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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랑의 파도 Feb 26. 2020

코로나 19, 긴 재앙의 예상치 못한 첫 단추

절망해서 써보는 글

글을 쓰는 시점은 2월 24일. 확진자가 50명 이내에서 멈추는 듯하더니 지난주에 대구가 처음 뚫린 이래로 하루에 100명씩 늘어났다. 이내 오늘자 확진환자가 833명이 되었다. 이 속도대로라면 이번주 안에 확진자가 1000명을 돌파할 거다. 동남아시아에서 한국으로 향하는 항공편들이 줄줄이 취소되고 출국 금지되었다. 대구 이마트에서 사람들이 라면과 물, 쌀을 절박하게 쓸어담는 모습은 영화에서나 보던 아포칼립스의 그것과 다름없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내가 옮을까 보다는 내가 옮기는 사람이 될까봐. 그 민폐를 끼치기 싫어서 일주일 중 오일을 칩거하며 보내길 3주째. 벌써 다 질려버렸다. 작은 방 안에 갇혀있는 짧은 시간 동안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보다도 그로 인해 드러난 인간 군상들과 현상들이 나를 더욱 두렵고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코로나는 지진처럼 사회의 시급한 과제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더 이상 무엇도 미룰 수 없음을 실감한다.


 혐오의 늪과 책임

“짱깨새끼들 역시 입국을 막았어야”

설 연휴에 우한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사람들이 대거 감염되었으며 사망이 잇따르고 있다는 기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바이러스 자체보다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가 더욱 빠르게 확산되었고, 기존의 중국인이나 중국계 이주민에 대한 혐오에 불이 붙었다. “중국인들은 원래 아무거나 쳐먹”고 “역시 미개한 것들은 위생상태가 엉망”이라 본때를 봐야한다느니 그런 말이 오간다. 중국 정부가 상황을 쉬쉬하느라 초기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국민들을 다수 죽음에 이르게 한 것, 결국은 세계적인 재난으로 커지게 한 것은 매정하게 비판해야하는 잘못이 맞으나 그곳을 사는 사람들은 당연히 죄가 없다. 이 간단한 사실을 어떻게 모르는 걸까.


포털 사이트의 베스트 댓글들은 중국인 입국을 금지하라고 하고, 일본 선박에 탄 사람들은 ‘일제 불매를 하지 않는 매국노’이니 버려두라고 한다. 그들은 아무래도 국적과 정치 성향이 감염의 조건인 줄 착각하나보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들 마음에 안 들면 아프고 죽어도 된다고 생각하나보다. 유럽을 여행 중이던 친구는 백인들이 마스크를 전혀 끼지 않고, 아시아인이 보이면 쫓아내거나 욕을 하며 혐오적인 행세를 한다고 했다. 그들은 아무래도 피부색이 감염의 조건인 줄 착각하나보다. 해외에 나가면 결국 다 ‘미개한 아시안’이 된다는 걸 모르는 걸까? 쓰잘데기 없는 혐오에 대해 이런 지적을 하면 ‘아 짱깨들 때매 우리도 덩달아 이미지 안 좋아져’ 따위의 대답이 돌아온다. 숨이 막힌다.


이제는 신천지 신도나 경북 주민이 국내 확진자의 대부분을 이루고 따라서 국내 환자 감염이 대부분인 상황에서도 미래통합당을 포함한 어느 정치인과 네티즌은 여전히 중국인 탓을 한다. 아직도 중국인 입국 금지가 답이라고 외친다. 신천지도 새로운 혐오의 대상으로 부상하고 있지만, 사실 “하나님의 뜻이다” “공포를 조장하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시험”이라고 하며 주일 예배를, 태극 집회를 강행하는 목사들 또한 신천지와 다를 바가 있나...


혐오는 훌륭한 자기 방어 기제다.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을 미워하고, 선긋고, 그에 따라 자기자신은 보호하기를 좋아한다. 특정인들을 이렇게 악마화하는 동안 개인의 이기심은 정당화된다. 어쩔 수 없이 생업을 위해 출퇴근하는 사람들, 오랫동안 계획해온 일정을 수행해야 하는 사람들을 비난할 수는 없지만, “코로나도 우리를 막지 못한다”며 이 와중에 ‘눈치게임’에 성공해 롯데월드를 가고 집에 있기 심심하다며 약속을 취소하지 않은 사람들을 보면 사람의 이기성이라는 것에 대해 재고하게 된다. 그들은 아마 자신의 팔팔한 청년의 몸을 믿고 있을 것이고 있을 것이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팔팔한 당신들이 아니다. 당신들은 무증상 감염으로 아프지 않을 수도, 혹은 걸리더라도 일주일 정도 독감처럼 푹 앓고 나면 금세 나아 영웅담처럼 기억할 수 있겠지만, 당신이 설사 코로나를 옮긴다면 면역력, 호흡기가 약한 사람들은? 요양원에 계신 노쇠한 우리 할아버지는? 나로 인해 남들이 죽을까봐 무서운 거다. 다른 사람들도 그랬으면 좋겠다. 이 상황에서 “제주는/동남아는/어디는 서울보다 안전할거야”라며 이동하는 것 자체가 재앙이다. 남 탓은 타인을 괴롭게 하고 죽인다. 그러면서 또 그 주체는 얼마나 좁고 이기적으로 만드는가.



갇혀서, 알아서.

소름끼치는 비례 현상 하나를 느낀다. 위기 상황이 될수록 “내 삶은 내가 챙기는” 정서가 팽배해지고 인권은 멈춘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나는 5일 간 칩거해있는 와중에도 무료하고 우울해서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감히 이것이 최저라고 말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안다. 셀 수 없는 시간 동안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갇혀있던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있다.


“코호트 격리하라.”

대남병원 폐쇄병동으로부터 시작해 칠곡 ‘밀알 사랑의 집’ 중증장애인 시설, 그리고 예천 장애인시설 ‘극락마을’에서 환자나 간호사가 코로나19 확정판정을 받았다. 시설 장애인들의 감염과 죽음이 이어지고 있다. 조중동 인터넷 기사의 댓글들은 하나같이 핀트를 어긋난다: “저 시설 수상한데? 신천지에서 운영하는 재단인가” “그러니까 중국인들 들어오게 한 문재앙이 문제.” 이 말이 당장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나? 이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손을 떼고 더 알아볼 생각을 않는다. 집단사망의 원인은 ‘집단격리’다. 


절망적이다. 지난 몇 년 간 탈시설은 한국 장애 운동의 가장 큰 화두 중 하나였다. 장애인들이 우리 사회에서 잘 보이지 않는 이유는 집에만 있거나, 대부분은 장애인 거주 시설에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들이 비장애인과 뒤섞여 사회인으로서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한 일말의 제도가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시설과 집에 칩거하게 된다. 시설에 있으면 꼼짝할 수 없다. 다양한 중증 장애인들이 한 방에 모여 살기 때문에 24시간 나의 공간, 사생활 없이 살게 된다. 그리고 갈 곳 없고 돈도 없으니 시설 장애인들은 시설 관리인이나 의료진으로부터 지속적인 괴롭힘이나 방치를 당하기도 한다. 장애인들이 이런 시설을, 단절을 벗어나 자유롭게 움직이고 관계 맺을 수 있게끔 해야한다는 것이 장애 운동 진영의 꾸준한 목소리였다. 그런데 현실은 바로 그 빽빽한 시설에 결국 감염병이 들어섰고, 방치되니 늦게 발견되었고, 가까이 24시간을 모두가 붙어있으니 더욱 빨리 옮았고, 여럿이 옮으니 더욱 격리 되어버렸다. 사람이 죽는다. 그저 한 사람이라도 덜 죽었으면 하는 것뿐인데, 다른 사람들은 죄다 집에 보내고 안전한 나의 방에서 자가 격리하게 하면서. 그런 공간이 없으면 제공해야 하는 것 아냐? 그런데 아무도 충분히 주목하지 않는다.


재난의 시대가 되면 가장 취약 계층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들이 가장 큰 피해를 본다. 가난한 사람들, ‘노약자’라 칭해지는 아동, 노인, 장애인, 임산부.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서 필연적으로 남에게 의존하며, 약자와 취약 계층은 생존을 위해 더욱 많은 지원과 정책을 필요로 한다. 위급 상황이 되자 보건복지부는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충분한 지원을 하지 않았다. 한편 개강, 개학이 전부 밀리고 많은 단체 프로그램이 취소되면서 수많은 아이들이 집에 있게 되었는데 활동지원사가 제대로 제공되지 않아 워킹맘들도 가슴을 졸이고 있다. 이렇게 되면 또 직장 있는 여성들이 먼저 일을 포기하고, 대체자를 찾아보고 집으로 향해야겠지. 급박한 상황이 되자 모두들 ‘알아서’ 자신을 보호해야하는 처지가 되었다. ‘알아서’ 할 수 없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정부가 그렇게 놔둬서는 안된다는 것을 여럿이 말했는데. 재난 앞에서 '자유롭게' 풀어지는 순간 약자들이 가장 피해를 본다.



기후위기와 전염병

2011년 신종플루 바이러스 이래 처음으로 감염병으로 인해 정부가 ‘심각’ 단계를 책정했다. 지금 잠시 손을 잘 닦고, 이동을 삼가고, 자가 격리를 한다고 해서 되는 걸까. 코로나는 그저 지나갈 한 철의 유행이 아니다. 좁게 보면, 이번 달에 미국 미생물학회는 이번 감염 규모를 고려했을 때 코로나19가 독감처럼 매해 유행하는, 일상화된 질병으로 고착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조금 더 시야를 넓히면, 앞으로 신종플루, 코로나와 같은 감염증을 포함해 갖가지 재난은 점점 잦아질 것이다. 


21세기에 들어서 공장식 축산업으로부터 생겨난 인수공통 전염병이 급속하게 퍼지고 있다. OECD는 근 몇 년 간 우리나라에서 구제역이나 조류 인플루엔자 등의 가축 질병이 빈번하게 재발하는 요인을 극심한 공장식 사육으로 꼽았다. 돼지인플루엔자와 조류인플루엔자, 일본뇌염과 사스, 메르스 모두 동물에서 기원한 인수공통전염병이었고, 마지막 두 개는 코로나19와 같은 코로나 바이러스 변종이었다. 동물에서 기원한 바이러스는 사람의 인체 면역계에 인식되지 않아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한다. 20세기 초반의 스페인 독감도 인수공통 전염병이었고 전세계 40%의 인구를 감염시키고 약 5천 만 명의 사망자를 낳았다. 동물이 옮기는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힌 역사가 길지만, 기후온난화와 공장식축산이 인수공통 전염병의 생성과 확산을 더욱 촉진시키고 있다. 


공장식 축산으로 인해 수많은 돼지와 닭들이 움직일 수도 없이 좁은 공간에 갇혀 있는 동안 병이 만들어진다. 그 병이 돼지들 사이에서 시작되면 우리나라는 공무원들을 시켜 그저 돼지들을 전부 학살하고 땅에 묻어버리고 말았다. 매번 그런 식이다. 평소에도 생명이 아닌 것처럼 대하고 아무렇지 않게 죽이던 존재를, 다른 방식으로 죽일 뿐이다. 이 시점에서 어쩌면 ‘비거니즘’이 사람에게 최선의 식단인가? 영양소 어쩌고 하는 말들은 쓸데없고 사치스러운 질문인지 모른다. 우리는 지구라는 같은 배를 탔다. 코로나는 또 한 번의 경고장이다.


북극의 얼음이 녹고 있다. 남북극의 얼음 속, 그리고 한 대 기후의 영구동토층에 봉인되어 있던 수억 개의 고대 미생물과 바이러스가 해빙과 함께 살아날 것이다. 근 몇 세기 동안 사람이 경험하지 못한 대부분의 미생물에 대해서는 면역력이 없을 것이고, 기후 변화로 인해 해수면이 높아지고 식자재가 고갈되는 것만큼이나 사람을 많이 죽일 것이다. 2018년, 영국 의학전문지 ‘랜싯’은 기상이변이 아니더라도 기온과 수온 상승으로 인해 오염물질과 감염병이 급격히 증가할 것이며, 이 때문에 2030년 즈음부터 전 세계에서 매년 25만 명이 건강을 잃고 사망할 것이라는 경고를 남겼었다. 고작 10년 후다. 사람들이 아프고 죽고 음식이 부족해지고 생산이 멈추어 모든 것이 절박해지는 이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코로나19를 살아낸다고 해서 내가 그것도 살아낼 수 있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엉성한 맺음

난 무얼 할 수 있지. 자꾸 무력해지지 않으려고 한다. 세상은 너무 느리게 바르고 재앙은 너무 빠르게 오는 것 같다. 그래도 계속 힘을 내보려 애쓴다.


위급한 시기에 “지금 당장은 혐오와 인권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아니다”라고 할 때, 바로 그때가 인권을 가장 절박하게 수호해야하는 순간이다. 아니 사실, 그래서 여러 운동 진영들은 위급한 시기가 닥치기 전에 항상 치열하게 목소리를 내어왔다. 탈시설 운동과 농성이 대학로 마로니에를 채웠고, 난민 단체들이 편견을 바꾸고자 서울 난민 영화제를 시행해왔고, 트랜스젠더 단체들이 다른 퀴어, 여성주의 단체와 연대했다. 그러나 줄줄이 돌아오는 대답은 “나중에” 그리고 무관심한 고갯짓. 비거니즘과 환경운동을 외치는 사람들 앞에서도 지금 경제가 위급하고 사람도 살기 힘든데 무슨 동물. 평소엔 시의적절하지 못하다, 다른 긴급한 사안들에 비해 우선순위가 밀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전혀 주목받지 못하던 약자 문제들은 결국 재난이 터지고 사고가 터지면 누군가의 이름이나 목숨을 댓가로 간신히 관심을 받는다. 하지만 그렇게 피를 바쳐 얻은 관심마저도 오래 가지 않고, 쉬이 공감 받지도 못한다. 


하지만 정말... 다른 재앙들과 똑같이, 코로나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몇 가지 과제들에 대한 뼈저린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한다. 여태 그런 메세지를 느끼지 못했다면 지금부터라도 두려워하고 화를 내길 바란다. 코로나19의 감염 정황은 혐오, 동물 착취, 그리고 취약한 여느 몸들에 대한 외면이 정말 큰 재앙의 씨앗이 될 수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절박한 경고장 앞에서 우리는 다만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 이기적으로 살 것인가, 함께 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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