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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리아저씨 Jan 17. 2020

4.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 이민 일기 5, 6 & 7

나의 인생 모토 중 하나는 'Don't let a dream be a dream.' 이다. 의역하면 '꿈을 단지 꿈으로만 두지 말고, 실행에 옮겨라.' 정도가 될텐데, 아래의 문구들은 이민 초기 극심한 스트레스로 불면의 밤들을 보낼 때 마음을 다 잡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었다. 


  * 어디에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어디로 가고 있는가가 가장 중요하다. (올리버 웬델 홈스) 

  * 나를 죽이지 않는 모든 공격은 나를 강하게 만들어준다. (니체)


-       이민일기 5


수습 기간이 끝나면서 쉐어를 할까, 하숙을 할까 고민을 하다가 하숙을 선택했다.


주당 300불로 만만치 않은 금액이었지만, 식사나 빨래 걱정 등을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하숙을 선택했는데, 한국에서 드라마로만 하숙집을 접했던 나의 기대는 첫날부터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아침은 알아서 씨리얼을 챙겨 먹어야 하고, 너무나 자주 면 종류로 메뉴를 대충 제공하는 식단은 곤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전날 저녁에 냉면을 먹었는데, 다음날 도시락은 스파게티, 다시 저녁으로 칼국수를 먹고 나서는 하숙 생활을 2달만에 끝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호주는 그나마 교통이 괜찮은 대도시라 하더라도 차 없이 돌아다니기란 쉽지가 않다. 25km 정도의 거리면 50불에 육박하는 택시는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교통 수단이 아니다. 회사를 마치고, 차 없이 쉐어집을 보러다니는 것은 생각만큼 수월한 일이 아니었다.


Public Transportation 웹사이트에서 가고자 하는 지역까지의 대중 교통편과 다시 그곳에서 하숙집까지의 교통편을 알아본 후 대장정을 시작하곤 했다.


대부분 기차역에서 내려서 주소지까지 걸어가려면 족히 20, 30분은 걸렸다. 하루는 방을 보고 나서 다시 기차역까지 갔더니,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의 기차가 불과 30여초 전에 출발을 한 것이었다. 두 정거장 가서 거기서 다시 버스를 타고 하숙집까지 가야 했는데, 그때 시간이 대략 8시가 가까워오는 시간이었다.


멜번에서 2년 넘게 지내보니 이곳은 4시30분 ~ 5시30분경이 가장 붐비는 퇴근시간이다. 저녁 7시만 되면 퇴근길은 뻥뻥 뚫려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의 생활 패턴이 이렇다보니, 저녁 8시가 가까워지면 사람이 많이 사는 지역이라 하더라도 기차는 30분에 한대 정도 지나갈 뿐이다.


다행히 해가 긴 여름이었고, 호주는 써머타임을 하기 때문에 8시라 하더라도 아직 환한 상태였지만, 차가 없어 사람도 없는 텅빈 플랫폼에서 30분동안 다음 기차를 기다리고 있자니 한없이 내 자신이 초라해지는 느낌이었다. 두 정거장을 더 가서 다시 버스를 기다렸다 하숙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9시가 넘어가면서 어둠이 내려앉았다. 버스 창문에 비친 나의 모습이 스스로도 얼마나 쓸쓸하게 느껴지던지...


한달여의 대장정 끝에 박스힐 근처에 있는 3인 가족이 사는 타운하우스에 쉐어방을 얻었다. 그라운드 플로어에 방 하나와 화장실이 있어, 나는 그곳에서 생활하고 그 가족은 윗층에서 생활하는 구조였다. 방안에 냉장고와 전자렌지가 있어 아쉬운데로 윗층에 올라갈 일 없이 생활이 가능했다. 5개월 가량 머물면서 내 자신 스스로가 불편하기도 해서 주인집(?) 주방은 사용해 본 일이 없다. 밥은 전기밥솥으로 해결하고, 반찬이나 국은 오로지 3분 요리로 해결했다. 가끔은 전자렌지로 계란찜을 해먹기도 했다. 


타지 생활을 하다보니, 2주에 한번 애들레이드에 가면 집사람이 해주는 집밥이 얼마나 맛있던지...


주말부부 생활이 길어지면서 없던 증상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애들레이드에서 첫 비행기를 타고 멜번으로 돌아오기 위해 월요일 새벽에 일어나서 집을 나서면 공항에 갈때까지 늘 아랫배가 아픈 것이었다. 가족이 멜번으로 이사오기 전까지, 늘 어김없이 가족과 헤어질 시간이 가까워오면 아랫배에 통증이 느껴졌었다. 



-       이민일기 6 – 아이들 이야기 I


우리는 딸내미 6학년, 아들내미 4학년 때 호주로 이민을 왔다. 아이들이 처음 다닌 학교는 한국인은 우리 아이들이 전부인 한 학년이 한반인 조그마한 학교였다.


당시 아들내미가 전학을 오기전에 4학년에는 남학생이 3명 밖에 없었다. (여학생은 한 열댓명… 복 받은 놈… 부러울 따름이다.)


기존에 이 장난꾸러기 3인방이 노는데 있어 편을 갈라서 몰 하려고 해도 2:1 로 머릿수가 안 맞다보니 많은 애로 사항이 있었던 듯 하다. 하다못해 4:3 정도면 실력있는 놈이 세명인 팀에 들어가면 대충 실력이 엇비슷해질텐데, 2:1 이다 보니 승부를 가르는 게임은 거의 불가능했던 듯 하다. 그런데, 아들내미가 조인하면서 2:2 로 머릿수가 맞춰지니, 이 세명이 아들내미를 격렬히 환영을 해 주었던 모양이다. 아들내미는 그렇게 시도때도 없이 이 세명과 공놀이를 하며 별 어려움없이 빠르게 적응을 한 것 같다.


반면 딸내미는 한국에서 영어학원을 꾸준히 다니다 왔음에도 적응하는데 조금 어려움이 있었던 듯 하다. 여자아이들이 6학년 정도 되면 쉴새 없이 수다를 떠는데다가 기존에 아이들은 프랩부터 7년을 함께 자라오며 어느 정도 그룹이 형성되어 있다보니, 영어도 부족한 딸내미는 어느 그룹에도 속하지 못했던 듯 하다. 카톨릭 학교이고, 한 학년이 한반이다 보니 직접적으로 따돌림을 당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친구가 너무나 그리울 나이에 맘에 맞는 친구를 못 사귀다보니 나름 많이 속상했었던 듯 하다. 친구들과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에 또래 아이들이 좋아하던 저스틴비버와 원디렉션 노래를 미친듯이 외웠다. Nicki Minaj 의 Super Bass 도 완벽하게 외웠으니, 그 당시 딸내미의 노력은 눈물겹기까지 했다.


하루는 아이들 학교옆을 지나가는데, 점심시간이라 아이들이 운동장에 나와 놀고 있었다. 아들내미는 여지없이 그 3명이랑 열심히 볼을 차고 있었는데, 딸내미는 여자 아이들 몇명이 벤치에 앉아있다 일어나서 움직이니까, 그 뒤를 졸졸 따라가면서 어떻게든 대화에 끼어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울컥 했었는데, 그 얘기를 전해들은 집사람은 아이가 겪고 있는 마음고생이 느껴졌는지 그만 눈물을 펑펑 쏟고 말았다.


애들레이드는 Primary가 7학년까지이다. 그렇게 1년반을 보내고, 딸내미가 High School 에 진학하면서는 학교 생활을 너무 즐거워하기 시작했다. 각 Primary로부터 온  아이들이 헤쳐 모이면서 새롭게 친구 그룹이 형성되고, 지난 1년반의 고생을 통해 의사소통도 자유롭게 되다보니 단짝 친구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호주 토박이 친구들 집으로도 두어차례 슬립오버를 다녀오기도 했다.


그렇게 이제야 겨우 학교 생활을 즐거워하기 시작했는데, 8학년을 겨우 반년 다니고, 애들레이드에서 멜번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멜번은 애들레이드와 달리 7학년부터 High School 이다 보니, 아들내미는 어차피 6개월 후 하이스쿨에 진학할 거라 상관이 없었지만, 딸내미는 멜번 아이들은 이미 1년 반을 함께 지내며 그룹이 형성되어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또 다시 Primary 때의 어려움을 겪게 될 것 같다며 무척이나 걱정스러워 했다. 안 그래도 사춘기도 막 시작했는데...


멜번과 애들레이드를 오가며 10개월을 주말부부를 하면서 가능하면 애들레이드로 복귀하고자 했으나, 여전히 애들레이드의 취업장벽은 높기만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우리 가족은 멜번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민 일기 7. – 아이들 이야기 II


멜번 이주 후 1년쯤 지나면서, 딸내미의 사춘기 시작과 함께 우리집은 그야말로 매일 매일이 전쟁터나 다름 없었다. 아들내미가 사춘기를 지날때는 집사람이나 나나 딸내미를 통해 한번 겪어봤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면서 평온한 시간들을 보냈지만, 딸내미 때는 아이도 그런 변화가 처음이고, 우리도 부모로서 처음 겪는 일이다보니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무지했음에 매일같이 폭탄이 터지곤 했다.


그때 느낀 심정은 정말 사춘기 아이는 정신세계가 안드로메다를 향해 가고 있구나 였다. 그 당시 딸내미는 자기만의 고민만으로도 차고 넘쳤을텐데, 장난꾸러기 2살 터울 남동생은 그런 누나에게 매일같이 시비를 붙었으니, 세상에 원수도 그런 원수가 없다 싶을 정도였다.


안 그런 집들도 있겠지만, 주변분들 중 그래도 점잖다고 생각했던 분들인데도 얘기를 나누다보면 사춘기 자녀들과 한번씩 전쟁을 치르면서, 다들 핸드폰 하나씩 부셔본 경험들이 있으셨다.


집사람과 나는 아이가 겪는 사춘기 또한, 다른 아이들처럼 큰 문제없이 성장통을 겪고 있는 좋은 시그널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사춘기를 겪어나가며 딸내미는 학교에 둘이 좋아 죽고 못사는 절친이 생겼고, 나름 안정적으로 학교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멜번으로 이주한지 2년쯤 되어가는 시점에 내가 직장을 시드니로 옮기게 되면서 또 한번 심한 갈등을 겪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새 아이는 부모가 생각했던 것보다 속은 훌쩍 커 있었다.


2차 면접을 보고 나서, 이제 채용절차를 진행한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 아이들에게 주말과 대체휴가를 이용해서 시드니에 다녀오자고 하였다가 집사람과 딸내미가 말다툼을 하고 나서, 내가 딸내미에게 카카오톡으로 말을 걸었더니 돌아왔던 답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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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 해야 되지, 시드니를 안 가고 싶다가 아니라 아빠가 무슨 말 하는지는 이해가 돼요. 근데 나는 이번 주에 시드니를 가기 싫다는 이유가, 이렇게 확정이 난 걸 안 게 오늘인데 난 내 나름대로 그 적응 할 시간을 달라는 거에요. 아예 시드니로 이사 가기 싫다고 고집 부리지는 않을게요. 지금 당장 시드니를 간다는 게 급작스럽다 해야 되나, 그래서 그게 싫어요. 학교 알아 보고 집도 알아 봐야 된다는 건 알겠는데 조금 있다 하면 안 돼요? 아까 안 가겠다고만 성질내고 소리 지른 건 그냥 그 상황이 싫었기도 하고 지금 돌아보면 내 생각만 한 거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안 드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아예 간다고 확정 난 게 아니니까 지금 당장 아빠가 시드니를 가야 하는 게 아니면, 그냥 조금만 시간을 두고 아 우리가 시드니로 이사를 갈 수 있구나 하고 좀 적응 할 수 있는 기간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빠랑 엄마도 그냥 무조건 돈 때문이 아니라 여러 가지 생각해 보고 내가 할 고민 다 해봤던 거 내가 더 잘 아니까 굳이 나 설득 안 해도 돼요. 충분히 다 알아들었고, 아까는 경솔하게 했던 거 같아서 후회하기도 하는데. 그 때는 그냥 좀 되게 속상했어요. 적응하면 가고, 또 적응했는데 옮겨야 되니까. 물론 시드니를 저나 동생이 더 좋아할 거라는 가능성을 배제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지금으로서는 전 멜번이 좋았거든요. 과목 선택도 그렇고. 아까 알아보니까 시드니는 제가 영어나 한국어 둘 다 제 2 외국어로 시험을 칠 수 있는 게 아닌 거로 봐서 그 걱정도 많이 들었어요, 여기서는 둘 다 2번 째 언어로 볼 수 있는데. 그래도 시드니 나름대로의 장점이 또 있을 거니까 싫다고 주장하지만은 않을게요. 어쨌거나, 아빠 말대로 시드니를 갈지 안 갈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놀러 가자는 마인드로 가던 사전조사를 하러 가자는 마인드던 전 너무 이르다고 봐서 이렇게 빨리 가고 싶지 않아요. 지금 당장 응원이나 잘 되라고 부추기진 못 해도 아까처럼 미숙한 짓은 안 할게요. 시드니에서 적응하는 게 설마 호주 처음 왔을 때보다 힘들겠어요, 뭐 다 잘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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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로 이주할 때가 되어 아이들 학교 main office 에 exit form 을 받으러 가다가 수업 전 사물함 앞에 삼삼오오 모여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다시 한번 가슴이 먹먹해 지는 것을 느꼈다. 시드니로 전학하여 저 아이들처럼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할 수 있게 되기까지 아이들이 또 다시 겪어야 할 시간에 대한 미안함이 밀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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