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의 왕적인 위엄에 대하여
권교정과 <권교정 단편집>
더이상 종이만화로 연재하는 작가는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바야흐로 웹툰의 시대다. 비록 매체는 바뀌었지만 만화의 본질은 어디 가지 않는다. 작가가 보고 들은 세계관, 애써 고민한 만큼의 다듬어진 인물과 세계가 작품에 녹아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작가 권교정은 따스하고 깊은 여운을 남기는 세계를 그려내는, 한국 순정만화계에 독특한 입지를 지닌 작가 중 한명이다.
유년기와 사춘기에 나는 만화/비디오대여점을 수시로 들락거렸다. 나에게는 만화와 영화가 곧 종합예술이자 오락거리였다. 그러다 더 이상 읽을 게 없어 우연처럼 발견하게 된 것이 권교정의 <붕우>라는 단편집이었다. 그 후로 누가 내 취향의 작가를 묻는다면 나는 주저없이 권교정이라 말하게 되었다. 오죽하면 당시 이메일 계정을 처음으로 만들었을 때, 아이디를 gyopan(원래 fan이지만 당시에는 그 스펠링 조차 헷갈릴 정도로 어렸었다)이라고 붙였겠는가.
권교정은 홍익대학교 수학교육과 출신의 작가이다. 그가 데뷔한 당시 국내 순정만화계에는 천편일률적인 연애물 외의 작품은 드물었다. 그러나 그는 <헬무트>라는 판타지 세계관,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라는 SF 세계관을 배경으로, 입체적이며 매력적인 인물 설정, 섬세한 심리묘사, 그리고 휴머니즘적 메시지로 매니아 층을 양산했다. 대중에게는 정작 <어색해도 괜찮아>, <정말로 진짜!> 등의 학원물로 알려져 있다. 후기만화가 더 재미있다는 평을 듣기도 하고, 원고를 내는 족족 출판사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망하여 미완된 작품이 상당수인 불운의 작가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2011년 이후로 아직까지도 암으로 투병생활 중이다.
권교정 작가의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 역시 미완이다.그렇다면 왜 나는 권교정을 사랑하는가? 그 이유는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된다.
1. 휴머니즘
내가 그녀의 작품을 사랑하게 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 권교정 작품의 인물들은 선인과 악인으로 명백히 구분되지 않아, 독자로 하여금 그 누구도 쉽사리 미워하고 판단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의 단편 <후크>의 후기에서, 권교정은 원작소설에 등장하는 후크의 심술궂음과 외로움 등의 매력에 감탄하며 매력을 느낀다. 여기서 권교정이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단편적이거나 이분법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단편 <후크>에 등장하는 인물들2. 우정
그리고 그의 단편을 통과하는 메시지는 사랑이 아닌 우정이다. 스포일러가 될까봐 자세히 밝히지는 못하겠지만, 이번 <권교정 단편집>에서도 단편마다 가슴을 찡하게 하는 우정의 메시지가 있다. 이는 성인과 아이, 아내와 남편, 그리고 친구관계를 가리지 않고 등장한다.
물론, 큰 범주에서 생각하자면 우정 역시 사랑의 일환이다. C.S.루이스의 <네 가지 사랑>을 참고하자면, 사랑은 에로스에 가까운데, 지금의 시대상에서는 성적욕구와 크게 분리되지 않는다. 또한 일대일의 관계에 집중되지 않으면 질투를 일으키거나 쉽게 우상화될 수 있다. 반면, 우정은 욕정이나 감정, 소유욕에 기반하지 않으며 다수의 사람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지적이고 영적인 것이다. 루이스는 우정을 "왕적인 위엄"이라고까지 지칭한 바 있다.
C.S. 루이스의 <네가지 사랑>의 일부. 출처: twitter ID: hope21363. 후기만화
서두에 밝혔다시피 권교정은 후기만화가 재밌다고 정평이 나있다. 오늘날의 생활툰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권교정은 일을 하지 않고 미루고 자료집만 쌓아놓기도 하고, 키우는 새가 자신을 괴롭히는 소소한 이야기들을 펼친다. 그리하여 소소한 일상을 살아가는 나같은 이에게도 공감을 일으킨다.
스스로를 '킹교'라고 칭한다.모처럼 글이 써지지 않는 어려움을 뒤로 하고 권교정의 만화를 꺼내들고, 그와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이유를 적으며 마음이 편안해졌다. 단편집은 글이 막힐 때마다 하나씩 아껴서 읽을 예정이다.
웹툰계에도 권교정과 같이 사람냄새나는 작가들이 더욱 많이 등장하길 소망하며 글을 마친다.
참고: 권교정 작가 홈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