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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hye Apr 03. 2020

장래희망이 뭐가 그렇게 별거야

앞으로 이뤄나가고 싶은 나의 희망 활동들에 대해

공부엔 재능도 흥미도 없던 청소년 때, 내가 유일하게 잘해보고 싶던 것은 노래였다. 어떤 감정이 몽게몽게 피어오르는데 그걸 표현할 말을 잘 모르던 내게 이미 있는 가사들은 최고의 표현 수단이었다. 남이 쓴 생각을 내 목소리로 부를 뿐인데 그 감정과 생각의 30%는 소유한 기분이 됐다. 내가 할 줄 아는 것 중에 그나마 가장 잘하는 활동이라는 점도 좋았다. 어디에도 먼저 나서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수련회 장기자랑에는 꼬박꼬박 나갔고 학교가 끝나면 매일 친구들과 칠팔백 원씩을 모아 노래방에 갔다.



노래하는 건 정말 좋아했지만 내가 가수가 되고 싶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사실 알 수 없다기 보단 가수가 꿈이라고 하면 들을 비아냥과 막막함이 무서웠다. 그때 우리가 아는 가수들은 원더걸스와 소녀시대, 동방신기처럼 뛰어난 외모에 노래와 춤도 잘 추는, 어렸을 때부터 잘 가다듬어진 아이돌이거나 거미처럼 노래를 엄청 잘하는 사람들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노래도 애매하게 잘하고 어디 연습생으로 들어가기 늦었으며 형편도 안 되는 나에게 가수는 장래희망용 단어로 부적합했다.



자기 장래희망을 그리는 어느 미술시간에, 나는 고민 끝에 뮤지컬 배우를 그렸다. 뮤지컬을 한 번도 본 적 없었지만 노래와 춤으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니 생각만 해도 멋졌다. 뮤지컬 배우는 아이돌처럼 아주 어릴 때부터 준비 안 할 테니 나에게도 준비할 시간이 있을 것 같았다. 그림을 본 미술 선생님은 물었다.



그래서 어느 대학교 어느 과에 갈 건데?


어….



대학에 아직 관심 없는 중학생인 내가 아는 대학교는 연세대, 서울대, 고려대 밖에 없었으며 전공 같은 것도 알리가 없었다. 나는 신촌 근처에 살고 있었므로 답했다.



(새하얘진 머릿속을 가다듬으며)… 연세대학교 뮤지컬학과?



미술 선생님의 표정이 웃음으로 일그러졌다.



연대에 뮤지컬 학과가 있어?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무슨 장래희망이라는 거야.



나는 뭣도 모르는 주제에 가히 꿈으로 말했다고 반성했고 자주 그 장면을 떠올리며 이불을 찼다. 무대에서 춤을 추며 노래하는 내가 있던 그 그림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버렸다.






어느 날엔 내가 노래를 하고 싶어 한다는  엄마가 알아버렸다. 다니던 청소년수련관에서 노래를 부르는 수업에 참여했는데, 얘가 적극적으로 잘하고 재능도 있다고 담당 선생님이 귀띔한 것이다. 노래는 교회에서 성가대, 찬양팀을 하고 있는 엄마의 오랜 꿈이기도 했다. 엄마는 조금만 손보면 자신의 꿈을 대신 이뤄줄 수도 있을  같은 열댓 살의 딸에게 말했다.



예술을 하며 무시를 안 받으려면 우선은 클래식(성악)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



수련관 선생님도 자신의 귀띔이 엄마에게 ‘큰 딸 예고 보내기’라는 플랜을 심어줄 줄은 몰랐겠지. 하지만 엄마의 플랜 대비 우리 집엔 예고에 갈 돈은커녕 예고를 준비할 돈도 없었고 나는 성악의 ㅅ자도 몰랐다.



얼마 후 엄마는 유명 성악가의 남편이 목사인 개척교회에 나를 데려갔다. 20여 명의 사람들과 예배를 드린 후 둥그렇게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에 엄마는 “큰 딸이 노래에 달란트가 있는데 어떻게 지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어떻게 아이의 꿈을 이루게 할지가 기도제목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목사님과 목사 사모님 그리고 기타 등등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모아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유명 성악가의 반주에 맞춰 오솔레미오를 부르는 기회가 내게 주어지고 말았다.



자신도 몰랐던 빛나는 재능을 가진 아이를 안목이 있는 성악가가 발견하고 길러내는 이야기로 이어졌으면 좋겠지만, 나는 그 날 모두의 얼굴에서 미술 선생님의 표정을 봤다. 2000분 같았던 싸늘한 2-3분을 보내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교회를 나갔다. 지하철에서 나에겐 재능도 끈기도 돈도 없다고 나는 노래를 하고 싶지 않다고 엉엉 울었다. 그렇게, 장래희망을 이야기할 때 노래는 절대 끼어들 틈을 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스무 살이 넘고, 재수 후 대학에 들어가고 전공을 가지고 나니 노래를 취미로 대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알바비로 우쿨렐레를 샀다. 노트에 좋아하는 곡들의 가사를 적고 뜨문 뜨문 코드를 잡아 불렀다. 내가 좋아하는 곡들이 너무 좋아서 주변에게 소개하고 싶단 생각으로 SNS에 업로드도 했다(물론 내가 부른 노래를 올리고 싶다는 욕망도 있었다). 올리는 순간에는 늘 미술 선생님의 얼굴을 한 냉소적인 내가 잠깐씩 나온다. 그 냉소적인 나는 노래를 진지하게 해 보라는 말을 들으면 손사래를 치지만, 그 이면의 나는 빈 말일 수 있는 그 말들을 오래오래 쓰다듬는다.



빈 말도 오래 쓰다듬는 나는 혼자 떠난 여행에서도 만난 사람들에게 종종 노래를 불러주었다. 여행지에서 만난 친구가 준 악기를 연주하며 새로운 노래들을 익혔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 업무 협력 파트너들과 떠난 리트릿에서도, 어느 송년회에서도 불렀다. 여행지와 리트릿 공간에서의 좋은 기억과 맞물려 자기들의 모임, 행사, 결혼식에 노래를 해보겠냐고 초대해주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리고 재작년 즈음부터, 노래를 부르는 일이 어느 때는 귤 한 박스가 되고 20만 원짜리 상품권이 되고 옛 동료가 외국에서 하는 결혼식의 항공권이 되었다. 어느 날부터 나는 우스갯소리로 남들에게 “내가 노래로 연봉 20-30만 원은 벌지!”라는 말을 하고 있다.



여전히 나는 노래하는 게 좋고, 남들 앞에서 하게 될 기회가 있을 때 쑥스러운 신남을 느낀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가수를 장래희망이라고 말할 수 없다. 스물여덟에 가수를 준비하기에는 하면 안 되는 이유가 너무 많고 그 정도로 노래를 잘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작은 무대에도 발발 떨고 업로드 한 번하면 10초에 한 번씩 조회수를 체크하는 쫄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쭉 투박한 목소리로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고 싶다. 요즘의 나는 아주 깨작깨작 몇 곡의 노래를 써보기도 한다. 무쪼록 어느 시기에는 연봉 50만원이나 100만원도 벌어봤으면 좋겠다. 돈도 돈이지만 내 목소리로 누군가들이 잠깐이라도 기분 좋아하는 경험을 죽을 때 까지 종종 해봤으면 좋겠다. 서툴지만 꾸준히 노래를 만들고 몇번의 무대가 더 주어지지는 삶을 욕망하며 나는 내가 될 작은 가수를 응원한다.




https://www.instagram.com/p/BV624ykhLAv/?igshid=hg9j2jft2gs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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