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동거인)은 한문 하는 사람이다. 대화하다가 한자어가 나오면 갑자기 맥락을 끊고 “그 단어는 000이라는 뜻의 한자이지”라고 하거나, 내가 “밖에서 친구 00를 만나고 왔어”라고 하면 “혹시 그 친구 이름 한자가 이거래? 다음에 만나면 맞는지 물어봐”하며 내 지인들의 이름의 뜻만(^^..) 궁금해한다.
2015년에 긴 여행 중 베트남에서 현을 처음 만났을 때, "한국에 가면 뭐하고 살거냐"고 묻는 내 질문에 현은 배시시 웃으며 본인은 한자를 너무 좋아해서 중학교 때부터 수학 시간에도 과학시간에도 한자만 쓰고 한자 대회에만 나가고 대학 전공도 한문학과 나와서 방학마다 서당에 가서 살았다고 했다. 언젠가는 고전번역가가 되어서 아직 1%도 채 번역이 안된 옛날 문서들을 번역하고 싶다고. 그리고는 자기 집이 딸기랑 사과를 해서 겨울이면 수확한 딸기를 냉동고에 얼려두고 1년 내내 딸기쉐이크를 해 먹는데 그게 너무 맛있다며, 평생 한문 하며 딸기쉐이크 먹으며 살면 행복할 것 같다고 했다. 그때 나는 여행하면서도 종종 ‘나에게 준 긴 방학 같은 여행이 끝나면 메마른 일상으로 돌아가겠지..‘라고 생각했을 때라, 한문과 딸기쉐이크만 있다면 미래의 자신도 행복할 거라 확신하는 현이 신기했다.
현은 당시 여행 10개월째였는데, 오랜 여행에 ‘한문 하는 감각이 그립다’며 숙소에서 어플로 한자로 된 논어를 읽곤 했다. 펜이 잡고 싶어 근질근질해하던 현은 결국 2년을 계획하고 나왔던 세계여행을 중단하고 한국으로 돌아가 계룡산 인근 서당에 3년을 더 살았다. 그리고는 부산에서 내려가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한자를 가르치는 일을 몇 년간 했다.
지금의 현은 한문 관련한 일에 종사하지 않는다. 7년을 만나는 동안 내가 본 현의 관심사는 딱 두 개, 한문과 자전거인데(나와는 넘나 다른 사람..), 기존엔 한문으로 돈을 벌며 자전거를 탔다면 이제는 자전거로 돈을 벌며 한문을 한다. 한문 관련한 일을 그만둘 때 현의 주변에서는 아쉬워했지만 현은 아쉬워하지 않았다. 이걸로 돈을 벌지 않을 뿐 한문을 여전히 좋아하니까. 한자를 다루는 시간 자체를 좋아하는 현은 집에서 구몬 한자를 쓰고(아주 성실히 하지는 않는 것 같지만^.^) 책도 맨날 비슷한 문체의 것만 산다. 그리고 일로는 자전거를 만지고 고치고 팔고 고객들과 함께 타며 자기는 덕업 일치를 이루었다며 행복해한다.
요즘은 현에게 한문 같은 게 나에게는 뭘까하고 종종 생각한다. 오랫동안 좋아했고 평생 이 좋아하는 마음을 지니고 살고 싶은 것. 그것이 페이잡이 되어도 좋지만 아니게 되더라도 그냥 그 마음이 지속되는 것만으로도 좋은 것. 예전엔 ‘나에겐 그런 것이 없는 것 같다’는 박탈감이 들기도 했는데 요즈음은 비슷한 몇 가지가 생긴 것도 같다.
오늘 아침엔 현의 집에서 받은 사과를 먹으며, 현이 쓴 우리의 7주년 기념 편지를 읽었다. 그중 한 장은 현이 지은 한시였다. 문학은 현대문학만 좋아하는 나라서 현의 한시 감성 나에겐 어렵지만.. 한 자 한 자 공들여 7언 율시를 쓰며 성취감에 충만해하는 현을 보는 게 좋았다. 한자 쓰는 현 옆에서 사과나 딸기를 받아먹는 일도 좋다.
종종 이렇게 또 한시를 써주셔. 담에도 7언 율시로 부탁합니다.
202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