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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랑의 파도 Feb 21. 2020

혁명의 얼굴

[노란독서] 조선희, <세 여자>: 식민지기의 여성 운동가를 상상하다


최근에 조선희의 <세 여자> (2017)를 집어들었다. 1장을 펼치자마자 공감이 피어올라 곧 그 안에 잠겨들었고, 순식간에 책 두 권을 모두 끝냈다.


1. 사회주의자 여성 혁명가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공산주의는 식민통치-개화기 기간 동안 국내 인텔리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핵심적인 혁명 사상 중 하나였고, 해방 직후까지도 한국 사회의 ‘-주의자’ 중 절반 이상이 사회주의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자들은 근현대 남한의 ‘한국사’에서 거의 완벽하게 지워지고, 절대적인 악, 외부적 위협 등 모호한 형태를 띤 강력한 정치적 도구로서만 거듭 재소환 되었다. 한편, 언제나 뜨거운 말과 마음을 함께 나누었어도 세계사에서 가장 캐주얼하게 지워져온 집단 중 하나가 여성들이다.


조선희는 1900년대 초입을 살았던 조선의 사회주의자 여성혁명가 셋의 삶과 성격을 연구하고 상상하여 <세 여자>에 가득 담았다. 역사에서 오랫동안 묵살당한 이 두 집단을 교차적으로 호명하고 그들이 차지했던 시공간을 다면적으로 채워내는 작업을 해냈다. 동시에 조선희 작가는 선배 여성들의 굴곡진 생애를 기록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주인공 삼은 인물들, 그들의 말과 선택을 통해 본인이 고민하고 살아낸 것들을 단단한 목소리로 펼쳐내었고, 더 나아가 방대한 고증으로 단단한 여성 서사를 구축해내어 수많은 현재의 여성들이 느끼는 허기를 달래어줄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국가와 지역을 막론하고 유독 여성이 만든 예술에서는 운 좋게 발화의 기회를 가진 여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도 전에 자신이 목격하거나 마음에 지녀온 다른 여자들, 혹은 ‘모든 여성’들의 삶을 대변하느라고 다각적인 시선, 쪼개어진 주체가 생기는 경우가 많다. 이런 현상은 부재한 내러티브를 생산하는 사람의 의무감과도 관련되어있을 것이다.


조선희의 <세 여자>도 이 계보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는 ‘사회주의자 여성 혁명가’를 그리는 과정에서 강인하고 성공적인 여성과 약하고 순응적인 여성, 최선을 다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여성을 비슷한 길이로 보여줄 뿐더러, 그들 모두에 대해 엇비슷한 연민과 애정을 지녔다는 것이 자연스레 느껴진다. 이 여자들이 살아낸 각자의 싸움이 존중받고 축복되기 때문이다. 여성 장군, 여성 정치인, 인정받는 혁명가, 성공적인 엄마, 교육받은 지식인이며, 원할 때마다 남자 애인을 갈아치우는 허정숙을 보면서 이 시대의 여성들이 속 시원한 통쾌함을 느낄 수 있다면, 타고난 미모 때문에 원치 않아도 다양한 남자와 얽히고, 남자 때문에 유배를 가 자식과 격리가 되고, 대학 교육과 훈련을 받았음에도 같은 혁명가인 남편과의 개인적인 관계 속에서는 당연하단 듯 보조적인 역할, 집안일을 전담하는 존재가 되어버리는 주세죽의 삶과 회의감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전투를 간접 경험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여성들이 모두 각기 다른 무게감의 현실을 살아내고 있음이 느껴진다. 내가 주세죽의 분투와 그녀만의 일상적인 싸움들에 특별히 주목하고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의 이야기를 풀어낸 저자 본인이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다 키워낸 중장년 여성이기 때문이라고 느꼈다. 젊고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이 선도하고 있는 현재 한국의 페미니즘에 이렇게 다양한 경험과 목소리와 상상들이 더더욱 필요할 것이다.


<세 여자>는 다른 시대의 진보적인 세 여자, 그리고 그 여자들을 둘러싼 여자들과 남자들을 두루 보여줌으로써 현 페미니즘의 논의와 역사성을 뒷받침하고 보완하지만 분명 그보다 더 나아간다. 책에 담긴 다양한 삶의 궤적과 다양한 영역의 개인적 투쟁들을 보다보면 독자들은 자연히 기존의 혈혈단신 혁명의 이미지, 마초 파벌 정치 등의 사회적인 영역에 여성이나 다른 소수자를 진입시키는 것이 해답이 아니라, 혁명과 정치의 모습, 정의, 범위 자체를 새로이 구축해야하는 것의 필요성을 자연스럽게 실감하게 된다.




2. 비장함과 비웃음

비장할 권리,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힘이란 누구에게 있는지에 대해 고민한다. 남자끼리의 동성연애는 혐오자들에 의해 역겹게 받아들여질지언정 그런 혐오 세력에 의해 진지하고 ‘큰일 난’ 것으로라도 여겨진다는 것을 염두에 두자. 그러나 여자끼리 연애를 하면 시간 지나면 사라지는 것, 어느 정도 수위를 넘을 수 없는 것으로 가벼이 받아들여지는 것부터 시작해, 공공장소에선 때때로 수많은 남성들의 관찰 대상, 그들이 보는 레즈 포르노와 환상의 실현 따위로 전락해버리고는 한다. 게이와 레즈비언이 겪는 차별의 강도를 비교하자는 것이 아니다. 레즈비언들의 연애가 소비되는 방식은 내 삶의 가장 중심적인 영역들에서마저도 도무지 진지하고 무게감 있게 받아들여질 수가 없는 여자들의 숙명적인 비애를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그로 인한 평생 동안의 분노를 상상할 수 있게하는 사례다.


2017년부터 래디컬 페미들이 행해온 탈코르셋. 그것에 온전히 동의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얼마나 비장하고 결연한 행동인지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공감한다. 우리 또래 여자들이 머리카락을 숭덩숭덩 잘라낸 것은, 예상보다 몇 센티미터만 머리가 더 잘리면 “아까워 죽겠다”고 징징대며 하루종일 머리를 매만지고도 창피해서 밖에 나갈 수가 없다며 절망하던 우리들의 과거, 그리고 그 절망을 가져다준 사회의 보이지 않는 속박으로부터 뛰쳐나오겠다는 직관적 선언이다. 도무지 속옷이나 웃옷으로 가릴 수 없는, 항상 노출되는 몸의 부위로 나의 전투를 선언하는 것보다 더 강렬한 항거의 표지가 또 언제 있었나? 그럼에 당장의 ‘내 몸과 삶의 주인권’을 외치는 탈코르셋 운동의 비장함은 전통과 가문을 이유로 상투 자르지마라고 항거하던 조선 후기 양반 남정네들의 단발령 대항 시위에 비해 인정받지 못하고있고, 그 규모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역사나 정치 교과서에 남겨지긴 할지 의문스럽다. 조선희 작가는 무려 탈코르셋 운동 직전에 출판된 이 책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멋진 몇 줄로 정리하였다:

“근대 여자들의 단발은 과연 핫이슈였다. (...) 남자들이 상투를 자를 때 그것은 봉건왕조와의 인연을 자르는 일이었지만 지금 여자들이 쪽찐 머리를 풀어 자르는 것은 ‘나, 독립된 인격체요’ 하는 1인시위였다” (13).


재밌는 것은, ‘그들’이 우리를 무시하듯이, ‘우리’가 볼 때도 그들만의 비장함과 그 동기는 정말 웃기고 우습다는 것이다. 그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이 아니라고 진지하고 ‘중립적으로’ 말하는 남학생과 마주했을 때, 백인의 짐의 현현인 어벤저스의 캡틴 아메리카가 21세기 세계를 잠재적인 외계의 위협으로부터 구하겠노라고 다짐하며 다부진 어깨를 탁 펼 때, 혹은 하나님의 나라를 지키겠다며 퀴어와 무슬림에 맞선 결연한 궁서체의 플랜카드를 들고 선 보수 기독교인들을 볼 때… 다양한 당신들만의 비장함 앞에서 이전에는 숨막히는 분노를 느꼈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는 분노와 함께 섞여나오는 비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억지스럽고 단순한 비장함에 어느덧 먼발치에 서서 작은 콩트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인간을 존중해야 마땅한데 때때로 이렇게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 내 인간관계는 넓어지지를 못하고 있다. 쩝.


긴 서론을 뒤로 하고, 내가 이 책을 사랑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쉬이 이야기되지 않는 ‘우리’ 시선에서의 우스움과 하찮음들을 조선희 작가가 적재적소에서 포착하기 때문이었다.


“저 남자는 뭘 해도 저렇게 맹렬하구나, 정숙은 부럽기도 하고 질리기도 했다.” (40)
“정숙은 남편이 그렇게 화내는 것을 처음 보았다. 얼굴과 점퍼가 구분할 수 없을 지경으로 벌겋게 된 꼴에 그 심각한 상황에서도 정숙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127)
“남자들 끼리끼리 하는 혁명 말이죠? 나는 가부장 의식으로 머릿속이 꽉 들어찬 남자들이 계급해방이니 민족해방이니 하는 말들 안 믿어요.” (147)


허정숙이 아내 주세죽은 부엌에 처넣고선 여성해방과 혁명을 이야기하는 박헌영을 비웃거나 다른 혁명가 남성들의 목숨을 건 파벌 싸움을 비웃을 때마다 나는 도무지 터져나오는 웃음과 시원함을 참을 수가 없어서 혼자 침대를 굴러다니며 매트를 팡팡 칠 지경이었다. 그녀가 비웃는 타이밍과 온도, 그리고 이유는 정말이지 내 것이었고 여성 문제와 정치를 고민하는 내 모든 친구들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형태가 다를 뿐이지 분명히 우리도 전투를 하고 비장한 의지를 되새기곤 한다. <세 여자>는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종류의 비장함과 벅참으로 가득한 책이었다. “모든 것을 만져보고 모든 것이 되어보고 싶고 모든 언어로 말해보고 싶은” 20대 여성들이 큰 꿈을 좇는 과정에서 자꾸만 일상의 무시와 위협에 부딪힌다. 걸림돌 앞에서 ‘나는 너에게 무시당하지 않겠다. 나는 살아남겠다. 나는 원하는 대로 살아내고야 말겠다. 나는 네놈의 코를 누르겠다.’ 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다짐하고, 되새기고, 계산하고, 곤두서고, 자기검열하고, 확신하기를 반복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내 경험 그 자체였을 뿐 아니라, 약자라면 누구나 현재를 버텨내면서 존엄하고 나다운 삶을 꾸리기 위해 병행하는 일상적인 생각과 고민들이었다. 미시적 전투와 거시적 이상향을 모두 갖춘, 그 누구도 해치지 않으면서 모두의 삶과 살에 맞닿아있는 ‘우리들의 전쟁’ 앞에서 나는 그 비장함에 공감하고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때로 사회주의자임에도 비싼 음악장비를 구매하거나 비싼 공연에 가는 세 여자의 모순적인 모습 그리고 그들의 뒤늦은 자책을 보면서 인간적인 공감과 개인적인 반성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다 늙은 박헌영이 주세죽은 버리고 젊고 아름다운 비서와 결혼할 때, 늙은 사회주의자 최창익 또한 손녀 뻘의 젊고 아름다운 부잣집 여성과 재혼할 때, 그리고 그럼에도 ‘흠결이 없는 정치인’으로서 사회에서 찬양받을 때, 그런 순간에 느낀 처참한 배신감과 우스움을 허정숙, 주세죽, 고명자의 소설 속 모습이나 그 주변 여성 혁명가들을 둘러싼 고증에서는 느낄 수 없었다. 몸과 마음에 영원히 얹히는 어떠한 불편한 짐들은 우리가 부유하지 않고 단단히 뿌리내리게끔 도와준다고 되새겼다. 약자들의 기록을 발굴하고 여성의 경험을 더 적는다는 것은 이렇게 일상적 감각의 지평을 넓히고, 숭고하게 여겨지는 관계나 감정들을 재정의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



3. 역사와 고전에 대한 희망

우리 세대가 전반적으로 이전 세대들에 비해 역사나 고전에 대한 열망을 덜 지녔다는 평가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 외면이 정보화와 기술의 시대에 따른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계보와 뿌리에 대한 욕망을 지니고 있다. 누구나 나의 삶과 나의 생각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낯설고 괴이한 것이 아니라 다른 시공간, 다른 맥락을 사는 사람에게도 공감 받고, 누군가에 의해 고민되고, 마땅히 진지하게 여겨질 수 있는 것임을 확인받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를 통해 불안한 현재와 자아를 정당화하기도 하고 감내하기도 하면서 살아간다.


지금 우리나라가 지닌 보수적이고 단편적인 역사관에서 벗어나 좀 더 진보적이고 현재에 걸맞는 사관을 도입해야 한다. 다양한 경험과 공감을 아우를 수 있는 연구, 주제, 기록들이 등장하고, <세 여자>를 읽고 내가 공감했듯 다양한 사람들이 역사와 고전이 ‘자신의’ 이야기라고 공감할 수 있게 된다면 역사는 필연적으로 살아남고 개인의 삶과 사회의 중요한 영역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이전 여성들의 이름, , 꿈을 이토록 갈망하는  다른 이유는 현재를 사는 우리의 이야기 또한 어딘가에는, 누군가에게는 이렇게 중요하고 무게감 있게 남겨졌으면 하기 때문일 거다. 허정숙, 주세죽, 고명자의 이름을 듣고, 친구들과 함께  이름들을 자꾸만 말해보고, 그들이 걸었던 서울의 공간을 똑같이 거닐며 당시의 웃음과 말과 비장함과 절망 등을 상상하고  것처럼 느껴보는 것은 정말 벅찬 경험이었다.  포부와 재치, 사랑을 안고서  막히는 매일을 이겨내는 모두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20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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