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느리게 걷자고 하는 건가 봐.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도록 말이야
나는 여행을 참 좋아해. 물론 싫어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냐마는 나름 혼자 하는 여행도 즐겨 다닐 만큼 자칭 타칭 프로 여행러지.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더라. 내 여행에서 가장 부족한 점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 여행에는 ‘여유’가 없더라고, 그래서 한번 ‘여유’를 찾아보기로 했지.
한 2년 전쯤인가? 언니와 북유럽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었어. 언니랑 나는 호기롭게 이번 여행 테마를 ‘여유’로 정하고, 하루에 한 번씩은 잔디밭에서 휴식을 즐기며 다이어리를 쓰자고 했지. 그래서 매일 아침 돗자리와 다이어리를 꾸역꾸역 가방에 챙기고 숙소를 나섰는데.. 결과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그 흔한 카페에서조차 채 1시간도 앉아서 쉬지 못하고 매번 다음 행선지로 향했던 것 같아. 뭐가 그리 급했는지 말이야.
최근에는 퇴사를 하고 11월에 제주 한 달 살기를 하고 왔어. 역시나 한 달이라는 긴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 한 달 살기의 테마도 ‘여유’ 였지. 그런데 이 여유를 챙길 틈도 없이 나는 ‘1일 1개 오름 오르기’ 퀘스트를 깨고 있더라? 아침 일찍 일어나 오름을 오르고는 또 쉴 새 없이 돌아다니다가 녹초가 되어 숙소에 돌아오기를 반복했지. 그렇게 30일을 채우니까 서울로 돌아갈 날이더라. 이번 여행에서도 나는 그토록 원했던 ‘여유’를 찾지 못했던 거야.
그런데 신기한 게 뭔지 알아? 여유도 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즐긴 여행에서 결국 지금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그 속에서 나도 모르게 즐겼던 ‘여유의 순간들’이더라고. 그때 당시에는 별거가 아닌, 그냥 지나치기 쉬운 그런 것들 말이야. 여행 중에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결국 내 기억 속에는 내가 끊임없이 움직이며 만들어 내려 했던 대단한 순간들보다 그런 소소한 순간들이 오래도록 남게 된 거지.
여유는 찾거나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
자연스럽게 깨닫고 느끼는 거였나 봐.
일상도 비슷한 것 같아.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우리는 항상 여유 있는 삶을 꿈꾸잖아. 여러 의미에서의 ‘여유’ 말이야. 그런데 ‘여유’는 결국 내가 찾으려 하고, 억지로 만들어내려 한다고 생겨나는 게 아닌 것 같더라고. 주어진 일상에서 한 템포 느리게 가는 순간, 잠깐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바라보는 순간, 그런 순간들이 모여 나만의 여유가 되는 건 아닐까?
그래서 느리게 걷자고 하는 건가 봐. 이 순간에도 내 곁에 있는 수많은 여유의 순간들을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도록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