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어느 하루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갈릭 May 16. 2023

소아병동의 밤

언제, 무슨 이유로 오든 병원은 익숙해지기 어려운 공간이다. 그닥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크기 때문에. 소아병동이라면, 그곳의 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곳만큼은 절대 익숙해지고 싶지 않다.


온전히 열 달을 품어주지 못했던 아이가 아픈 일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태어나자마다 신생아중환자실로 옮겨갔던 일까지 헤아리면 벌써 다섯 번째 입원. 오랜만에 하는 입원이고, 애초에 검사 목적이라지만 그럼에도 마음은 온통 쌉싸름한 맛이다. 절대 익숙해지고 싶지 않다.


왼쪽에선 돌쟁이가, 오른쪽에선 백일내기가 저마다의 이유로 울어대는 한복판에서 테드 창의 <네 인생의 이야기>를 다 읽었다. "내가 분수나 샘이라도 된 듯한 기분으로 만들어주는 소리"로 웃는 아이는 내 옆에서 간만에 독차지한 태블릿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더랬다. 헵타포드의 언어를 이해는커녕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나였지만, 어쩐지 이 이야기는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시저드레싱이 끼얹어진 채 흐느끼는 너를 안고 응급실에서 몇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던 주인공은, "처음부터 나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알고 있었고, 그것에 상응하는 경로를 골랐"던 그녀는 결국 "환희의 극치"에 다다랐을까. 아니면 "고통의 극치"에 이르렀을까.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세월의 책>은 틀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책의 시나리오는 어떤 사람이 가능한 미래가 아닌 실제의 미래에 관한 지식을 제공받는다는 전제에 입각해 있다. 이것이 고대 그리스 비극이었다면 운명을 회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반 사정에 의해 결국 그 운명에 따라 행동한다는 식으로 얘기가 흘러갈 것이다. 어차피 그리스 신화의 예언은 모호하기로 악명이 높다. 이에 비해 <세월의 책>은 극히 명확하고, 책에 명시된 식으로 그녀가 경주마에 돈을 걸도록 강요할 방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모순이 생겨난다. <세월의 책>은 절대 옳아야 한다. 그러나 이 책이 뭐라든지 그녀는 그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이 두 가지 사실을 양립시킬 수 있을까?
양립할 수 없다, 가 통상적인 대답이다.... 자유의지의 존재는 우리가 미래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는 직접적인 경험에 의해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의지란 의식의 본질적인 일부인 것이다.
아니. 정말로 그런 것일까? 미래를 아는 경험이 사람을 바꿔놓는다면? 이런 경험이 일종의 절박감을, 자기 자신이 하게 될 행동을 정확하게 수행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불러일으킨다면?

- 테드 창, <네 인생의 이야기> 중에서


분명한 건 고통이 극치에 달했던 이유는 앞서 펼쳐졌던 환희가 극치에 달했기 때문이리라. 그러니 설령 <세월의 책>을 읽은 부모가 존재해도, 그는 자유의지로 이 서늘하고 쓸쓸하고 불안이 잠식하는 소아병동의 방을, 좁고 어두운 침대를 감내하고 있으리라.

 

세상은 점점 아이를 환대하지 않는 거대한 '노키즈존'이 되고 있다지만, 이곳만큼은 정녕 '노키즈존'이 됐음 좋겠다. 형언할 수 없는 우리의 비합리적 선택이 빚어낸 기적들이 그저 영롱하게 반짝이길 바라는 밤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멋대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