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이 없는 질문을 고민하는 대신, 내가 직접 해내 보이기로 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글쓰기를 좋아했다. 관대한 어른들의 '문장력이 좋다'거나, '언어에 소질이 있다' 같은 후한 칭찬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퍽 좋았다. 피그말리온 효과일까? 나는 자연스럽게 문과로 진학했고, 성적표에 찍힌 국어/수학/영어 점수의 날카로운 V 라인은 매번 그게 탁월한 선택이었음을 증명했다. '4년 간의 사회과학 레포트 쓰기'로 축약할 수 있는 대학 생활을 마치고 선택한 첫 밥벌이까지도 사회에 대한 글을 쓰는 일이었으니, 이정도면 뼈문과생이라고 하기에 충분할 테다.
그리고, 지금 나는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 빅데이터, IoT, 블록체인, NTF, 어쩌고 저쩌고... 이제 너무 숱하게 들어서 누구나 아는 것 같지만 사실 이들 개념이 정확히 뭔지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떤 직업은 몇 년 안에 사라진다, 또 어떤 직업은 이제 기계가 대체할 거라는 흉흉한 예언은 싱숭생숭하기 짝이 없다. 곧 닥쳐올 변화에 대비하라 하는데, 그래서 뭘 어째야 하는지는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예전엔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요즘 세상은 십 년은커녕 오 년도 안 돼 변하는 것 같다. 그렇잖아도 혼란스러운 이 시대는 나를 비롯한 90년대생에게는 특히 혼란스럽다. 아날로그 세상에서 태어나 살아왔건만, 남은 평생을 급변하는 디지털 세상에서 디지털 네이티브와 경쟁해 살아남아야 하니 혼란 제곱이랄까.
혼란 제곱은 취준생 신분이 되자 무한대로 발산했다. 학생 때 나는 공부를 했다. 어른들이 늘 '학생의 본분은 공부'라고 했고, 사실 공부가 적성에 맞았다. 가장 성실한 학생은 아니었지만 늘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으니 간단히 말해 나는 모범생이었다. 그런데 학교를 나와 취업 시장에 내던져지자 세상이 뒤집혔다. 내가 여태 공부해온 지식은 이 시장에선 아무짝에 쓸모없는 것이었고, 갑자기 스펙이니, 직무니, 역량이니 하는 것들이 중요하단다. 마치 시험에서 배운 적 없는 문제를 마주한 것처럼 황당했다. '문송하다'는 서글픈 말은 문과생, 그것도 비상경계 문과생에게 꼭 맞았다. '상경계열 전공', 이 여섯 글자는 그렇잖아도 좁은 문과 취업 문을 두드려 보지도 못하고 돌아서게 했다. 물론 혼란스러운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유명 기업의 '인재상' 틀에 자신을 욱여넣으려 허둥대거나, 깊은 고민 없이 안정성과 칼퇴라는 신기루를 쫓아 공무원 시험에 매달렸다. 이런 현실이 끔찍하게도 싫었던 나는 해외 인턴이라는 동앗줄을 꼭 붙잡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렇게 해외에서 생애 첫 인턴 근무를 시작했다. 대형 언론사의 해외 지사에서 인턴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위치가 미국이란 것도 매력적이었지만 뭣보다 글쓰는 일이라서 좋았다. 생각보다 소박한 사무실을 보고 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정말 좋은 어른이자 좋은 선배님들을 만난 덕분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인생은 언제나처럼 내 삶이 순탄해지는 걸 가만 두지 않았다. 혈혈단신으로 이역만리 타국까지 붙잡고 온 동앗줄이 사실은 썩은 동앗줄이었던 것이다. 근무를 시작한 지 오래지 않아, 회사는 재정악화로 인한 구조조정에 내가 근무하던 지사가 포함됐음을 통보해왔다. 그러니까, 나는 다소 어린 나이 26살에, 해외에서, 정리해고를 당했다. 지사가 문을 닫는다는 건 곧 내가 당장 실업자가 된다는 것과 동시에 앞으로 이 나라에 체류할 수 있는지조차 불투명함을 의미했다. 구태여 서술하지는 않겠지만 그때 내가 겪은 고통과 고민과 고뇌는 말로 다 하기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고통스러운 시간 끝에 회사가 내게 꽤 후한 보상과 함께 국내 본사 인턴십을 제안해왔다. 당시 근무하던 여러 명의 인턴 중 내게만 주어진 기회라고 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선배님들께서 좋게 봐주신 덕이라고 생각해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 길로 귀국해 본사 근무를 시작했다. 시작은 참 좋았다.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아는 대기업이라 그런지 건물부터 역시 본사는 다르구나 싶게 좋았고,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대기업의 출입증을 목에 거니 어른이 된 것 같아 괜히 어깨가 으쓱했다. 일도 적성에 제법 잘 맞아서, 데스크의 칭찬을 받거나 좋은 성과를 냈을 땐 정말 뿌듯했다.
하지만 역시나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그리 오래지 않아 이 길이 내 길이 아니란 확신이 들었다.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뭣보다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내부에서 보는 전망은 밖에서 보기보다 어두웠고, 그건 개별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산업의 문제였다. 손가락 몇 번 까딱하면 공짜로 뉴스를 볼 수 있는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최전선인 신문사가 설 자리가 넓을 리 없었다. 업계에선 너도나도 '디지털 혁신'을 외쳤지만 애초에 그게 가능했다면 그런 말은 진작 없어졌을 터였다. 인턴들에게 늘 농담 반, 진담 반 "기자 하지 마라"시던, 내 나이보다 더 긴 시간동안 자부심과 사명감을 갖고 이 일을 해오신 선배님의 말씀도 뇌리에 남았다.
"우린 이제 거의 네이버 하청 업체 격이야.
너흰 지금 여기 오려고 애쓸 게 아니라 네이버에 가려고 해야 돼."
2020-02-02
두 번의 인턴을 경험한 그 일이 내 길이었다면 좋았겠지만, 직접 경험해본 덕분에 맞지 않는 길임을 알게 됐으니 그래도 다행이었다. 인턴 생활의 끝이 다가올수록 스트레스는 더 커졌다. 이게 끝나면 이제 나는 뭘 해야하지? 종일 근무 후 2호선 지옥철 퇴근을 견딘 몸보다 정신이 더 지쳤다. 취업 선배인 친구들은 내게 적성이니, 자아실현이니 따지기보다 되도록 많은 곳에 지원해서 붙은 데에 가는 거라고 조언했다. 다들 그렇게 취업하는 거라고 했다. 그게 사실이래도, 다들 그런대도 난 그러기 싫었다. 그렇다고 내가 진정 하고 싶은 일이 뭔지도 알 수 없었다. 무기력함과 우울함에 잠식됐고 건강도 엉망이 돼 물만 마셔도 탈이 났다. 보다 못한 엄마가 사설 커리어 코칭, 쉬운 말로 진로상담을 받아보자고 권유해주셨다. 부정적이었던 예상과는 180도 다르게 크게 도움이 됐다. 상담 덕분에 나도 인지하지 못하던 내 욕구, 가치관, 꿈을 알게 됐고, 안개처럼 뿌옇게 흩어져있던 머리 속 생각들이 명확하게 정리됐다. 뭣보다 여태 닿을 수 없는 먼 별처럼 느껴지던 분야도 다르게 볼 수 있게 됐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분 중 진로 고민으로 고생하는 분들이 있다면 커리어 코칭을 적극 추천드린다.)
인턴 생활이 끝난 후 고민과 번뇌의 백수 생활이 시작됐다. 첫 달은 정말 좋았다. 한창 일하고 있을 시간인 대낮에 여유롭게 길을 걸으면 괜히 기분이 좋았고 꼭 휴가 받은 기분이었다. 둘째 달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흔히 백수 생활은 좋을 거라고들 생각하는데, 좋은 건 길어야 두 달이다. 이건 해 본 사람만 안다. 나는 이 시기를 이상의 수필 <권태>를 살았던 시기라고 부른다. <권태>를 살아내는 동안, 사람이 정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꼭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규칙적인 일과, 사회적 교류, 그리고 성취. 백수 생활은 이 셋 모두가 결여되기 쉽다. 성취욕이 큰 내게는 더 힘들었다. 일하는 삶이 간절했으나 도무지 내게 맞는 일이 뭔지 알 수가 없어 괴로웠다. 그래도 전보다 나아진 것은, 이전에는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로만 고민했지만 이번엔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 내 길을 찾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단 것이다. 취업에 유리한 일부터, 바닥부터 시작해야 하지만 내게 맞을 것 같은 일, 대학원 진학까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또 시도했다. 이 기간동안 도전해본 길이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해도 7개는 되니 결코 편안한 백수 생활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결국 모두 내 길이 아니었다.
이것저것 시도해보는 동안에도 사실 늘 마음 한 켠에는 프로그래밍이 있었다. 사실 수년 전부터 고민해온 일이었다. 다만 평생을 뼈문과생으로 살아온 내게 프로그래밍은 남의 세상 이야기 같았고, 다시 태어나야만 할 수 있는 일 같았다. 그래서 프로그래밍 대신 연관된 다른 일들에 도전했지만, 결국 늘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렇게 되돌아올 때마다 답은 프로그래밍이라는 생각이 점점 강해졌다. 한번은 마음 먹고 모 컴퓨터 학원에 상담을 받으러 가본 적이 있었다. 여전히 프로그래밍은 내가 할 수 없는 일 같아 대신 퍼블리싱 과정을 들어볼까 하던 차였다. 2월부터 7월까지 진행되는 전일제 과정이라는 말에 뒤돌아 나왔다. 5개월이란 길다면 긴 시간을 오직 이 과정에만 몰두할 만큼 확신이 없었다. 그렇게 다시 고민과 번뇌를 반복하는 일상을 살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9월이었다. 고민할 시간에 도전했다면 이미 진작 수료하고 취업까지 했을 터였다. 충격은 결심의 계기가 됐다. 그간 찾아본 프로그래밍 관련 서적과 온라인 자료도 마음을 먹는 데에 큰 도움이 됐다. 일단 결심을 하니 실행은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6개월 간의 국비지원 웹 프로그래밍 과정을 시작했다. 배경지식이 전혀 없어서 우리말로 치면 기역, 니은 수준인 String, Integer, Boolean 같은 자료형조차 낯설었다. 생전 처음 접하는 분야를 단기 속성으로 공부하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공부를 할수록 드디어 내게 맞는 일을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 개발자가 없던 나는 정보를 구하려 온라인 커뮤니티를 접하기 시작했는데, 이미 나와 비슷한 이유로 유입된 수많은 비전공자들이 조언을 구하고 있었다. 댓글에 자주 보이는 "개발은 머리가 타고 나야 한다", "개발은 적성을 많이 타서 전공자들도 전공을 살리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같은 말은 그렇잖아도 불안한 마음을 더 위축시켰다. 나와 같은 마음으로 쓴 "비전공자인데 개발자가 될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에 말리는 반응이 많아 더욱 그랬다. 나는 이 답이 없는 질문을 고민하는 대신, 직접 해내 보이기로 했다. 그때로부터 약 2년이 지난 지금, 나는 아주 만족스럽게 개발자로 살고 있다.
이 글을 쓰는 건 내가 대단한 능력을 가졌다거나, 천재 개발자라서가 아니다. 아직 배울 것이 더 많은 주니어 개발자이지만, 과거의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글을 쓰기로 했다. 앞으로 이 매거진에는 한때 같은 고민을 했던 사람으로서 직접 도전해본 경험과, 개발자로 일하며 깨달은 점을 공유할 예정이다.
2020-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