한 일들을 매우 탁월하게 잘 해 주신다.
또한, 다른 엄마들과 마찬가지로 공부를 안 하면 잔소리 폭탄을 잔뜩 투하하기도 하고, 내가 속상하고 마음 아파할 때면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내 편에 서서 위로해 주고 도움을 주는 그냥 우리나라의 평범한 열혈 엄마들과 전혀 다를 게 없는 엄마다.
내가 유치원에 다닐 때 있었던 일이다. 그날은 어린이 날 파티를 위해 엄마들이 각각 한 가지씩의 음식을 해 와서 나누어 먹는 날이었다.
우리 엄마는 이런 날이면 남들보다 장애로 느린 속도를 감안하여 새벽 4시 30분부터 일어나 정성스럽게 도시락을 싸 주시곤 했다. 그날도 아이들이 좋아할 것 같은 까르보나라 떡볶이와 우리 엄마의 필살기 삼색 랜덤 주먹밥(다진 당근, 스크램블 에그, 다진 브로콜리로 주먹밥을 맛나게 만들고 그 안에 치즈 불고기, 가쓰오마요, 견과류 잔멸치 볶음 등을 랜덤으로 넣어 주셔서 보는 재미와 먹는 재미가 있는 맛있는 주먹밥)에 애플 청보도까지 삼단 찬합에 정성껏 싸 주셨다.
유치원에 가서 이 음식을 꺼내 놓으니 맛보신 담임 선생님께서 너무 맛있다며 이렇게 말씀하셨던 걸 지금도 잊지 못한다.
"어머! 이모님이 이렇게 맛있게 만들어 주셨구나!"
나는 그 말을 듣고 어린 맘에도 조금 화가 나서 제법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아니에요. 우리 엄마가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직접 만들어 주셨어요."
그렇다. 지금 좀 커서 생각해 보면 아마도 선생님은 시각장애를 가진 우리 엄마가 이렇게 음식을 잘 할 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선생님은 내 말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셨고, 다른 선생님들과 아이들까지 너무 맛있다며 난리가 나서 정작 나는 제대로 맛보지도 못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그날 저녁 엄마한테 들은 이야기로는 우리 반 엄마들 단체 톡방에서 엄마들이 이응이 까르보나라 떡볶이가 너무 맛있었다고 애들이 난리라 레시피 좀 공유해달라고까지 했다고 하셨다.
우리 엄마는 장애를 감안하지 않더라도 절대적으로 요리를 잘 하셔서 초등학교 입학 이후에도 종종 도시락을 싸거나 학년 말 파티에 맛있는 걸 가져가면 내 어깨가 으쓱해지곤 했다.
하지만 엄마의 장애로 엄마와 제대로 할 수 없는 일 때문에 속상했던 기억도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보드게임을 엄청 좋아해서 지금도 엄마 아빠와 인생역전, 모노폴리, 클루 등을 함께 하지만 사실 엄마는 아빠와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어떤 보드게임들은 하기가 힘들다.
어느 날 아빠는 안 계셨고 엄마와 나 둘이서 집에 있는데 보드게임이 너무 하고 싶은 거다. 하지만 엄마가 할 수 없는 게임이라는 걸 알고 있던 나는 그걸 해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결국 너무 놀고 싶었던 나는 아예 눈이 잘 보이지 않아도 엄마랑 할 수 있는 보드게임을 새롭게 창조하고 말았다.
그건 바로 우리가 직접 말이 되고 우리 집을 보드게임 판 삼아 상자만 한 커다란 주사위를 던져 가며 우리 집 끝까지 누가 먼저 가는지 시합해 보는 나만의 보드게임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얼마나 보드게임이 하고 싶었으면 어린 내가 이런 신기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는지 지금 생각해도 나 자신이 대견할 정도다.
그야말로 몸으로 하는 보드게임 아닌가?
그 어렸던 어느 날, 엄마도 내 아이디어에 감탄하며 나와 너무 신나고 즐겁게 몸으로 보드게임을 했다.
이런 추억들을 떠올리고 있으려니 엄마와 나는 서로에게 좀 더 좋은 사람, 더 사랑하고 더 멋진 아들과 엄마가 되려고 이렇게 끊임없이 서로가 할 수 있는 노력을 하며 조금 다른 발걸음을 맞추어 가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