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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B Aug 14. 2019

페미니즘 넘어서기

페미니즘 용어변경을 주장한다

오늘날 한국사회 담론장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 중 하나는 페미니즘이다. 페미니즘 담론의 근간은 '젠더' 개념으로부터 비롯된다. 즉, 몸이 지시하는 생물학적 성(sex)이 아닌, 사회적으로 구성된 성(gender)의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그렇기에 man/woman이 아닌, male/female이라는 단어가 선호된다. 또한,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스스로 결정된 성별 정체성, 성적지향, 성적취향이 인정되고 받아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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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이 논란을 일으키는 본질은 결국 여성의 범주를 어디까지로 볼 것인가의 문제에 달려있다. 현재 한국사회의 페미니즘 담론에서도 MTF(Male to Female의 약자로, 여성으로 성전환한 남성을 의미)를 여성의 범주로 포함시킬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를 두고 편이 갈려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고 있다.


여성의 범주는 성을 '몸의 성'으로 볼 것인가, '정체성의 성'으로 볼 것인가에 따라 다르다. 몸의 성은 앞서 말한 섹스일 것이며, 정체성의 성은 젠더에 가까울 것이다. 단순히 몸의 성으로 구분하자면 크게는 여성과 남성의 몸으로 구분되는데, 이때 여성은 성기의 형태에 따라 구분되는 실체다. 그러나 정체성의 성에 따르면 여성의 범주는 확대될 뿐 아니라 성은 여러 갈래로 구분되며 확장 및 변화 가능하다.  


우리는 먼저 몸의 성과 정체성의 성을 이분화하려는 시도 자체에 문제가 있지 않는지 고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다음에서 섹스와 젠더에 대해 각기 다른 학자들의 주장을 설명하고 비교해보고자 한다.


1. 보부아르: 섹스와 젠더의 이분화

제2세대 여성주의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는 '여성이 된다는 것은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젠더 개념을 도입했다. 그러나 여전히 여성되기를 결정짓는 중요한 조건을 여성의 몸으로 보았다. 즉 젠더의 토대는 여전히 몸이었다.


2. 버틀러: 섹스의 젠더화

주디스 버틀러는 여성과 남성으로 이분화된 양성체계를 비판하고, 여성이라는 범주적 정의는 그 안에 존재하는 다양성을 억압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버틀러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젠더와 생물학으로 규정된 몸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한다는 것에 의문을 제기한다. 젠더가 섹스를, 섹스가 젠더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며, '섹스는 이미 젠더'라는 것이다. 사회문화적 구성 이전의 자연적인 몸은 허구라는 의미다. 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며, 몸을 물질성으로 보고 결국 몸 역시 담론과 역사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몸의 물질적 현실 역시 언어 및 담론의 결과물에 불과하다.


3. 볼프: 섹스와 젠더의 구분과 연결

미로슬라브 볼프는 섹스와 젠더의 구별을 폐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성으로 구별되는 몸(섹스)'이 지닌 구체성을 근거로 삼아 남성과 여성의 '성 정체성(젠더)'이 구성된다고 주장한다(이때 몸에 남성과 여성의 표지가 공존하는 경우는 규칙에 벗어나는 예외의 경우로 본다). '성으로 구별되는 몸'의 안정성은 젠더의 유동성을 제한하는 동시에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성으로 구별되는 몸'은 성 정체성에 제한을 가한다.  집단은 신체적 지시 대상이 존재해야만 스스로 그 본질을 재창조할 수 있다. 여성의 몸이라는 신체적 지시 대상이 존재했기에 페미니즘이 시작되었듯, 만일 그 신체적 지시 대상을 부정한다면 여성이라는 집단은 소멸의 위협에 항상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이 그들의 성 정체성이 변하는 중에도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원성 속에 존재하는 것은 '성으로 구별되는 그들의 몸' 때문이다. 다시 말해, 몸은 젠더의 구성에 관해 중립적이거나 수동적이지 않다. 예를 들어, 남자가 소위 "여성적"인 경우가 가능하긴 하지만, 여성의 몸이 살아내는 여성성과 남성의 몸이 살아내는 여성성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Moira Gatens 1996, Imaginary Bodies, p. 9 참조).


둘째, 그러나 '성으로 구별되는 몸'은 성 정체성의 유동성을 가능케 한다. 즉, '성으로 구별되는 몸'은 남성성과 여성성의 근거는 될 수 있지만 그 내용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여성의 가슴이 모성성을 곧바로 신화화하는 근거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남성과 여성(몸)은 언제나 존재할 것이지만, 그들의 성 정체성에는 아무런 본질도 없고 변하지 않는 여성성과 남성성(성 정체성)도 없다. 남성과 여성은 그들의 몸에 기초한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원성 속에 존재함과 동시에, 성으로 구별되는 몸을 지닌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상호작용에 의해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담론을 섹스에서 젠더로 치환하는 것에는 성공했을지 모르나, 버젓이 몸의 성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도피할 수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페미니즘은 몸의 성을 가시화하여 여성은 남성과 구별되는 존재로, 남성중심적 사회에서의 피해자임을 드러내 질서의 역전을 시도한다. 동시에 정체성의 성에 따라 여성과 남성의 구별을 폐기해야 할 뿐 아니라 인간은 어떤 젠더든 선택 가능하며 선택 가능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이중의 성취를 취하고자 하니, 페미니즘은 필연적으로 내홍을 겪게 될 수밖에 없다. 일찍이 이 모순이 논란의 핵심임을 알았던 버틀러는 그래서 '섹스를 젠더화한다'는 식의 언어유희(?)로 초월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버틀러의 주장은 일종의 사변에 머물러 있을 뿐이며, 몸의 성과 정체성의 성이 구별되면서도 연결되는 현실을 충분히 설명해내지 못하고 있다.


현대 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 역시 섹스와 젠더 구분이야말로 현재 페미니즘 논란의 핵심이라 설명한다. 그리하여 섹스와 젠더, 성으로 구별되는 몸과 성 정체성이 구별되지만 연결되어 있음을 보인다. 나는 그의 주장이 가장 현실적인 설명이 아닐까 짐작한다. 따라서 성을 논할 때 섹스와 젠더의 한 편에서만 담론을 전개하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고 본다.


우리는 몸의 성과 정체성의 성 중에서 어느 한 편을 택일할 수 없다. 애초에 육체와 정신이 다르지만 연결되어 있기에 그러하다. 다소 조악하나 이해를 돕기 위해 예시를 들자면, 육체적 사랑인 에로스나 정신적 사랑인 플라토닉 러브 중 어느 한쪽에 치우치면 불균형을 낳지 않던가. 진정 사랑의 본질은 육체와 정신의 합일에서 찾을 수 있다. 몸의 성과 정체성의 성을 개념화하여 구분해 설명할 수 있으면서도, 둘은 연결되어 있어 함께 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위에서 도출한 결론으로부터 나는 페미니즘의 용어 변경을 주장하고자 한다. 페미니즘은 젠더에 기반한 용어다. 따라서 그 용어부터 변경하지 않으면 내재적 모순을 극복하지 못할 뿐 아니라, 운동의 성공을 위해 필요 불가결한 대중화의 문턱을 넘지 못할 것이다. 언어와 사고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그 누구보다도 민감한 페미니즘계라면 더더욱이 이를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페미니즘이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 단순히 남성보다 우월하자는, 유치한 올라서기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래서 몸의 성이든 정체성의 성이든, 이분화로 인해 발생한 모순이든 간에 관계없이 게임의 승자가 되고자 우긴다면, 페미니즘은 고립을 자처하고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근래 페미니즘은 내부에서 편을 갈라 목소리를 모으지 못하고, 폭력과 혐오의 미러링으로 상대를 경멸하는 것이 당연시 되는데도 도무지 스스로를 비판해내질 못하고 있다. 정경으로 채택되기 위해서라면 방법쯤이야 관련 없다는 듯이. 이러한 전체주의적 방식으로는 반짝 역사의 승자 자리를 차지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결국에는 영원히 뒤안길로 사라질 수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담론장에서는 어떤 담론도 반박 불가한 절대자로 남을 수 없으며, 오히려 승패에 집착하기보다 대화와 공존의 여지를 남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나는 애초의 페미니즘의 의도가 인간이자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자유를 동등하게 누리자는 취지이며, 우열과 억압의 질서를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공생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임을 안다. 그렇다면야 더더욱 승자와 패자를 가리는 '남성중심적'인 기존의 전투의 장에서 벗어나, 새로운 언어의 장으로 옮겨 활약해야 할 것이 아닌가. 새로운 시대의 새담론이라면 새로운 판을 짜는 혁신 정도는 보여줘야 할 것 아닌가. 그리하여 반복되는 상대의 성 혐오와 비난을 넘어서, 사회 구성원들을 설득하여 진일보한 사회로 이끌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러려면 먼저, female 외의 여타 성들을 비가시화하는 페미니즘의 용어부터 재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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