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여행] 알록달록한 정체성을 품은 도시와 공간
어느 날 회색 양복을 빼입은 신사들이 도시에 등장한다. 매일 숫자가 불어나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그들의 노골적인 침투를 알아채지 못한다. 회색 신사들은 “시간 절약. 나날이 윤택해지는 삶!”과 같은 포스터들을 사방에 붙이고, 도시 사람들을 하나둘 꼬드겨 시간 절약 거래를 체결하더니, 이윽고 도시를 장악해버린다.
“대도시의 모습도 차츰 변해갔다. 옛 구역은 철거되고,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모두 생략하고 꼭 필요한 부분만 살린 새로운 집들이 지어졌다. 그 안에 살 사람들에 맞추어 집을 짓는 수고는 하지 않았다. 그러자면 제각기 다른 모양의 집을 지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똑같은 모양의 집을 지으면 돈이 훨씬 적게 드는 데다 무엇보다 시간을 절약하는 이점이 있었다. (...) 다른 점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성냥갑 같은 고층 임대 아파트들이 끝없이 우뚝우뚝 솟아났다. 집들이 똑같아 보이니까 당연히 거리도 똑같아 보였다. (...) 삭막한 질서의 황무지라 아니할 수 없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도 꼭 그런 식으로 진행되었다.”1
미하엘 엔데의 「모모」는 도시의 시공간을 뺏어버린 회색 신사들과 그들을 지휘하는 ‘시간 도둑’으로부터 모모가 도시 사람들을 구해내는 이야기다. 초등학생 때 이 책을 아주 좋아했는데, 이 책을 읽고 며칠 후에 지독한 악몽을 꾼 적이 있었다. 그 당시로선 차를 타고 몇 번 지나가본 게 전부였던 ‘강남’의 한 대로변에서 사람들이 나를 밀치고 밟고 지나가는 꿈이었다. 더 무서운 점은 내가 소리를 지르고 발버둥을 쳐도 길거리의 사람 중 그 누구도 나를 쳐다보지조차 않는다는 것이었다. 높은 회색 빌딩들 사이에서 회색 양복을 입은 모두들 어디론가 향하느라 바빴다. 어린 시절의 내 무의식이 회색 신사를 곧바로 강남의 모습과 연결한 게 놀랍지는 않다. 서울은 회색 신사들과 닮은 구석이 많은 도시다. 이따금 연세로에 새로운 술집이 여는 것을 볼 때면 나와 친구들은 몇 초 이상 곰곰이 생각해야만 무엇이 사라졌는지 알아채거나, 영영 모르기도 한다. 그렇게 스리슬쩍 대만 카스테라나 와플, 모카번과 같이 ‘핫’했던 길거리 음식들은 ‘구린’ 옛날 것이 된 지 오래다. 길거리를 조금만 걸어보면 지나쳐가는 사람들과 옷가게 창문의 마네킹들로부터 2019년에는 레트로 패션과 함께 여전히 러플 달린 원피스들이 유행이라는 걸 알 수 있다. 항상 비슷한 관상의 연예인 얼굴과 뽀얀 포스터들이 술집과 전광판을 채운다. 서울의 여러 거리가 이렇게 존재감 없는 비스무리한 것들이 끊임없이 북적거리고 지나치는 공간이 되었다.
“수직적인 관점에서 볼 때 도시는 매우 큰 변화를 겪었다. 수평적인 관점에서 볼 때 도시는 획일화 경향이 강하다. 모든 도시가 고속도로, 입체 교차로, 고층 빌딩, 네온사인, 광고판, 광장의 공통요소를 갖추고 이른바 ‘일반 도시화’ 된다. 현대 도시는 위의 요소를 종합적으로 이용해 기존의 모습을 깨끗이 지우고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2
초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서부터 한반도의 오천 년 역사와 고유한 문화, 선조들의 지혜에 대한 노래를 부르곤 하지만 그 오랜 역사와 고유문화 중 서울의 도시 공간 속에 남은 것은 얼마 없다. 궁궐들을 제외하고는 이미 많은 한옥과 전통 건축물이 무너졌고, 오래된 길목과 집들이 제거되는 곳엔 새 회색 길과 터널이 촘촘히 뚫리고 있다. 자본과 유행의 논리로 인해 정체성도 다양성도 결여한 도시 풍광이 만들어지고 있다. 빠르게 생겨나고 소멸하는 것들 사이에서 서울의 사람들도 뿌리내리지 못하고 거리를 부유하는 느낌이다. 대학생이 된 후 여행해본 다른 도시들을 생각하면 서울만이 그런 건 아니었다. 세계가 이렇게 ‘회색도시화’ 되는 와중에 그래도 확고한 정체성을 드러내고, 조금 더 의도적이고 사람 냄새 나는 도시와 도시 공간을 목격했었다. 그 특별한 장소들은 뇌리에 깊이 박혀 매력적인 잔상으로 남았다. 교환학생 중에 여행한 북미의 매력적인 도시 공간들을 알록달록한 퍼즐 조각처럼 떠올려본다.
미국의 멜팅팟(melting pot)은 실패했다. 어느 지역은 KKK의 후예들이 여전히 판을 치고 있고, 이주민들이 세운 나라임에도 절반의 사람은 대통령이 이주민에 대해 폭력적인 추방 정책을 내세워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 와중에 어떤 지역은 다행스럽게도 끊임없는 대화와 섬세한 논쟁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 대표적인 곳이 미 서부 캘리포니아주다. 20세기 초의 비트족부터 전국의 퀴어, 장애 운동가 등 미국의 짧은 역사에서 소외되고 ‘비주류’라 여겨졌던 모든 집단은 한 번씩 서부로의 이주를 감행했다. 강제 이주로 인해 조상들이 미국 남부에 살게 된 아프리칸 아메리칸 중에서도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자발적으로 서부로 이주한 인구가 있었다. 비교적 근래의 아시아 이민자들마저도 태평양을 건너자마자 마주하는 북미의 웨스트 코스트에 정착해버리면서 서부는 정말 하나로 규정될 수 없는 알록달록한 정체성의 공간이 되었다.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직후에 교환학생 신청서를 작성한 나는 오로지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에만 지원서를 넣었고, 샌프란시스코와 인접한 버클리에서 1년을 보내게 되었다.
사람은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동지의식을 즐긴다. 타인을 만나고 새로운 공간에 놓였을 때 곧바로 자신이 어떤 행동까지 할 수 있고, 얼마나 솔직해질 수 있을지 가늠하면서 주변을 찬찬히 둘러본다. 퀴어 굿즈나 페미 굿즈를 하나라도 후원해본 사람이면 나와 같은 계열의 굿즈가 달린 가방을 길거리에서 마주했을 때 얼마나 반가운 마음인지 알 것이다. 보통 이런 작고 무심한 연대의 증명들이 가장 강렬한 안심의 기제가 되는데, 버클리와 샌프란시스코는 일상적인 연대의 상징들을 가장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도시였다. 평소에도 Castro 단지와 같은 곳은 무지개 천지였고, Pride month에는 한 달 내내 학교에서도 샌프란시스코의 가게와 가장 큰 길거리들에서도 무지개가 내려가지 않았다. 책방이나 동네 카페에만 가도 꼭 페미니스트 포스터나 이주민 환영 포스터가 붙어있었는데, 트럼프가 라틴계와 무슬림에 대한 혐오적인 발언을 하고 나면 꼭 더 많은 포스터와 스티커가 창문에 추가되었다.
한편 샌프란시스코와 버클리의 다양성은 상징에서 그치지 않고 실제로 일상 공간의 변화를 낳았다. 샌프란시스코의 화장실은 대부분이 젠더리스, 배리어프리 화장실이었다. 장애인이 입장하기 편리했고, 트랜스젠더가 위해의 두려움 없이 공공 화장실에 들어설 수 있었다. 버클리의 화장실과 기숙사 샤워실들도 거의 남녀공용으로 바뀌는 추세였다. 될 수 있는 한 많은 경계와 장벽을 허무는 모습이었다. 화장실과 샤워실을 모두가 함께 씀으로써 다른 사람, 특히 이성의 벌거벗고 씻는 몸을 철저히 격리하고 감추었을 때 생기는 모호한 예상이나 환상도 감소한다고 느꼈다. 머리카락을 치우고 욕실 뒷정리를 하는 등의 현실적인 문제가 여자와 남자 간에 공유되는 경험으로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렇게 허물어진 장벽들은 이미 샌프란시스코와 버클리가 일구어낸 여성, 퀴어, 장애 인권의 수준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곳에 도착한 첫날에 바로 발견한 포스터, 배너, 화장실의 모습들로부터 나는 “누구나 환영한다”는 강렬한 메시지를 받고 내가 이 공간에서 얼마나 안전할지를 빠르게 가늠할 수 있었다.
지내보니 샌프란시스코와 버클리는 캘리포니아에서도 특히나 여러 인권 운동의 중심지로서 그 운동의 역사와 다양성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길거리에선 매주 환경 단체, 여성 단체, 대학생, 흑인 청소년, 홈리스, 동물권 단체의 운동이 이어졌고, 운동의 방식도 필리버스터, 행진, 페스티벌, 행위예술의 형태까지를 포괄했다. 어느 날에는 두세 명의 동물권 운동가들이 옷을 모두 벗고 온종일 좁은 철장 안에 갇혀 <이것이 사육당하는 돼지들의 일상이다>라며 그 충격적인 모습을 전시했다. 이 시위들은 서울의 광화문이나 시청 광장과 같은 상징적인 공간이나 서울혁신파크와 같이 시민 단체들이 모여 있는 곳뿐 아니라 정말 도시의 사방에서 진행되었다. 심지어는 고등학교나 대학교의 정문도 점령하고 일상 공간 안에 뒤섞이고 있었다. 사람들은 특정한 곳으로 향하다가 시위의 내용을 보고 멈추어 서고 물어보고 참여하곤 했다. 운동의 도시에선 운동의 장벽이 놀랍도록 낮았다.
연대와 포용에 있어 당당한 선언과 외침만큼이나 침묵의 힘도 막강하다. 사람들은 인정받고 주목받고 애정을 받을 권리만큼이나 시선을 받지 않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 광장 안에 있을 때조차 반투명한 밀실을 갖출 권리가 있다. 긴 시선이 때로는 애정을 의미하지만 수많은 타자 사이에서 오갈 땐 적대심, 평가와 판단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완벽한 타인 간의 어떠한 무관심은 그것이 자연스럽든 의도된 것이든 간에 환영과 수용의 징표로서 작용할 수 있다.
이런 포용적인 침묵과 무관심에 대해 생각할 때면 버클리에서 들은 한 수업의 광경이 곧바로 떠오른다. 그 인류학 수업에는 40명의 학생이 있었다. 안내견 두 마리가 항상 동행했고, 학생 중 휠체어 탄 사람이 둘이었으며, 가끔 갓난아이를 데리고 오는 student parent 하나, 그리고 애인 없이 정자 기증을 받아서 임신한 여학생이 있었다. 안내견 중 한 마리는 교수님의 반려견이었다. 교수님은 오픈리 퀴어였고, 학생 중엔 한 학기 내내 성별이나 젠더를 잘 모르겠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런 젠더 비순응에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버클리에서 브래지어 없이 다니는 여성이나 반삭한 여성, 휠체어나 퀴어 정체성은 이제 너무 많고 당연해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수업에 아기가 동행하는 경우는 조금 덜 흔한 일이었다. 딱 한 명 있던 student parent 학생이 처음으로 10개월 된 갓난아이를 데리고 수업에 들어온 어느 날, 아무도 “왜 아기를 수업에/학교에 데려오냐”와 같은 질문은 하지 않았다. 2시간짜리 수업 중간에 아이가 갑자기 칭얼거려서 교수님 말이 가로막힐 때도 불만을 표출하는 사람은 없었다. 서러워하는 아기가 귀엽고 안쓰럽다는 듯 이따금 너털웃음이나 외마디 감탄사가 강의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긴 했지만, 사람들이 수업 속으로 다시 빠져드는 데엔 몇 초 걸리지 않았다. 아무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고, 그 아이와 학생의 존재를 알고 있지만 무시함으로써 존중했다.
균질성, 정상성은 언제나 일종의 배제와 폭력을 수반한다. 특정한 단일함을 유지하거나 추앙하는 사회에서는 외부인으로 인식되건, ‘이상한 사람’으로 인식되건 눈에 띄는 사람이 겪게 되는 끊임없는 불편과 걱정이 있다. 그런데 샌프란시스코와 버클리에서 나는 오히려 한국에서보다 더 자유롭고 평안한 때가 많았다. 완전한 비균질 사회에서야 느낄 수 있는 고도의 평안함이었다. 다양성, 비균질성이 곧 정체성인 그 도시들에서 아무도 나의 ‘진정성(authenticity)'을 추정하지도, 묻지도, 증명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버클리와 샌프란시스코에서 나는 1년 내내 교환학생이라는 신분을 거의 들키지 않고 ‘현지인처럼’ 스며들어 생활할 수 있었다. 여성으로 쉽게 인지되는 존재인 바람에 끈적하고 불쾌한 시선을 받았던 순간들을제외하면, 나는 그곳에서 무례하거나 침입적인 시선을 거의 받지 않고 살아갔다.
개인의 역사와 철학, 삶의 환경이 몸에 새겨지듯 지역의 정치와 역사도 지역 광경에 새겨진다. 여러 도시 광경이 점차 무채색으로 뒤덮이는 와중에 뚜렷한 색과 특이한 미학을 유지하는 도시들도 있었다. 내가 방문한 곳 중 오스틴은 독보적으로 독특한 색을 지닌 도시였다.
교환학생 기간 중에 겨울방학을 맞았을 때, 지인이 나를 오스틴으로 초대했다. 오스틴은 미국 텍사스주의 주도다. 텍사스는 미국 남부에 위치하며, 트럼프를 지지하고 미국 총기소기 법을 유지하자고 외치며 로비하는 자본가들이 몰려있는 지역이다. 심지어는 2017년까지도 주의회에서 “정자 하나도 낭비할 수 없으니 자위하는 남성을 처벌하자”는 법안이 제안되어 거의 통과될 뻔한 곳이라 소름 끼치게 싫었다.3 그런데 지인은 오스틴만은 괜찮다고 말하며 그곳을 “빨간 주 한가운데의 파란 도시”라고 설명했다.4 미국 기준, 보수적인 공화당의 빨간 땅에서 유일하게 진보적인 파란 지역이라는 말이었다.
결국 그를 믿고 5일간 방문하게 된 오스틴은 여태 본 도시 중 가장 기괴하고 1년 내내 할로윈을 지향하는 듯한 도시였다. 텍사스의 사막 기후를 닮은 황토색 보도블럭과 황토색 카페 야외석, 황토색 교회, 그리고 황토색 학교 건물들과 가게들의 벽이나 내부에는 난데없이 박쥐와 공룡 모형이나 고어스러운 삽화가 있었다. 그런 도시 미학을 이해할 수도 없었고 눈에 띄는 유일한 아시안 여행객으로서 이 사람들이 저런 피 묻은 괴물의 정서로 나를 해치지는 않을지 진지하게 걱정한 순간들이 있었다.
첫날에 공포에 떨다가 이튿날 아침에는 길가에 주차된 한 파란 차의 앞문에 “Let Austin Stay Weird”라는 스티커가 붙어있는 것을 보았다. 그 후에 눈여겨보니 식당 안에서도, 텍사스 주립대학교의 오스틴 캠퍼스 안에서도 “Keep Austin Weird”라는 문구의 배너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후에 캠퍼스 중앙의 종탑 앞에서 “미국 최초로 총을 이용해 학교 내 학살이 일어난 장소”라는 설명과 함께 총기 규제를 해야 한다는 논거가 적힌 안내판을 보았을 때,5 그리고 게이 커플이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뽀뽀하고 지나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오스틴이 확실히 ‘텍사스’ 와는 다른 정치성을 지닌 곳이라는 걸 실감했다. 미국 백인우월주의 문화와 보수성의 한가운데에 갇힌 오스틴 사람들이 그 숨 막히는 ‘질서’에 반기를 들기 위해 추악함과 괴상함을 핵심적인 미의 가치로 삼게 된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트럼프가 그렇게도 싫어하는 멕시코의 디자인과 상징들이 사방에 뒤섞여 있었고 프리다 칼로를 찬양하는 일러스트가 많았다. 쿠바나 자메이카에서 들여온 아프리칸 아메리칸의 부두(Voodoo)6 미학을 문신이나 악세사리로 몸에 지니고 전시하는 백인 청년들도 꽤 있었다. 보수적 백인 문화의 중심부에 갇힌 현실에 대한 발악과 더 큰 자유에 대한 갈망, 자신들이 쉬이 만나지 못하는 타자에 대한 선망과 호기심이 뒤섞여 이쯤의 모습에 머물게 되지 않았나 추측해본다. 오스틴이 멕시코 문화나 부두 신앙을 소환하는 방식은 여전히 ‘의문스럽고 신화적인’ 데에서 그쳤기에 오리엔탈리즘이며 자기들 구미에 맞는 문화 착취라는 생각도 완전히 떨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떠나는 날에 이르러서는 오스틴의 해괴함과 다른 문화권과 약자에 대한 일방적인 애정을 응원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일탈(Deviance)’과 ‘이상함(Weirdness)’을 자랑스럽게 정체성으로 품는 도시의 힘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텍사스에도 분명 온갖 사람과 온갖 소수자성이 있을 텐데, 누군가는 주를, 나라를 떠날 처지는 못 돼도 오스틴으로 도피하는 것을 희망으로 품고 있거나 가까이에 위치한 오스틴의 존재 자체에 감사할 것이다. 다른 곳도 아닌 텍사스의 심장이 빨간 몸뚱아리와는 다르게 푸른 관용을 가지고 있다는 데에 위안을 얻을 것이다. 한편 이런 정체성은 버클리와는 달리 ‘규범성’과 ‘평범성’이 단호하게 정의된 곳에서만 의미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무엇이 되자!”고 하긴 어려워도, 적어도 “회색 신사는 되지 말자!”며 노력하는 사람들이 오스틴에 있었다.
도시는 돌아다니는 사람들뿐 아니라 머무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고, 광장만큼 많은 밀실로 채워져 있다. 교환학생 기간 동안 캐나다 동부로 첫 나홀로 여행을 다녀왔다. 아시안 여성 혼자 한 번도 못 가본 나라에 가자니 워낙 겁이 나서, 안전한 곳에 위치한 에어비앤비 중 합리적인 가격과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가진 방들을 정성 들여 골랐다. 막상 도착해보니 12월의 몬트리올과 퀘벡에서는 해가 오후 3시에 지는데다가 평균 기온이 영하 20도였고, 눈은 종아리까지 내려 다른 관광객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래도 이 여행은 몇 사람과 그들의 공간 덕에 가장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았다.
첫 도시는 몬트리올이었다. 숙소는 노란 방 인테리어와 가격, 호스트가 젊은 여성이라는 사실만을 보고 고른 곳이었다. 나홀로 여행에 대한 모호한 공포와 후회를 느끼면서 호스트가 귀가하기 전에 혼자 체크인을 했다. 거실 서가를 채운 페미니즘 도서와 탈식민주의 작가들의 책을 보고서 호스트가 나와 비슷한 결의 사람일 거란 느낌이 들었고, 불분명한 타자에 대한 공포는 곧 기대의 두근거림으로 바뀌었다. 집에 돌아온 호스트 미리암과 첫인사를 나누며 서로 많이 놀랐다. 나는 1년간 한창 학교 밖 청소년들의 검정고시 공부를 도와주는 활동을 하다가 막 마친 무렵이었는데, 미리암은 캐나다 학교 밖 청소년들이나 저소득 청소년들을 위한 공간과 웹 플랫폼을 고민하는 NGO에서 일하고 있었다. 나는 여행을 위해 딱 한 권의 책, 「백년의 고독」을 챙겨갔는데, 미리암은 책을 읽고 싶다는 내 말을 듣고 내가 샤워하는 동안 방 책상 위에 「백년의 고독」 한 권을 올려두었다.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책이라고 했다. 그때 결심했다. 눈이 20cm나 쌓인 몬트리올을 혼자서 구석구석 돌아다니긴 힘들 것 같고 어차피 연말이라 닫은 명소도 많으니 그저 미리암이 추천한 책방과 카페들이나 전부 들러보기로.
미리암은 빨간 포스트잇에 도시 외곽의 소책방 두 곳과 도심의 카페 다섯 곳의 이름을 적어서 내게 넘겨주었다. 자신이 걷기 좋아하는 길거리도 알려주었다. 그 모든 곳을 들렀는데, 두 번째로 방문한 책방은 몬트리올 대학의 영문학과 학생들이 운영하는 놀라운 책방이었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공간을 채운 몇백 권의 책을 죄다 파악하고 있었고, 대부분을 읽은 듯했다. 내가 책을 추천해줄 수 있냐고 묻자 카운터에 앉아있던 남색 머리 학생이 함박웃음을 지어 보이며 얼른 내 쪽으로 왔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아메리카나」에 한창 꽂혀있던 와중이라 그런 식의 “나이브하지 않고 똑똑한 사랑 이야기”를 읽고 싶다고 했다. 내 어정쩡한 단어 선택을 듣고 카운터에 남은 학생들은 “아하! 로맨스물 말고 정치적 로맨스를 좋아하시는구나!”라고 판단하더니 분주히 다섯 권의 책을 꺼내주었다. “신화적인 이야기나 새로운 세계관을 담았고 통찰력이 있는 책”도 읽고 싶다고 했더니 또 대여섯 권의 책을 더 쌓았다. 여행이 한참 남은 시점이었는데 결국 그곳에서 세 권의 책을 사서 짐을 늘이고 말았다.
숙소에 돌아가 내가 추천받은 책 리스트를 말해줬더니 미리암은 눈을 반짝이면서 듣다가 결국 며칠 전의 그 빨간 포스트잇을 가지고 나와서 모두 받아적었다. 나는 그가 소개해준 페미니스트 퀴어 책방에서 인생 처음으로 사고 싶은 시집을 발견했다고도 말했고 미리암은 제목을 물었다. Rupi Kaur 이라는 인도계 캐나다인 여성 작가의 「Milk and Honey」라는 작품이었다고 하니 그녀는 무척 재밌어하면서 바로 지난 주말에 자신이 다른 서점에서 그 책을 샀다고 했다. 나는 이후의 3일간 미리암이 흔쾌히 빌려준 그 시집을 들고 다녔고 몬트리올을 떠나기 전에 완독했다.
이후에 머물렀던 퀘벡 에어비앤비의 호스트 마리-조엘은 퀘벡 도서관의 사서로 다른 도서관이나 지역 교육 시설과 연계해 문화 프로그램을 짜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내가 박물관, 미술관, 책방 등의 공간을 좋아한다는 것을 듣고서 내게 정치범들을 가두던 감옥이 동네 박물관/도서관으로 리모델링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나는 그 도서관에 잠시 놀러갔다가 결국은 거기에서 온밤을 보냈다. 그곳에는 역사 서적, 미스테리 소설과 판타지 소설이 많았는데 공간의 역사나 느낌과 아주 잘 어울렸다. 그 다음 호스트였던 막스 부부는 저소득 청소년들을 위한 도시락 사업, 작은 텃밭 만들기를 하는 NGO의 대표들이었다. 캐나다는 무료 급식 개념이 아예 없어서 나는 그들에게 한국의 중학교 무료급식과 그 주변을 둘러쌌던 찬반 여론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고 그들의 청소년 공동 취식과 지속가능한 농사에 대한 고민을 들었다. 노란 방의 모든 호스트와 청소년에 대한 고민을 나눌 수 있었고, 그들이 비슷한 문제의식과 관심사를 발현하는 서로 다른 방식들이 죄다 흥미롭고 소중했다. 마음에 쏙 드는 방을 보고 선택한 호스트들은 마음에 쏙 드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이 추천해준 그들의 공간들도 내 취향에 맞았다.
결국은 도시와 도시 공간을 채우는 수많은 개인들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 밖에서 모국어나 삶의 궤적이 달라도 즉시 마음이 딱딱 들어맞는 사람들을 찾을 수 있다니 당연한 일인 데도 괜히 위안이 되고 놀라웠다. 하지만 이렇게 맞는 사람들을 연달아 만나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 아닌가. 이렇듯 방은 사람을 보여주고, 길거리는 도시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캐나다 동부에서의 만족스러운 경험 때문에 결국 캐나다 서부로도 여행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동부에서 내가 작은 개인 공간과 ‘밀실’들 덕분에 만족스러웠다면, 서부의 도시 밴쿠버에서는 누구나 입장하고 머물 수 있는 건물 안팎의 다양한 ‘광장’들과 사랑에 빠졌다. 우선 밴쿠버에는 공원이 정말 많았고, 그 공원들이 각 동네의 구심점으로 작용하며 다양한 동네 행사가 벌어지는 장이 되었다. 짧은 여행 기간 동안 A 동네의 공원에선 정기 토요 마켓, B의 공원에선 일회성 물물교환 장터, C 동네의 공원에선 커피 테이스팅 행사가 벌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뛰어 노는 아이들과 태닝을 하는 어른들, 한가하게 앉아서 대화하는 학생들이 심심찮게 보였다.
다운타운 밴쿠버의 가장 유명한 장소들은 스탠리 공원, 밴쿠버 박물관, 밴쿠버 공공 도서관, 밴쿠버 현대 미술관과 그랜빌 아일랜드의 퍼블릭마켓이었다. 도심 한가운데를 메운 지역의 ‘랜드마크’들이 상업 시설이나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거의 전부 공공 기관이라는 점이 인상 깊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밴쿠버의 중앙은 ‘소비자’가 아닌 ‘시민’의 공간들로 가득했고, 모두에게 열려있었다. 그랜빌은 다운타운 근처의 큰 섬으로, 과거의 공장지대를 문화 공간으로 개조한 곳이었다. 리모델링한 큰 시장 주변으로 밴쿠버 예술가들의 공방과 편집샵이 있었고, 반대쪽으로는 야외 테이블과 작은 무대가 있었다. 그곳에서 재즈 페스티벌이나 포크 음악회 등 수준급 음악 행사들이 공짜로 진행되었다. 나는 종종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바깥의 벤치나 바닥에 털썩 앉아 음악을 들으면서 시장에서 산 도넛을 먹었다. 여행 기간 동안 이 시장이나 스탠리 공원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밴쿠버의 박물관과 도서관과 같은 공공 ‘기관’들 또한 일종의 광장으로서 기능하며 안팎의 경계를 허물고 있었다. 박물관의 경우 ‘백인 중산층’ 외의 사람들이 입장하게끔 하고 유럽계 침탈과 정착의 역사가 아닌 원주민과 이주민의 역사 또한 균등하게 전시 공간에 들이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었다. 밴쿠버의 박물관들은 원주민에 대해 전시를 하는 경우엔 반드시 원주민 예술가들과 협업하고 원주민 당사자들의 의견과 발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Museum of Vancouver의 경우엔 여러 시민운동에 대한 전시를 진행하며 밴쿠버 내 다양한 시민단체와 활동가들의 강연을 주최하거나, 홈리스에 대한 전시를 기획해 홈리스 당사자들과의 이벤트나 토크를 주선하기도 했다. 이렇듯 밴쿠버에서는 ‘힘 있는’ 사람들의 서사만을 ‘공식적인 역사’로서 담던 장소인 박물관이 변화하고 있었다. 대안적인 서사들이 ‘공식적인’ 지식으로 전시되고 그 주체들도 ‘공식적인’ 서술자로서 기관에 입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을 중심으로 하는 대화와 토론의 장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었다.
한편 밴쿠버 공공 도서관의 경우, 디자인에서부터 입장의 문턱을 낮추고 안팎의 벽을 허물겠다는 의지가 드러났다. 안이 훤히 보이는 높은 유리문을 지나 건물 안에 들어가도 카페와 벤치가 줄줄이 늘어서 있어 바깥 길거리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부의 나선형 통로를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도서관 안에 들어가 있었다. 엇갈리게 배치된 서가들의 사이사이나 건물의 외부 창문을 따라 1~4인용 책상들이 놓여있었고, 그 자리엔 조용히 공부하는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한편, 도서관의 한가운데에는 공용 컴퓨터 사용 공간과 행사를 진행할 수 있는 ‘실내 광장’이 있었고, 이 광장은 다른 층에서도 내려다볼 수 있었다. 도서관의 거대한 옥상은 통째로 공원이었다. 회원권이 없이도 당연히 입장할 수 있었고, 돈을 내지 않고도 도서관의 내외부에서 주최하는 공연과 강연, 글쓰기 수업에 참여할 수 있었다. 실내에서 책을 읽고 공용 컴퓨터를 사용하는 홈리스도 많았고, 아이나 휠체어 탄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낮은 책 검색대도 있었다.
내가 초등학생 시절에 걷곤 하던 서울 중랑구의 샛길들이 사라졌다고 말하자 강남구에 사는 친구는 자기가 학원 등하굣길에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거닐던 공원이 사라져서 아쉽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친구들과 만나면 음식점과 카페를 전전한다. 날씨가 선선해서 밖에 있어도 될 법한 날에도 친구들과 함께 앉아있을 곳이 마땅히 없으니 무작정 걷고, 결국엔 지쳐서 어딘가 카페에 들어가고 만다. 더 갈 곳이 없고 또 돈을 쓰기도 싫어서 그 카페에 죽 앉아있게 될 때도 많다. 서울환경연합에 의하면 ‘공원일몰제’로 인해 2020년 7월에 사라지는 서울시 공원은 무려 71개, 잠정적으로 사라질 수 있는 공원은 서울시 전체 공원 면적의 약 83%라고 한다.7 돈을 쓰지 않고서 누구나 머물 수 있는 장소가 지금도 부족한데 더욱 없어지는 추세인 것이다. 서울에서 놀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릿값’을 치르고, ‘시민’보다는 ‘소비자’로서 더 많이 수행한다. 여행해본 다른 많은 도시도 이런 실정만큼은 같았다. 이에 비해 밴쿠버에는 편하게 입장해서 원하는 만큼 머물다가 쿨하게 떠날 수 있는 장소가 많았다. 샌프란시스코와 버클리가 다양한 소수자 정체성을 드러날 수 있게끔 하는 공간이라는 측면에서 의미적으로 포용적이었다면 밴쿠버는 누구나 조건없이 입장하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공간들을 많이 두었고, 전통적으로 배타적이었던 공간들에마저도 다양한 사람을 들이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 구조적으로 포용적인 도시였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밴쿠버는 1990년대부터 죽 공공 기관과 도시의 시민들을 연결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젝트와 퍼블릭 디자인 대회를 진행해왔고, 지역 재생과 공공 공간 관련해서는 전 세계에서 선례로 참고하는 도시였다. 캐나다 여행을 마치고서 내 밀실과 광장은 어떤 형태였으면 하는지, 나는 ‘나’와 ‘우리’의 공간들로부터 무엇을 원하는지 고민하게 되었다.
내가 사랑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서울에 있고, 나는 앞으로도 서울에 살고 싶은 마음이 크다. 그래서 자꾸만 다른 도시들의 매력에 비추어 서울의 가능성과 미래를 상상해보게 된다. 물론 서울에도 내가 사랑하는 장소들이 있다. 이를테면 대놓고 퀴어성을 드러내거나 외국인인 것이 보여도, 즉 ‘평범한’ ‘한국인’이 아닌 걸 전시해도 주목받지 않는 공간인 이태원이 좋다. 이태원역부터 녹사평과 해방촌까지를 연결하는 길목에 남아있는 MADE IN KOREA 시절의 가게들과 루프탑바, 반대로 한강진과의 사이에 놓인 이슬람거리와 태국 음식점들도 좋아한다. 한편, 대학로에서는 아무리 다른 가게들이 생겼다가 사라져도 연극이라는 정체성에 걸맞게 항상 자리를 지키는 오랜 극장들과 끊임없이 쌓이는 새 뮤지컬 포스터들의 모습이 반갑고 좋다. 이 지역들이 좋은 이유는 내가 기억하는 동안 꾸준하고 연속적인 정체성을 유지해서 내가 공간과 나름대로 관계를 맺고 애착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확실한 정체성과 뿌리가 없는 공간에서 사람 간의 추억은 쌓일 수 있어도 공간 자체에 대한 좋은 마음이 생기기는 힘들다. 나는 내가 앞으로도 살아갈 서울이 조금 더 기억에 남고 매력적인 도시가 되었으면 한다.
한국의 도시들은 어딘가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장소와 관계 맺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구를 고려한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계획 없이 만들어지는 허물 뿐인 도시 공간들을 보고 있자면 한숨이 나온다. 한국은 진보와 세련을 추구하면서 과거의 흔적이나 자연, 혹은 지역 ‘분위기’를 상실하는 데에 있어서 무감각하다. 오랜만에 해운대에 가보니 높다란 엘타워의 척추가 세워지며 해운대의 탁 트인 광경의 한쪽 축을 점령하고 있었다. 잠실 롯데타워와 같은 흉물스러운 건물이 그것보다도 높게 지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기성세대 대기업 사장들이 7~80년대의 산업화시대 미학 그대로, 도시의 ‘랜드마크’가 될 게 뻔한 대규모 건축적 장악을 해버리는 것을 정치인들이 허가하고 도시 사업으로까지 지정하곤 한다. 건축학에서는 개인에게 의미 있는 장소가 가지는 성질을 장소성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어떤 공간이 대중과 개개인에게 감흥을 주지 못한다면, 장소성이 없는 ‘장소 상실의 공간’이 된다. 그래서 건축학의 기본은 ‘공간’을 ‘장소’로 만들기 위한 계획이라고 한다.8 이 관점에서 보면 서울은 통째로 장소 상실의 위기에 놓인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제적인 계획만을 갖추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위한 밑그림과 정체적 중심이 없는 도시는 자꾸 흉해지고 ‘사는 맛’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매력적이고 뿌리 있는 도시란 무엇일까. 여행을 다니면서 만족스러운 밀실과 광장의 공간이 결여된 서울에서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끊임없이 반문하게 되었다. 서울 사람들이 회색 신사 그 자체의 삶을 살면서 시간과 돈에 쫓기는 바람에 도시가 “삭막한 질서의 황무지”가 된 것도 있겠지마는, 서울에 이야기가 오갈 수 있는 광장이 턱없이 부족하고 천편일률적인 도시 광경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사회 규범성이 강화되고 사람살이가 더욱 삭막해지는 순환구조인 것은 아닐까. 이런 회색 순환고리에서 벗어나려면 도시는 그곳에 몸담은 다양한 사람과 삶의 여건을 인정하고 드러내는 표현의 장소이자, 쉬면서 이야기 나눌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는 포괄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인류의 진보’를 위한 기술적 발전과 세련된 도시 디자인뿐이 아니라 지금 살아가는 개개의 ‘나’를 충만하게 하는 밀실과 ‘우리’를 만나게 하는 광장이 반드시 계획되어야 한다. 그렇게 도시를 채우는 삶들을 정성 들여 녹여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도시의 정체성이 형성될 수밖에 없다. 삶과 이야기가 있는 도시,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공간의 주인인 도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내가 사는 서울이 여러 사람들이 우연히 스치고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 더 나아가선 내가 반갑게 마주한 도시들에서처럼 규범적인 평범함에 도전하고 ‘다양함’과 ‘이상함’을 상상하고 실험하는 것이 이곳의 일상이 되기를 작게 희망해보기도 한다. 더 많은 가지를 치면서도 단단하고 깊은 뿌리를 내리는 도시, 그런 알록달록한 서울을 꿈꾸어본다.
2019.8.
1. 미하엘 엔데, 한미희, 「모모」, 비룡소, 1999. 98페이지.
2. 장디페이, 양성희, 「도시를 생각하다」, 안그라픽스. 2013. 45페이지.
3. Texas Masturbation Bill 2017 에 대한 기사 참고: Isabelle Chapman, 「Texas bill would fine men $100 each time they masturbate」, CNN, 2017.3.13. https://www.cnn.com/2017/03/13/health/abortion-texas-lawmaker-trnd/index.html
4. 지난 대선 결과를 바탕으로 텍사스라는 빨간 바다 속의 파란 섬들에 주목한 기사 참고: Ross Ramsey, 「The blue dots in Texas’ red political sea」, The Texas Tribune, 2016.11.11. https://www.texastribune.org/2016/11/11/analysis-blue-dots-texas-red-political-sea/
5. 1966년의 텍사스 타워 총기사건을 설명한 백과사전 섹션: Jeff Wallenfeldt, 「Texas Tower Shooting of 1966」, Encyclopedia Britannica, 마지막 업데이트 2019.7.25 https://www.britannica.com/event/Texas-Tower-shooting-of-1966
6. 부두는 서아프리카 지역의 종교지만 이제는 그곳에서 강제 이주 당한 사람들의 후손인 미국 남부, 중미 아이티, 쿠바, 자메이카 지역의 흑인들이 더욱 많이 믿고 있다. 백인들이 부두 종교를 소환할 때는 보통 공포 미신, 근거 없는 설화, 사이비, 민간 신앙으로서의 측면이 강조되고 흑인을 경계해야할 비합리적인 존재들로서 소환할 때의 근거로 많이 사용된다. 오리엔탈리즘적인 색채를 띠는 것이다.
7.「2020년, 서울 공원의 83%가 사라진다?」, 서울환경연합. 2018.4.25. http://ecoseoul.or.kr/archives/30141
8. 양지윤, 김주연, 「아이코닉 건축」, 북저널리즘, 2019. 54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