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있는 난민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다. 내가 직접 가르치는 것은 아니고, 현지 매니저가 원어민 자원봉사자들을 모집하고 나는 커리큘럼을 개발하여 자원봉사자에게 알려주는 역할이다. 커리큘럼을 개발하는 건 괜찮은데 문제는 원어민 자원봉사자들을 훈련하는 일이다. 영어로 영어프로그램에 대해 알려줘야 하는 상황인데, 한국에서 영어로 말할 기회가 거의 없다 보니 원어민과 소통해야 한다는 사실 앞에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현지 매니저가 추천한 영어프로그램을 하나 수강하게 되었는데, 선생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Make your lifestyle a native lifestyle."
이 말을 듣고 생각해 보았다. 어떻게 내 생활방식을 원어민에 가깝게 만들어볼까. 일단 듣는 것과 보는 것을 영어로 바꾸었다. 한국어 노래 대신 영어 노래로, 한국 드라마 대신 미드나 영드로 읽을거리도 영어로 바꾸었다. 그리고 일기를 영어로 쓰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는데, 딸을 보는 순간 이거다 싶었다. 딸에게 영어로 말을 해야겠다! 말할 기회가 없어서 영어 실력이 녹슬었다고 생각했는데, 말할 기회가 늘 집에 있는 셈이었다.
사실 그동안 딸에게는 영어로 말을 걸 수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영어를 잘 못하는 엄마들처럼 엄마표영어를 해보는 실험을 하면서 내가 영어로 딸에게 말을 걸어주는 건 불공평(?!)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혹자는 왜 하필 본인 딸로 그런 실험을 했냐고 했지만, 실험엔 윤리가 필요하고 남의 애를 데리고 실험을 하는 건 윤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딸이 얼마나 내 말을 알아듣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원서를 읽고 영어 콘텐츠를 보면서 웃고 나에게 설명해 주는 걸 보면 이해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어느 정도 이해하는 건지 확인하는 건 별개의 일이었고 굳이 그렇게 하고 싶진 않았다. 아이의 동기를 해치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 그런데 내 필요에 의해 영어로 말을 하고 아이가 거기에 답을 제대로 한다면, 아이의 영어실력은 조금 더 정확하게 확인이 될 터였다.
아이에게 무턱대로 영어로 말을 했다. 그랬더니 아이의 눈이 동그래지면서 왜 이러냐는 반응이었다. 아이에게, 너도 알다시피 내가 영어 공부를 하고 있지 않냐, 근데 선생님이 영어로 가능한 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너한테 영어로 말하는 거다, 네가 엄마의 영어실력 향상을 위해 조금만 이해해 주면 어떻겠냐...라고 영어로 말했더니 아이가 수긍을 한다. 그리곤 아무렇지도 않게 내가 하는 말들에 반응을 해주었다. 한국어로.
사춘기에 접어든 극 내향성의 딸램은 집에서 영어로 말을 하는 게 당연히 내키지 않을 터였다. 뭐 그래도 상관없다. 내 말을 다 알아듣는데 의의가 있으니까. 아이는 신기하게도 거의 대부분의 내 말을 알아듣곤 맞장구를 쳐주었다. 아이의 말을 들으면서 몇 번을 말했는지 모른다. "야, 진짜 신기하다. 내가 영어로 하는 말을 너는 다 알아듣는구나."
요즘 엄마표 영어를 하는 부모들은 어릴 때부터 아이에게 영어노출을 늘려주겠다며 부모들이 직접 영어문장을 외워 아이에게 의도적으로 말을 한다. 영어가 자유로운 사람들에겐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영어로 말을 하기 위해 적지 않은 품이 들어가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그렇게 힘을 빼다 보면 어느 순간 지치는 날이 오기도 한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꾸준히 책을 읽고 영어 콘텐츠를 보아온 아이들은 영어가 느는데 굳이 그렇게 힘을 빼야 할까. 판단과 선택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경험하고 엄마표 영어를 한 선배들의 경험을 볼 때 나의 대답은 굳이 안 해도 된다는 쪽이다.
아무튼, 아이 덕에 나는 일상에서 영어를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감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