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랑의 파도 Feb 21. 2020

쑤저우 이야기는 별로 없는
쑤저우 여행기

[노란여행]


아플 때는 쉽게 서러워진다. 내 몸의 피곤이나 고통이 오로지 내 껍데기의 영역 안에 가두어져있는 끊임없는 격리의 감각 속에서 아픈 사람은 쉬이 외로워진다. 내부의 무거운 감각에 바깥 일에 무던해지고, 괜스레 예쁘다 괜찮다 해달라고 칭얼대고 싶어진다. 말과 암시로라도 이 거리감과 고독을 좁혀줘! 우리가 이렇게나 멀고 내 감각은 오로지 나의 것이지만 나를 네 것처럼 아끼고 챙긴다는 걸 새삼 증명해달라! 그래서 가장 아프고 힘들 때 유독 주변 사람에게 감동하기도 하지만 크게 실망하고 담 쌓게 되기도 하는 것 같다.


목감기 뒤에 곧바로 3주 연속 찾아온 독감과 월경통, 위염의 감각, 그리고 건강검진 중 발견한 암일지도 모르는 혹에 대한 얕은 스트레스… 매년 겨울마다 나는 경미한 우울증 증세를 경험하는데, 3월까지 늘어지고 있는 이번의 긴 겨울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퉁퉁 부은 몸은 자꾸만 상처가 덧나고, 덩달아 정신도 툭하면 꿉꿉한 열기와 습기로 가득 차서 아픈 외로움에서 헤어나오지 못한지 꽤 됐다.


상하이에 왔다. 독감의 여파로 몸살도 살짝, 날서고 어지러운 정신살도 살짝 남은 상태에서 혼자 비행기를 타려니 메스껍고 출발 전부터 지쳤다. 비행기에 탈 때부터 폰 배터리가 50% 밖에 안남아있었는데, 보조배터리는 한국에 놓고 왔다. 이번에 칫솔, 보조배터리, 카메라 충전기도 안들고오고, 역대 해 본 여행 중 가장 엉망으로 호다닥 준비했는데, 무엇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한 이 상태가 ‘몸과 마음이 아픈 것’이 얼마나 성가시고 정신없는 요소인지 증명한다고 생각했다.


그나마, 가장 걱정하던 요소 몇 개가 순탄히 해결되어 힘이 났다. 악명 높은 중국동방항공을 처음 타봤는데 30분 밖에 연착이 되지 않았다. 중국 유심도 (가장 유명한 브랜드마저 나쁜 후기가 많길래 걱정했고, 그래서 혹시나 현지에서 안 터질까봐 어젯밤에 여러 중국 지명도 막 폰 메모장에 적어놓았는데) 폰을 두 번 재부팅하니까 문제없이 빵빵 터졌다.


비행기나 유심에 문제가 생기면 상하이 도심이나 느적느적 걸어다니려고 했는데, 너무 순탄하게 오후 1시에 도착하는 바람에 바로 홍차오 기차역으로 향하고 3시 쑤저우행 기차표를 샀다.


솔직히 기차의 파란 의자에 앉자마자 후회했다. 나는 숫자, 가격, 질문 정도는 중국어로 말할 수 있고 그것보다 조금 더 많은 중국어를 알아듣기 때문에 꽤나 쉽게 돌아다닐 수 있을 줄 알았거든. 근데 전혀 아니었다! 상하이는 특유의 사투리를 쓴다는 걸 잊고 있었다. ‘오늘’, ‘안녕’과 같은 기본적인 단어부터 아예 다르게 발음하더라고… 그래서 정말 한-마디도 못알아듣겠는거다…ㅠㅠ 그 막막함이란 재작년 퀘벡시티의 불어늪 속에서 느낀 막막한 심심함과 맞먹었다. 안그래도 아프고 지쳐서 익숙하던 것들에도 데이는데, 낯선 공기와 하필 습하게 흐린 날씨는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쑤저우역에 도착하자마자 그 공간이 거대하고 어두컴컴해서 현기증이 났다. 다시 열이 나는 것 같고 의욕은 바닥을 기는데, 밤 비행기를 타고 도착하는 친구들이랑 조우하기 전 오후-저녁 시간을 최대한 괜찮게 보내면서 정신상태를 세팅해놓자-싶어 부랴부랴 짐을 유인보관소에 맡기고 핑장루로 가는 택시를 탔다. 근데 이럴수가… 도착하자마자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거다. 추운 지방은 추울 때, 흐린 지역은 흐릴 때 가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은 하지만, 문제는 기껏 챙겨온 우산을 역 보관소에 맡긴 짐가방 안에 두고 와버렸단 거였다.

그렇게 도착해서 첫 두 시간을 정처없이 걸으며 보내고나서는 어쩔 수 없이 인근의 Momo Café 로 피난을 갔다. 말이 안통하는 여자 알바생은 내가 깨진 중국어와 영어를 어설프게 섞어쓰기 시작하자 얼굴이 붉게 물들더니 후다닥 뒷방으로 뛰어갔고, 이내 남자 알바생을 질질 끌고 와 내 앞에 데려다놓더니 그 뒤에 숨었다. 정말 둥그런 갈색 안경을 쓰고 조용조용 말하던 남자 알바생을 통해 따뜻한 밀크티를 한 잔 시켜놓고 중국 지도 어플 (고덕지도)로 편의점, 슈퍼 따위를 검색해봤으나 나오는 게 없었다. 비는 그칠 기미가 안보였다. 원래 흐리고 비가 자주 오는 곳이라 그런지 길거리의 사람들은 놀라는 기색 하나없이, 걸음을 멈추지도 않고 단색의 우산들을 펼쳐들면서 무던하게 가던 길을 갔다. 밀크티가 나왔는데 더럽게 맛이 없었따. ‘이렇게 있을 순 없다!’ 우선 나가면 뭐라도 있겠지 싶어서 음료를 벌컥벌컥 단숨에 마시고 (맛없어도 온기, 수분 충전!) 다시 길을 나섰다. 흰 목도리를 히잡처럼 두르고 5분쯤 걸었나.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얼마전까지 감기 몸살을 앓았으니 이러다간 다시 아프겠다 싶어서, 막막해하면서도 Momo 카페로 도로 뛰어들어갔다. 가는 길에 보이는 옷가게와 잡화점이라곤 죄다 들러봤지만, 다들 우산은 팔지 않는다고 했다.


비 오는 핑장루에서 덤덤하게 우산을 촥 펼치곤 갈 길 가던 행인들

1층에 멍하니 섰다. 영어가 통하는 남자 알바생에게 물으니 이 근처에 우산을 파는 것이 정말 아예 없대. 옌장. 물의 도시에선 우산 따위는 너무 일상 필수템이라 팔지도 않는 건가요ㅠㅠ…


재빨리 구글 번역기를 켜고 “한 시간 동안 우산 하나만 빌릴 수 있을까요?” 라고 적어서 화면을 보여주었다. 내가 메뉴를 주문할 때부터 초지일관 부끄러워하고 거리를 두던 여 알바생은 어깨 너머로 화면을 보더니, 갑자기 남자에게 뭐라뭐라 하며 뒷방으로 가는 거였다. 그녀는 보라색 우산을 하나 들고나와 툴툴 털고는 내게 건넸다. 중국어로 내게 천천히 무어라 말했다 (어차피 못알아들었지만). 남 알바생이 “No one owns this. She says it’s yours. You don’t have to return it!” 이라고 통역해주었다. 통역이 끝나자 여알바생이 싱긋 웃었다.


셰셰, 셰셰, 거듭 감사하다고 말하며 바깥으로 나왔다. 마음이 평온했다. 우산이 없어서 받은 스트레스와 함께, 오늘 이곳에 가져온 (그리고 지난 며칠간 나를 누른) 끈적한 무기력과 억울한 우울감조차 함께 떨쳐낸 기분이었다. 이제야 오후 5시 30분. 아직 시간은 많았다. 이렇게나 빠르게 긍정적인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단 게 놀라웠다. 핑장루의 길목길목을 걸어다니고, 번화가에서 꽤나 떨어진 작은 골목들도 누볐다. 저녁 6시 무렵이 되니 사방에서 맛있는 냄새가 났다.


생각해보면, 나는 언제나 낯선 이들의 작고 순수한 호의에서 큰 위안을 받았다. 물론 이미 나를 사랑하는 가족, 친구, 애인의 애정과 걱정도 중요한 내 자산과 힘이 되지만, 나를 결정적으로 살려온 것들은 맥락에 상관없이/내가 누구인지도 잘 모르는 채로 익명의 내게 내밀어진 즉각적이고 대가 없고 순수한 존중과 도움같은 것들이었다. 그런 순간에면 나는 어떠한 모습의 나건 간에 마땅히 존엄하고 마땅히 사랑받을 수 있다고 실감하고 되새기는 동시에, 인간애, 인류에 대한 희망 따위를 가득 채움받는 것이었다. 고등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던 시절, 나를 잘 모르면서도 동기들에게 내 칭찬을 하던 친구나, 지나가면서 넌 멋진 애라고 하며 과자를 주시던 선생님, 혼자 몬트리올을 여행하던 시절 내가 낯선 남자의 미행 때문에 당황해서 다급하고 심각하게 말 거는 것을 이상한 눈길 하나없이 받아주던 지하철 역의 여자들 등 안 친한 타자들의 진심이 내게 가장 즉각적이고 가까운 위로가 되곤 했다. 이번에도 난 지난 몇 달 간 원했던 가장 완벽한 위로를 생판 모르는 타지의, 처음 만난 사람에게서 받았다. 우리는 잘 모르고, 안 친한 사람을 위해서 무엇까지 할 수 있는가.


그렇게 한 시간 반을 핑장루와 인근 골목들을 걸어다녔다. 핑장루는 너무 아름답고 고즈넉해서 자꾸만 부모님 생각이 나는 곳이었다. 어느새 내 가시돋힌 멜랑꼴리는 몽글한 차분함 정도로 바뀌었으므로, 나는 오래된 물의 도시가 주는 축축한 향수며 비 오는 평일 저녁의 한산한 외로움 등의 감각에 달갑게 푹 젖어들 수 있었다. 단기적 우울감을 드디어 떨쳐보내기 전에 필요한, 마지막 소화 시간으로 완벽했다.


12월의 몬트리올과 퀘벡을 혼자 여행할 때, 오후 3시면 해가 졌는데 새카만 저녁 7-8시까지도 걷곤 했다. 매일 눈이 20센치씩 쌓인, 하얗고도 까만 그 밤들을 혼자 몇 시간이고 걸었다. 뽀드독 밀리고 눌리는 함박눈의 소리나 속눈썹에 쌓이는 차가운 눈 입자들, 목도리 때문에 내 귀에 똑똑히 들리는 스스로의 따뜻한 숨소리 같은 것. 그 외에는 아무 소리도 없는 공간에서 한참 동안 걸으면서 1년 교환학생 기간 동안의 지독한 외로움이나 나름의 고됨에 만족스럽게 푹 젖어들곤 했었다. 몇 달 간 애매하게 느끼던 외로움의 감정이 시각적, 촉각적, 청각적으로 모두 구현되니까 오히려 그 외로움에 잔뜩 도취되었다가 며칠 만에 가벼이 승화시킬 수 있었던 것 같다. 그 후의 남은 여행 기간은 놀라운 수준의 평안함을 지니고 다녔다.그 후에는 놀라운 평안함으로 2주 간 여행을 다녔다. 분리와 고독, 완벽한 제멋대로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난 영원히 혼자하는 여행을 사랑할 거다.


나는 2016년 7월의 경복궁을 방문하고, 2018년 1월 텍사스를 여행하면서 축축한 흐린 날이 가지는 고유의 아름다움을 느꼈는데, 쑤저우는 회색빛 미학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도시였다.

나중에 우리 가족과 함께 꼭 항주, 소주 여행을 해야지.


핑장루를 보고나서 그 유명한 산탕지에를 방문했더니 너-무 그닥이었다. 딱 상업화된 명동, 인사동 느낌. 에잇 이 정도면 고독은 충분했다! 싶어서 기차를 거의 1시간 이른 8시 표로 바꾸고 상하이로 향했다. 나를 짧게나마 구원한 보라색 우산은 잘 접어서 쑤저우 기차역 정문의 기둥 옆에 세워두었다. 일기예보를 보니까 다음주도 매일매일 쑤저우에는 비가 예정되어 있었다. 나처럼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축축한 도시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게 될 모 여행객이나 물의 도시 필수템을 깜빡 오늘만 잊어먹은 현지 사람이나, 누구든 유용하게 쓰게 되길...


모모카페 알바생이 준 보라우산


갑자기 친구들이 엄청엄청 보고 싶었고, 함께 수다 떨고 싶었다. 함께 놀고 여행할 준비가 되었다.



2019.03.21







매거진의 이전글 WELCOME TO -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