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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ronica Jun 07. 2020

나의 이직 수난기

Lesson Learned

  지금 회사로 이직한 지 6월로 딱 2년이 되었다. 물론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비슷해서 스트레스받고, 짜증 날 때도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만족스러운 회사 생활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소비자 관여도가 매우 높아, 마케터 입장에선 뭘 해도 일단 반응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게 가장 좋고, 외국계 회사임에도 불구하고 지사의 자율성이 높아, 머릿속으로 상상한 것들을 대부분 실현시킬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이다. 어쨌든 회사에 조인하게 된 지 2년이 지난 지금, 이 회사로 이직을 준비하며 괴로웠던 그 기간을 기록으로 남겨보려 한다.


  지난 회사는 첫 회사였고, 기자 준비로 제대로 된 기업 취업 준비를 못했던 나를 알아봐 주고, 또 기회를 준 곳이라 애정이 상당히 높았다. 그래서 이직이라는 걸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사람은 자꾸 크는데 회사는 그대로인 것 같은 불안감에 사로잡혀 1년을 보내다, 결국 새로운 도약을 결심하게 됐다. 퇴사를 하고 이직 준비를 해야 하나 고민을 하던 차에, 회사를 다니면서 다른 회사 인적성 시험을 보고 온 친한 동기가 월급, 사회적 지위 등 어쨌든 이전 회사가 보장해주던 것을 포기하고 믿는 구석 없이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게 되면, 오히려 불안감 때문에 나쁜 선택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조언을 해줬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이직을 하게 되는지 잘 모르지만, 나의 경우 매우 절박했다. 내가 원치 않는 환경에서 버티는 데 아주 취약하기도 하고, 뭔가 떠나기로, 혹은 바꾸기로 결심을 하면 즉각적으로 행동에 옮겨야 하는 성미이기도 해서였다. 막상 회사를 옮기고 보니, 타이밍이 잘 맞아떨어져서 별 기대 없이 이직해 온 선배도 있었고, 헤드헌터로부터 먼저 제안을 받아 이직한 선배도 있었다. 내가 ‘선배’들의 이직 사례만 이야기하는 이유는 내가 이직을 하기엔 아직 어린 연차였기 때문이다. 아직은 많이 경직된 한국 사회에서는 대기업 간 이직 연차도 정형화돼 있는 듯하다. 나는 5년 차에 준비를 시작해서 6년 차로 이직했는데, 헤드헌터도, 회사도 뽑으려 했던 연차는 아니었는데 결과가 잘 나왔다고 이야기를 해줬다. 쉬이 이직해 온 선배들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들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 같다.


당시 사진을 찾아보니, 이직 결심 이후 너무 불안해서 주말이면 집착하듯이 진짜 많이 놀러 다녔다.


1. 타깃 회사를 정한다.


  어렸을 때부터 예전 회사에 다닐 때까지 막연히 글로벌한 환경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외국계 대기업으로 목표를 정했다. 내 경력을 고려해, F&B(Food & Beverage) 산업 안에서 어려서부터 좋아했던 브랜드를 몇 가지 골랐고, 몇 개의 채용 사이트를 즐겨찾기에 등록해두고 입사 공고를 확인했다. 경력 이직은 신입 공채와 달리, 회사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기 때문에 채용 공고가 일정치 않고, 면접까지 진행하고서도 채용을 취소하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때문에 공고를 확인하고 흔치 않은 기회를 잘 잡는 게 중요했고, 이직하게 된 회사도 채용 사이트에서 알게 된 헤드헌터의 소개로 옮길 수 있었다.


  타깃 회사를 정할 때, ‘절대 타협할 수 없는 기준’을 함께 정하는 게 중요하다. 나의 경우는 산업군은 옮기더라도 (사실은 마진율이 너무 낮아 인력을 짜낼 수밖에 없는 F&B 업계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러나 그건 다음 기회에…) 마케터라는 직무는 포기할 수 없었고, 다니고 있던 회사보다 더 크고 레벨이 높은 회사로 옮겨야 한다는 기준이 있었다. 다만, 같은 연차에 비해 연봉이 많다는 걸 인정했고, 연봉은 10~15% 정도 낮출 수 있다고 생각했다.


2. 스스로에게 쉴 틈을 주지 않는다.


  목표가 생기고 나니, 오히려 이유 없이 불안해졌다. 당장 떠나고 싶은데, 뭘 해야 갈 수 있는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입 공채는 토익 점수, 자격증, 자기소개서 등 해야 하는 일들이 명확하니, 그거라도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데, 경력 이직은 공고가 뜨는지조차 알 수 없고, 뭘 준비해야 하는지도 막막하다. 낮에는 회사에서 일을 한다 해도, 퇴근하면 18시쯤이니, 적어도 잠들 때까지 5시간 이상은 혼자서 보내야 했다. 저녁이 있는 삶은 여유로울 수 있지만, 불안과 강박 속에서 나야 하는 저녁은 때때로 정신을 좀먹는다.


  회사에서 괴로워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퇴근해서는 불안해하며 한탄하기를 며칠,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며 몇 가지 루틴을 만들었다. 당시에 커브스를 다니고 있을 때라, 퇴근하는 길엔 무슨 일이 있어도 바로 운동하러 가고, 퇴근길엔 저녁으로 뭘 해먹을지 고민해 둔다. 운동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저녁을 위한 신선한 식재료를 사서, 집에 오면 요리를 한다. 우선은 이 두 가지 원칙만 세워도 우울하거나 불안할 틈이 없다. 운동하러 가서는 근육에 정신을 쏟느라 잡념이 끼어들 새가 없고, 집에 돌아와서는 간단한 요리와 신선한 재료로 힐링할 수 있다.


  퇴근 후 루틴에 요리를 넣은 이유는 무기력과 정크 푸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나는 정신이 건강하지 못하면 햄버거나 떡볶이처럼 자극적인 음식만 생각이 나고, 그런 자극적인 음식을 먹고 나면 다시 무기력에 빠지곤 했다. 신기하게도 퇴근 후에 연어 샐러드, 소고기 야채 볶음 등 건강한 요리를 먹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고 스트레스도 곧 잊게 된다. 나약해지기 쉬운 환경에서는 쓸데없는 생각이 머리를 채우지 않도록 몸을 움직여 쉴 틈을 주지 않는 게 정말 중요한 것 같다.


마음이 불안하니, 틈 나면 갔던 명동 성당. 사진을 보는데 그때의 그 답답한 감정이 느껴진다.


3. 브랜드 전략을 미리 세워 본다.


  퇴근 후 루틴을 정했지만, 사실 저 습관들은 정신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함이었지, 이직과 직접적인 연관 관계가 있는 건 아니었다. 저런 루틴을 다 지키고도 시간이 남아서 이직을 위해 뭘 하면 좋을지 고민하다가, 가장 가고 싶었던 회사의 전략서를 미리 써보기로 결심한다. 회사에서 경력직을 뽑는 이유는 어쨌든 당장 실무에 투입할 사람이 필요해서고, 서류 전형에서든, 면접에서든 당장이라도 실무를 ‘잘’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평소에도 호불호가 강한 편이라 좋아하는 브랜드를 리스트업 해 두고 그 브랜드가 소셜 계정을 잘 운영하는 곳이면, 틈만 나면 들여다보는 걸 좋아하는데, 그렇게 기억 속에 산재돼 있던 정보를 끌어다가 문제점을 찾고, 정리한 인사이트를 보고서로 만들었다. 인사이트는 당연히 상대 회사가 갖고 있는 약점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내가 고객으로 느껴보니 너희가 다 잘하는 건 아니고, 이런 부분이 부족한데, 나를 뽑으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나는 회사 밖에서도 이런 고민을 해왔으니 조인하고 나서는 더 잘할 수 있다는 확고한 인식을 심어주는 거다. (물론 상대 회사가 기분 나쁘지 않을 만큼 겸손하고 공손한 표현이 필요하다.) 신입 공채는 아무래도 전문성이 떨어지고, 업무 지식이 많지 않으니 오히려 위험할 수 있지만,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는 경력직 지원자라면 한 번쯤 해볼 법한 도전이다.


  시간이 남고, 불안감을 없애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는데, 머릿속에 지원할 회사의 마케팅이 지닌 약점, 앞으로 나아갈 방향 등이 정리되고 나니, 막상 지원 공고가 떴을 때 자기소개서 쓰기도 쉬웠다. 보통 경력 이직은 자기소개서 양식이 따로 없고, 질문도 방대한 편인데, 미리 생각해 둔 게 많으면 자기소개서부터 깊이 있는 답변이 가능하다. 처음엔 자기소개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감이 안 와서 좀 어려웠는데, 이럴 땐 헤드헌터에게 같은 회사의 잘 쓴 자기소개서를 달라고 해서 참고하는 것도 방법이다.


4. 배짱과 자신감으로 면접관 기억에 박힌다.


  다행히 서류가 통과됐고, 면접을 보게 됐다. 팀장진 면접과 대표 면접 두 번을 봤는데, 두 번 다 미리 만들어 둔 전략서를 제본화 해서 가져갔었다. 전략서를 미리 만들어 두면, 면접에서 받는 질문 또한 전략서에 기반해 답변이 가능하기 때문에 모종의 자신감이 생긴다. 게다가 이 회사에서는 인터뷰 직전에 마케팅 전략과 관련된 세 가지 질문을 주고, 간략하게 전략을 정리하라는 과제를 내줬는데, 다행히 전략서를 통해 정리했던 내용이기에 간단하고 심플하게 답을 정리할 수 있었다.


  팀장진 면접의 마지막 차례였던 것 같은데, 다들 지쳐 보이는 표정이라, 세 가지 질문 중 하나만 골라 답변하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면접관(지금은 우리 팀장님)이 고맙다며, 간략하게 부탁한다고 하셨는데, 아무래도 너무 많은 답변을 듣느라 지치셨던 것 같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경력 지원자들은 대부분 여유가 있고, 오히려 이게 독이 될 수 있다. 어느 정도 업무 지식도 갖췄고, 예전 회사에서 쌓은 작은 성공 경험들로 자신감이 쌓인 상태일 테니, 내가 받았던 인터뷰 사전 질문 같은 걸 받으면 물 만난 고기처럼 자기 생각을 늘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내 앞 지원자들은 답변을 이야기하는 데에만 집중하느라, 인터뷰 시간을 너무 많이 써버려서 정작 자기에 대해 이야기할 시간은 적었고, 면접관들은 비슷한 인사이트를 듣느라 지치게 되는 악순환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자리에서 세 가지 질문 중 제일 자신 있는 하나만 골라 답변하겠다고 하니, 팀장님 입장에선 반가운 소리였을 수 있다. 팀장진 면접이 거의 끝나갈 무렵, 내가 미리 써간 전략서를 담백하게 제출하고 나왔는데, 나중에 입사하고 나서 보니, 그런 전략서를 써온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 너무 놀라서 팀원들에게 보여주고 그러셨다고 한다. (다행히 우리 팀장님은 아주 적극적이고 저돌적인 스타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문제는 대표 면접. 지금은 우리 회사 이직 단계에서 대표 면접은 없어졌다고 하는데, 2년 전만 해도 지금은 은퇴하신, 몇십 년 경력의 대표님을 직접 독대해야 했다. 내가 면접장에 들어갔을 때, 대표님은 사실 내 얼굴도 쳐다보지 않았는데, 나중에 들어 보니, 워낙 기준이 명확해서 자기가 생각하기에 자기 회사보다 규모가 작은 회사 출신은 좀처럼 관심을 주지 않는다고 했다. 다행히 인사팀장님께서 앞으로 이 회사에서 하고 싶은 전략에 대해서 질문을 주셨고, 또 한 번 위에서 정리했던 전략서를 기반으로 답변을 술술 풀어 나갔다. 이때부터 대표님이 날 쳐다보시면서 질문을 하기 시작하셨는데, 예전 회사와 관련된 숫자, 내가 진행했던 프로젝트 결과 등 내가 가장 자신 있어하는 업무 경력을 집중적으로 물어보셨다. 연륜 때문인지 내 경력에 대한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질문도 하셨는데, 순간 기분은 나빴지만 당당하게 맞섰고, 아마 다시 돌아간다 해도 나는 배짱 있고 패기 넘치는 본모습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을 것 같다.


  이렇게 한번 이직 과정을 정리하고 보니, 어쨌든 자기한테 맞는 회사를 결국 찾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의 여전히 보수적인 회사들은 나처럼 적극적이고 저돌적인 자세를 대놓고 드러내는 지원자를 선호하지 않을 수 있다. 다행히 나는 우리 회사 철학과 잘 맞는 사람이었고, 가끔 무너질지언정 월요병 없이 즐겁게 회사 생활을 하고 있다. 가장 막연하고 힘들었지만, 한편으론 가장 치열했던 시간이 준 값진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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