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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B Nov 25. 2018

약함의 인정

가시나무의 노래에서, 보배를 담은 질그릇의 노래로

오늘날 약함은 부끄러움이고, 수치가 된다. 반면, 돈이나 힘, 권력은 곧 강함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약자를 보듬어야 한다는 윤리에 대해 모르지 않으면서도 약자를 배제하기 쉽다. 약함은 아름답지 않고, 나는 저 약자처럼 되고 싶지 않다, 는 생각 때문이다. 오늘날 손에 꼽히는 사상가인 니체 역시 약자를 경멸했다. 약자가 자신의 무능을 선으로 포장한다며, 약자의 언어 뒤에 숨겨진 자기기만을 폭로했던 것이다. 신학자 본 회퍼 역시 약함을 내세우는 것에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았다. 소위 종교적인 사람들이 자신의 한계, 즉 약함을 인지했을 때, 자신을 도울 수 있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서만 하나님을 찾는 것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모든 사람은 자신의 약함이 드러나길 두려워하면서도, 그것이 받아들여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나는 사실 이런 모습이야, 이런 추악한 모습이 있어, 그래도 나를 사랑해줄 수 있겠니. 나를 떠나지 않을거니. 사랑을 달라며 갈구하는 목소리(persona)가 가득 채워져 있는 사람 속에는, 이상하게도 타자를 받아들일 공간은 턱없이 비좁게 된다. 노래 가시나무의 가사는 이런 자신에 대한 한탄의 시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약함의 부정은 풍요의 반증이다

내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는, 내외적으로 불안했던 사춘기 때였다. '약할 때 강함 되신' 하나님을 만나, 나는 매일매일을 노래와 감사, 기쁨으로 채워갔다. 하나님은 그런 나의 제사를 기쁘게 받아주셨다.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오히려 경험도 지식도, 사회적 지위나 재물도 풍부하다. 그러나 정작 내 안의 하나님은 빈곤에 처해 계시다. 나에겐 그가 쉴 곳이 없다. 내가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강함을 긍정하는 시대의 풍조 속에서, 나 역시 나 자신의 약함에 대해서 관용하지 않게 된 것이다. 불안하거나, 게으르거나, 자신감 없는 나의 모습은 내가 보기에도 볼품이 없다. 따라서 공적으로는 어떻게든 완벽주의를 추구하고 연약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쓴다. 그러나 연약하려 하지 않는 나 자신이야말로 연약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의 약함에 대한 부정은 오히려 자아의 풍요를 반증한다.


질그릇의 연약함, 그 속의 보배

바울은 "그(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빌 3:8)고자 함임을 고백했다. 버려야 산다. 무엇을? '내가 연약하다'는 문장 뒤의 자기연민을. '내가 연약하지 않다'는 자기기만을.

'내가 연약하다'라는 문장을 받아들이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질그릇임을 알자. 질그릇은 윤택이 없고 깨어지기 쉽다. 그러나 질그릇을 빚어낸 토기장이가 계시며, 그 토기장이는 목적을 갖고 그릇을 만들었다. 질그릇이라도 그 목적을 다한다면야, 이 세상에 존재하는 소임을 다한 것이 아니겠는가. 질그릇을 빛내는 것은 그 안에 담긴 보배이다. 그 보배되신 그리스도를 담아내는 자로 살아갈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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