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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B Aug 29. 2019

On Faith: 믿음에 대하여

기도모임 두 번째

대학원에 입학한 지가 까마득하다. 대학원을 다니면서 느낀 것은, 대학원 생활이란 지성을 쌓아가기 위하여, 시간과 체력과 재정을 잘 아끼며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초반에야 공부하겠다는 열정 하나로 버티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긴 호흡을 갖고 페이스를 유지해나가기란 만만찮은 일임을 배운다.


대학원으로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언약마저도 아득해지고, 일과 학업을 병행하며 불평이 쌓이던 차. 같은 부르심을 받은 믿음의 동역자들과 함께 공동체를 세워 함께 예배하며 힘을 얻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다. 교회로 모인 자들이 받은 부르심과는 또 다른, 소명으로서의 직업을 공유하는 자들과의 부대낌이 절실했다. 대학원생들이 비록 대학원 밖에서 보면 자기들끼리 무얼하나 싶은 그런 집단이기는 하지만서도, 우리는 우리끼리만 공감할 수 있는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기도모임을 세웠다. 초기 멤버 5명이다. 개척 멤버 치고는 꽤 많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분명한 목적을 명문화했다. 거창하지만 뚜렷하다.


† 지성의 영역에서 하늘과 땅의 통로로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함께 교제함으로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며, 함께 기도함으로 우리의 소명을 일깨우기 위함.

† 사유하지 않는 나태함, 기도하지 않는 교만함에서 탈피하여, 지성과 영성을 통합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자라나기 위함.

† “영문 밖으로 나아가라”고 하셨던 주님의 부르심처럼, 교회 안에서도 세상을 향해 외치며 행동하며 살아가기 위함.




어제는 함께 모여 두 번째 예배를 드렸다. 이번 주 인도자는 나다. 인도자는 설교하는 자가 아니라, 한 주간 묵상한 주제를 선정하여 본문을 정할 뿐, 모임 자리에서는 모두가 자신이 묵상한 바와 기도제목을 나누고 함께 기도한다.


주제는 "믿음"으로 정했다.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나를 포함하여 모두에게, 신앙생활의 근간인 믿음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어 보여서다. 유명한 믿음장인 히브리서 11장을 읽을까 고민하다가 마태복음 6장 25-34절을 본문으로 정했다. 신앙생활을 이제 시작하고자 하는 친구도 있어서, 보다 직관적이고 분명한 말씀을 나누는 것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생명을 위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너희 몸을 위해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생명이 음식보다 더 중요하고 몸이 옷보다 더 중요하지 않느냐?
공중의 새를 보아라. 새는 씨를 뿌리거나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 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에 계시는 너희 아버지께서 새를 기르신다. 너희는 새보다 더 귀하지 않느냐? 너희 중에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키를 한 치라도 더 늘릴 수 있느냐?
그리고 어째서 너희는 옷 걱정을 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보아라. 그것은 수고도 하지 않고 옷감을 짜지도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지만 솔로몬이 온갖 영광을 누렸으나 이 꽃만큼 아름다운 옷을 입어 보지 못하였다.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하나님께서는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꽃도 이렇게 입혀 주시는데 하물며 너희야 더 잘 입혀 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이런 것들은 모두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애써 구하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알고 계신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덤으로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할 것이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의 것으로 충분하다.
(마태복음 6:25-34, 현대인의 성경)


전하려는 바가 매우 선연하면서도, 둔치를 묵직하게 때리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모두들 한 대 맞은 마냥, 그간 염려하고 믿음이 없었던 모습을 진지하게 고백하고 나눈다. 실력이 부족하고, 재정이 부족하고, 진로에 대한 확신이 없고, 앞날이 불안한 우리들. 양상은 다양해도 결국 고민은 하나다. 우리는 믿음이 없다. 믿음이 뭘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오늘 본문을 묵상하며 나는 히브리서 11장 1,2,6절을 레퍼런스로 나누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에 대한 실물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증거입니다. 옛날 사람들도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사람은 그분이 계시는 것과  또 그분을 진정으로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현대인의 성경)”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행위는 세상이 볼 때 터무니없어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오감으로 체험해야만 믿는 세대에게 어찌 믿음을 구하랴.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이 곧 소망하는 것의 실물이자 증거라고 한다. 항상 성경을 통해 놀라는 바는, 정신과 육체, 형이상학과 형이하학, 물질과 비물질이 나뉘지 않고 통합되어 있다는 진리가 담겨있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으면 그것이 실재가 된다. 예수님 역시 공생애에 걸쳐 병자들을 마주했을 때, "네 믿음을 보이라(막 2:5; 눅 5:20)", "네가 믿느냐(마 9:28; 요 11:26)"고 물으셨다. 예수가 생명이고 살리는 자임을 믿으면 죄는 사해지고 병은 나을 수밖에 없다. 믿음이 생각으로 그치지 않고 현실로 온다. 세상은 이를 기적이라 한다.


그렇다면 신앙인으로서 믿음을 견고히 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하나님을 아는 만큼"이라 정의한다. 내가 A라는 친구와 인간관계를 맺고 그를 체험한 만큼 나는 A를 믿게 된다. 그래서 그를 아는 만큼 좀 더 중요한 일들을 부탁하거나 부탁하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내가 아는 만큼, 경험한 만큼 쌓인다. 그래서 믿음은 관계성이다.


만군의 여호와가 얼마나 선하고 인자하시고 완전하며 전능하신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야기를 통해 배운다. 그리고 아들이며 구원자인 예수를 세상 속에 현현하게 하셨다는 것, 그 예수가 수가 성의 여인(요 4:5-30), 삭개오(눅 19:2-10), 귀신 들린 자(눅 8:26-39), 백부장(마 8:5-13), 음행한 여인(요 8:3-11), 나사로(요 11:1-44)에게 찾아가시고 치료하신 사건들, 그가 세상에 남긴 탕자 이야기(눅 15:11-32),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눅 10:30-37)를 통해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깨닫는다. 그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나를 구원했으며, 나의 앞길을 아시고 나의 인생을 지도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는 사실이 무엇인지 배운다. 내가 안다고 고백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삶을 통해 체험케 하신 바 그대로이다. 인생의 굴곡마다, 내가 그를 꽉 붙잡든, 방황하다 돌아와 뒤늦게 바짓가랑이를 붙잡든, 그는 항상 선하신 모습 그대로 나를 받아주시고 가르치시고 만들어 오셨다.


세상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진다(눅 21:34)는 말씀처럼, 염려 속에 갇혀 있으면 내가 그렇게 체험한 주님을 잊는다. 애굽에서 하나님이 파라오에게 내리신 저주를 목격하고, 홍해가 갈라지도록 하여 구출받은 이스라엘 민족마저 광야에서 괴롭고 힘들다며 "애굽에서 고기를 먹던 때가 그립다(출 16:3)"고 떼썼던 것을 보면 인간 참 무지렁이 같구나 싶다. 그렇게 우리는 주님에 비하면 어리석고 신뢰할만하지 못한 존재다.


나 역시 근래의 기간 동안 주님께 그런 존재가 아니었나 깊이 돌아본다. 내 믿음이 다시 반석 위에 세운 집처럼, 그리하여 홍수가 나도 무너지지 않았던 집(마 7:24-25)과 같이 되고 싶다. 주님을 더 알아가고 만나고 그분께 나의 가장 귀한 사랑과 열정을 드리고 싶다. 그래서 광대하고 놀라우신 주님을 평생에 걸쳐 알아가고 교제하고 싶다. 그리하여 주님과 함께, 홍수가 나고 해일이 일어서 우왕좌왕하며 주님을 부르짖다가도, 주님으로 인해 평온하고 잔잔함을 누릴 수 있는(마 8:24-26), 그렇게 스펙터클하고 지루할 틈이 없는 모험의 여정을 이어가고 싶다.




다음의 예배 주제는 소망으로 정했다. 아직 확정은 아니지만 생각하고 있는 말씀 구절이 있는데, 또 함께 나누고 도전받을 것이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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