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곤 쉴레의 <포옹>
표현주의 화가 에곤 쉴레의 작품은 화폭에서 요동친다. 차분히 살피면 촉감이 느껴지는 터질듯한 감각말이다. 나체의 남녀가 얼싸안고 있는 모습을 그려낸, 1917년작 유화 <포옹>이 대표적이다. 작품 속 두 사람은 마구 구겨진 흰 시트 위에서 격정적인 포옹 속에 엉켜있다. 여자의 길고 구불구불한 머리칼은 배게 너머로 흩어져 있고, 그 품에 얼굴을 파묻은 남자와 서로 얼굴이 겹쳐질 듯이 팽팽히 힘이 솟구친다. 인물의 포즈에서 언뜻 그의 스승인 클림트의 <키스>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질감은 오히려 반대 편에 있다. 클림트와 쉴레의 작품에 얽힌 당대의 사회맥락적 유사성은 선정성에 대한 비판, 지금도 미약하지만 누군가에겐 유효할 만큼 신체를 노골적이고 강렬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선정적 에로티즘의 논쟁을 제쳐두더라도, 분명한 것은 에곤 쉴레의 화폭에는 불협화음으로 가득 찬 불완전 마디가 계속해서 변주되는 리듬이 흐른다는 것이다. 에곤 쉴레 역시 붓을 쥔 순간 불안으로 엉켜 울리는 리듬을 느끼고 있었을 거라 확신하게 하는 극한의 진동이다. 바로 이 지점, 작품 속에서 공명하는 리듬 때문에 그의 그림을 단순히 포르노그라피적인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에곤 쉴레의 다른 작품도 그러하듯 <포옹> 역시 팽팽한 내적 긴장을 표현한다. 너무 구겨져 뾰족하게 날 서있는 듯, 한편으로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하는 하얀 시트와 그 위 두 사람의 비틀어진 비정형의 신체, 숨 막힐 듯 밀도 높은 둘의 포즈가 그것이다. 하지만 강렬한 붓터치와 거대한 규모로 압도하여 제한된 시야로 포착해 내기 어려운 잭슨 폴록의 긴장과 다르다. 그렇다고 몬드리안의 작품처럼 선과 색이 이루는 낙차가 곱씹기에 짧을 만큼 진동의 폭이 좁고 일시적이지도 않다. 에곤 쉴레가 만들어내는 긴장은 특유의 비틀리고 구겨진 선과 미묘하게 불완전한 채색이 작품 전반에서 부드러운 일체감을 이루는 동시에 폭발력을 가진다. 다시 말해, 표현방식에 있어 쉴레의 개성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지만, 표현주의의 굵직한 맥락에 있는 여러 작가의 작품들과 비교할 때, 성실한 재현과는 거리를 두고 비가시적 정서를 표출하여 표현주의 스펙트럼 속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중도에 가까이 있는 아이러니 또한 흥미롭다. 즉, 사전적 의미에서 표현주의의 정점도 근저도 아닌 곳에 발 딛고 서서, 표현주의적 폭발력을 가장 탁월하게 응축해 낸 작가가 아닐까.
욕망을 그리는 화가라고 불리는 에곤 쉴레에게 폭력적인 ‘감각의 화가’라는 별칭을 붙여주고 싶다. <포옹>을 보고 있으면 목덜미가 빈틈없이 감싸지는 뜨거운 밀도가, 머리칼과 살갗 너머의 모든 것이 불안정하게 뒤틀리고 구겨진 혼돈의 파동이 전해진다. 작품은 더 이상 시선이 머무르는 대상으로서 존재하지 않으며, 관음증적 시선을 비웃듯 적극적으로 자신을 일으켜 세운다. 이제 내가 작품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내 몸 전체를 촘촘한 사슬로 옭아맨다. 진동하는 긴장과 응축된 폭발력은 시선의 주체를 전복하여 감각에 미학적 변용을 가하고, 불완전과 불균형을 온전히 감싸 안은 채 생동하는 리듬은 감각에 가해진 신비로운 폭력을 소화시킨다. 이렇게 나는 나의 신체, 나의 감각이 한순간 소멸하고 다시금 생성되는 것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