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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B Aug 02. 2019

구원관과 인간관

C.V. 게오르규의 <25시>


"인간의 행복과 인간의 정의를 위해서 일하는 것은 곧 교회와 신을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요한 모리츠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곧 교회와 신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부로서의 나의 사명입니다."

"한 인간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이 십자가를 위해 싸운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겁니다. 누구도 십자가의 옹호자이면서 동시에 그 적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제 보잘것없는 권력을 남용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드리자. 자신의 집권을 남용하여 국가라는 비인간적인 압박을 우리에게 강요하는 자들, 사람을 신문하고 감독하는 자들, 허가를 해주고 금지령을 내리는 자들, 이 모두를 위하여 기도드리자. 문자와 숫자를 살과 피보다도 진실하고 생명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모든 자들을 위하여 기도를 드리자. 비나이다 주여, 우리들 이 지상의 소박한 시민들이 사람과 사람이 맡은 직책을 혼동하는 일이 없도록 해주옵소서.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가 참고 견디어야 하는 국가라는 것이 우리의 조바심과 태만, 우리들 자신이 저지르는 부정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항상 우리 마음속에 새기게 해 주옵소서.'

p.85-87





"... 민주주의는 전제주의보다 명확히 우수한 사회 조직의 형태이지만, 그건 사회적 차원밖에 나타내지 못해. 민주주의를 생명의 의미와 혼동하는 것은 생명을 줄이는 것이고, 또 단일한 차원으로 생명을 축소시키는 거야. 이런 과오는 나치나 공산당과도 통하는 큰 과오야. 인간의 생명은 그 전체 속에서 움직이고 살아야만 의미를 가지게 돼. 생명의 궁극적 의미에 충실하려면 예술을 감상하고 종교를 이해할 때, 즉 모든 예술적 창조 행위에 필요한 감성 없이는 안 된다는 거지. 생명의 궁극적 의미의 발견에 관하여 이성은 부수적인 역할 밖에 못하지.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의 합주곡을 이해하는 데 수학이나 통계나 논리가 필요 없듯이 인간의 생명을 이해하는 데는 그런 것들이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는 것과 같아... (중략) 만일 생명으로부터 그것이 가진 의미—생명이 가진 독특하고도 완전 무상한 의미, 논리를 초월한 의미—를 제거한다면 그때는 생명 그 자체도 사라지고 마는 거야. 생명의 의미는 논리나 이해관계처럼 객관적으로 획일화되지 않고 전적으로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거다."

"... 그러나 구원은 참다운 인간, 즉 개인 개인에게만 내려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 결코 어떤 범주에 공통적으로 내려지는 것이 아니야. 어떤 교회나 국가, 또 어떤 정권이나 대륙일지라도 범주별로 구원되는 일은 없을 거야. 오직 개인으로서의 인간만이 종교나 인종이나 그가 소속한 사회적 또는 정치적 범주의 여하를 막론하고 구원을 받게 되는 거야. 그래서 사람을 그가 속한 범주별로 판단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p. 284-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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