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이 영화를 보실 거라면 보러 가기 전에 <사랑은 비를 타고>(1952)와 <아티스트>(2011)를 보고 가시길 추천합니다. <사.비.타>는 사실상 <바빌론>의 원전 같은 영화이고, <아티스트>는 무성영화의 예술성이 어떤 것인지, 그래서 당대의 전문가들이 대체 왜 유성영화를 더 하등한 것처럼 취급하려 들었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기준에서는 직관적으로 이해가 안 되잖아요. 안 나던 소리가 난다는데 왜 싫어해? 당연히 소리 나는 영화가 더 좋은 거 아냐? 그런데 당대 '무성영화'를 바탕으로 발달한 영화 문법과 예술성들의 기준으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니까요.
1. 포스터가 아주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것이 딱 '버즈 루어만' 감독의 <위대한 갯츠비>나 <물랑루즈> 같은 영화들이 연상되지 않나요? 그런데 그걸 기대하고 영화를 봤다간 굉장히 당황스럽고 불쾌할 겁니다. 셰젤 감독의 아름다운 (전)전작 <라라랜드>를 기대해도 곤란합니다. 이 영화는 장대한 러닝타임 동안 (19세답게) 굉장히 역하고, 선정적이고, 기분 나쁜 장면들이 쉬지 않고 나오거든요.
그렇다고 포스터가 사기냐면 그건 또 아닌 것이, 정말 정신을 쏙 빼놓을 만큼 숨 가쁘게 화려하고 압도적인 장면들도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영화판, 정확히는 '할리우드'를 담아내고자 하는 감독은 '바로 이게 할리우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숨 막히게 화려하지만, 들춰보면 또 코를 틀어막고 싶을 만큼 추악하기도 한 곳. 그렇다고 그 추악함을 고발한다는 식의 영화는 아닙니다. 그냥 그렇다는 거죠.
2. 3시간짜리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제일 먼저 떠오른 단어는 '영화예술의 이해'라는 과목명이었습니다. 아마 어느 대학이나 가장 기본적인 교양과목으로 있을 것이고, 제 모교에는 '영화의 이해'라는 이름의 3학점짜리 교양, 그리고 '영화예술의 이해'라는 3학점짜리 신방과 전공수업으로 있었습니다.
3시간의 러닝타임이 끝나면 이 3학점짜리 '영화예술의 이해' 한 학기를 수강한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정확히는 한 학기 내내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의 이전이 이루어지던 초반 단원만 죽어라 파다가, 기말고사 전날이 되어서야 나머지 중요한 내용들을 벼락치기로 공부한 기분이긴 하지만요.
영화는 무성영화와 유성영화의 교체기의 할리우드를 중점적으로 다루지만, 대단히 급진적인 편집의 마지막 시퀀스에 이르면 영화사의 중요한 장면들을 벼락치기로 와르르 다 보여줍니다. 최초의 동화상, 최초의 영화, 최초의 특수효과, 최초의 유성영화, 최초의 컬러영화, 아방가르드와 블록버스터를 상징하는 영화들까지. 그러니 최소한 대학에서 영화 관련 교양수업을 성실하게 들었고 그 내용들을 얼추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는 훨씬 더 재미있어집니다.
3. '영화예술의 이해'는 제가 학부 때 들었던 강의 중 손에 꼽을 만큼 훌륭하고 충만함을 느낀 강의였던 것은 분명하지만, 상업극장에 걸린 영화로 써온 레포트는 인정하지 않으셨던 '영화예술' 교수님의 지침과는 달리 영화의 본질은 어쩔 수 없이 일단은 '산업', '상업'입니다. 모든 예술의 형태를 통틀어 가장 자본이 많이 동원되는 예술이고, 거룩한 독지가가 아닌 이상 들어간 자본을 회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촬영과 영사의 기술은 19세기말 곳곳에서 탄생했지만, 흔히 '최초의 영화'로 뤼미에르 형제의 <뤼미에르 공장의 출근>, 혹은 <열차의 도착> 같은 영화들을 거론하는 기준이 바로 '매표'라는 사실은 영화가 내포한 '상업성'을 보여줍니다.
4. <바빌론>은 무성영화의 전성기였던 1920년대 할리우드가 유성영화 시대를 맞이하며 1930년대로 넘어가는 시점을 다루고 있습니다. (무성영화의 촬영 장면은 극단적으로 시끄럽고, 유성영화의 촬영장면은 극도로 고요함을 강조해 연출했다는 것도 재미있는 지점입니다) 감독은 "영화가 아직 '새것'이던 시절"을 다루고 싶었다고 합니다. '서민오락'의 대표주자로서 아직 영화가 왕좌를 차지하지 못한 시기였다는 뜻이죠.
그럼 이전까지는 뭐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느냐, 대표적으로는 '프릭쇼 freak show'가 있었습니다. 장애나 인종적 차이, 신체적 소수자성을 그 자체로 '신기한 볼거리', '구경거리' 삼는 공연이었죠. 여기서 좀 더 발전한 것이 서커스가 되고, 현대적 의미의 서커스를 확립한 'P.T. 바넘'을 다룬 영화 <위대한 쇼맨>이 이 과정을 잘 다루고 있습니다. <This is me>는 언제 들어도 눈물이 줄줄 나는 명곡, 명장면입니다만, 영화는 실제 '프릭쇼'를 했던 인물을 지나치게 미화했다는 점 때문에 마냥 감동받기도 좀 기분이 이상하긴 합니다.
5. 어쨌거나 <바빌론>에서도 이 '프릭쇼'의 모티브가 지속적으로 제시됩니다. 오프닝 시퀀스부터 실제로 프릭쇼가 나오기도 하고, 결국 '신기한 구경거리'로서의 영화라는 게 본질적으로 프릭쇼와 다를 게 없다는 뉘앙스를 풍기기도 합니다. 사실 특수효과나 스펙터클 같은 '볼거리'를 강조하는 영화를 보러 갈 때나, 혹은 TV예능의 상담코너에서 '이상한 사람들'을 전시하는 것도 크게 보면 '프릭쇼'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1번에서도 말했지만, 감독은 자신 스스로도 턱시도 차려입고 시상식도 가며 우리가 고상한 척 하지만 영화의 본질에는 분명히 이런 것도 있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브래드 피트가 분한 '잭 콘래드'는 극 중에서 그러한 사실을 스스로 마음속 깊이 주지하고 있으면서도 입으로는 끊임없이 '영화의 예술성'을 설파하는 콤플렉스적인 인물로 그려지죠.
한편으로는 이 영화의 결점 투성이 기이한 인물들을 구경하고 있는 관객들로 하여금 프릭쇼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메타적 기분을 선사하기도 합니다.
6. <바빌론>으로부터 20년쯤 뒤를 그리는 <트럼보>는 제가 평생 손에 꼽을 만큼 사랑하는 영화 중 하나입니다. 영화는 사회주의적 성향을 드러내는 예술가들을 탄압했던 미국 정부의 매카시즘을 배경으로, 잘 나가는 각본가였던 '달튼 트럼보' 역시 블랙리스트에 올라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게 되었던 실화를 다루고 있죠.
결국 그는 생활을 위해 가명으로, 싸구려 B급 상업영화를 만드는 영화사에 미친 듯이 대본을 써주는데 이게 줄줄이 대박이 납니다. 냄새를 맡은 정부 측에서 영화사를 찾아와 블랙리스트 작가들을 쓰지 말라는 압박을 넣죠. 평론과 뉴스, 로비 등 전방위적인 제재를 암시하면서요.
이때 영화사 대표가 야구 배트를 휘두르며 그를 쫓아낼 때 하는 대사가 압권입니다. "우리 영화 보는 관객들은 글을 읽을 줄 몰라!" 영화의 상업성과 속물성이 빛을 발하는 순간입니다. 사상이 무기가 될 때는 상업성이 얻어걸린 정의가 되기도 하죠.
(아, 그래서 '트럼보'가 가명으로 쓴 대본 중 하나가 바로 <로마의 휴일>이고 이 가명으로 각본상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이 영화를 홍보하는 가장 유명한 사실입니다.)
7. <바빌론>에 대한이동진 평론가의 한 줄 평은,
"영화에 대해 절절히 고백하는 장대한 서사시, 고귀해서가 아니라 너라서 사랑해."입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아름답지만은 않은, 화려하고 고귀해 보이지만 속물적이고 상업적이고 추찹하고 잔인하기까지 한 이 영화판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그 사실 그대로 긍정한다는 의미겠죠.
----여기서부터 스포일러입니다-----
(사실 스포일러가 의미 없는 영화이긴 합니다만)
이 영화가 '고발'이 아니라 '사랑고백'인 이유는 주인공 '매니'의 마지막 극장신으로 귀결됩니다. 영화판을 떠난 그는 후일 우연히 이끌리듯 극장에 들어가게 되고, 거기서 보게 되는 영화가 <사랑은 비를 타고>입니다. '매니'가 영화판을 떠난 것이 30년대 후반이고, <사랑은 비를 타고>는 1952년 영화니까 10여 년 만에 보게 된 영화겠네요. 언급했다시피 <사랑은 비를 타고>는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옮겨가던 시기의 할리우드를 다룬 대표작, 그러니까 <바빌론> 속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담은, 대신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럽게 윤색한 버전의 영화인 셈이죠.
'매니'는 그곳에서 벌어진 모든 끔찍하고 넌덜머리 나는 기억들로부터 이미 오줌을 지리며 도망쳤습니다. 한 때는 설레고 마법 같고 꿈같아 보였던 그곳의 이면들로부터 질리고 상처받은 사람이죠.
그런데 스크린 속에는, 그가 겪었던 그곳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그런데 너무나도 아름답고 마법 같은 터치로 다시 펼쳐지고 있습니다. 현실과는 전혀 다르지만 그럼에도 엄연히 존재했던 이야기가 감정을 건드리고, 마음속에 진실을 불어넣습니다. 그 순간 '매니'는 그가 영화를 사랑했음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카메라는 아주 설명적으로 움직이며, 객석에 앉아있는 인종, 성별, 나이를 초월한 제각각의 관객들 얼굴을 하나씩 비춰줍니다. 누군가는 졸고 있고, 혹은 그냥 지켜보고, 혹은 깔깔깔 웃으며 감상하고 있습니다. 이 모두에게 마법을 걸고 있는 것이 바로 스크린의 저 영화인 것이죠.
8. 그냥 '좋은 영화'일 뻔했던 <라라랜드>를 많은 사람의 '인생 영화'로 만든 것은 세월이 흘러 '세바스찬'과 '미아'가 재회하는 마지막 시퀀스일 것입니다. 두 사람에게 가능했을지도 몰랐던, '다른 버전'의 삶이 짧은 순간 꿈결처럼 흘러가죠. 그 꿈결은 무척이나 아름답고, 그래서 보는 이의 마음이 더 저려옵니다. 아름답지 않았으면 슬프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바빌론>의 마지막, 매니의 극장 장면 또한 결국 <라라랜드>의 변주입니다. 현실과는 다른 버전의, 돌아갈 수 없고 설령 그럴 수 있다 해도 그러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아름답고 그래서 더 아름다운 환상의 투사죠. 다만 <라라랜드>와 반대로 '매니'가 보는 환상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입니다. 매니에게만요, 훨씬 참담한 버전으로. 웃고 즐기는 관객들 속에서 오로지 매니만 그 환상 앞에서 무너지고 있죠. 시끄러운 공연장에서 눈을 마주쳤던 '세바스찬'과 '미아'처럼요.
<라라랜드>가 이 장면 덕분에 아름다웠듯, <바빌론>도 결국 이 장면을 통해 완성됩니다.
9. '매니'의 시점으로 볼 때, 마고 로비가 분한 '넬리 라로이'는 제 눈에 고스란히 '영화'의 메타포로 보입니다. 눈부신 매력으로 '매니'를 사로잡지만 사실 '넬리'는 인생을 걸어 사랑할 만한 여자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상처가 많고 방탕하고, 무엇보다 너무나 취약하죠. 세상을 다 이겨낼 것처럼 큰소리치지만 실은 조금만 건드려도 무너지고, 심지어 혼자만 무너지지도 않습니다. 곁에 두기엔 너무 힘겨운 사람이죠.
그녀를 사랑하는 것은 물론 자유지만, 그 사랑에는 너무 많은 대가가 따른다는 것이 명백하게 그려집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매니'는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넬리'를 사랑합니다. "고귀해서가 아니라 너라서 사랑해."
그리고 '넬리'가 '매니'를 떠나는 그날, '매니'도 영화를 떠납니다.
10. 소설가들은 '소설 쓰는 일'에 대한 소설을 쓰는 것을 겸연쩍어하는 경향이 있다고들 합니다. 그에 비하면 '영화에 대한 영화'는 훨씬 더 줄기차게 이어지고, 그래서 때로 관객들은 '그래 너네 좋겠다' 하는 소외감을 호소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소설과 달리, 영화는 '만드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이 차이 아닐까요. 소설은 아무리 과정을 써도 과정을 쓴 소설만 존재하고 진짜 과정을 보여줄 수 없으니까요. 공동작업인 영화보다 글이 훨씬 더 개인적인 매체라는 점도 민망함에 한 숟갈을 더 할 거고요.)
당장 <바빌론>과 함께 아카데미에 올라간 <더 파벨만스>도 영화를 다루고 있고, 지금 함께 극장에 걸려있는 <이마 베프>도 영화를 찍는 영화죠. <헤일 시저>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같은 명작들도 있고, 업계인들의 찬사를 받는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같은 컬트명작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2022년 올해의 영화로 <에에올>과 <헤어질 결심>을 꼽는 동안, 너무 바빠 영화를 많이 보지 못해 잠자코 있었던 저에게 2022년 최고의 영화였던 <썸머 필름을 타고!>도 영화에 대한 영화였습니다. 다만 앞서 언급한 영화들이 정말 영화에 대한 예찬을 담고 있다면 사실 <썸머필름>은 영화에 대한 유언장 같은 영화입니다. 미디어 시장이 변하고 더 이상 영화가 '서민오락'의 왕좌로 군림하지 못하는 것이 자명해진 시대에 띄우는 서글픈 연서로 읽히죠. <썸머필름>은 영화가 멸종한 세상을 상상하고 있는데 이게 결코 망상이 아니라는 사실이 이 영화를 더 애정 어린 눈길로 보게 만듭니다.
<바빌론>은 감독이 15년 전부터 구상했다고 하니 처음부터 그런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저에게는 이 역시도 '살아있을 때 쓰는 유서'처럼 느껴졌습니다. 왜 우리도 그런 거 많이 하잖아요. 아직 쌩쌩하고 앞으로 몇십 년은 거뜬할 것 같을 때 괜히 써보는 유서. '영화의 종언'에 대한 예언이 곳곳에서 자꾸 머리를 들다 보니 영화를 사랑하는 감독님들도 점점 애가 닳는 모양입니다. 사실 'SHOW MUST GO ON!'을 외칠 때는 결국 쇼가 끝날 위기라는 반증이기도 하니까요. 저는 그래도 영화가 오래오래 대중예술로 남아있으면 좋겠지만요.
11. '촬영'을 업으로 삼는 한 사람으로서 애정이 갔던 장면은 따로 있습니다.
유성영화의 시대에 몰락의 길로 들어선 '잭'이, '쓰레기 같은 영화'에 대타로 촬영하러 간 바닷가의 촬영 장면이요. 어떤 사람들은 그 장면을, 화려했던 스타 '잭'이 이제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싸구려 영화로 몰락했음을 보여주려 했다고 느낀 것 같지만, 저는 그 장면에서 아주 분명한 애정을 느꼈습니다.
촬영하다 보면 그럴 때가 있거든요. 촬영장은 정말 고단합니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춥고(혹은 덥고), 현장은 뜻대로 안 돌아가고, 일정은 계속 늘어지고, 모두가 지쳐가는 것이 당연한 일상이죠.
그런데 그 와중에 이상하게 안온하고 포근하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현장에서 스태프와 출연자들이 보내는 시간의 상당 부분은 대기 시간입니다. 조명을 옮기고, 대본을 수정하고, 카메라를 다시 세팅하고 등등 실제로 촬영하는 시간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훨씬 더 길죠. 그러다 보면 당장 일이 없는 스태프들은 꾸벅꾸벅 졸기도 하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지루하고 지친 얼굴로 각자의 자리에 있습니다.
네. '어쨌거나 각자의 자리에 있는' 그 순간이요. 지루하고 고단해도, 혹은 열심을 내든 매너리즘에 빠져있든,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일을 위해 머물러 있는 그 모습이 별안간, 굉장히 편안하게, 집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간혹 있습니다.
'잭'의 장면에서 그 익숙한 느낌을 보았습니다. 이제 내리막 길을 걷고 있지만, 현장을 돌아보는 '잭'의 눈길에서 '그래도 나는 여전히 이곳에 있구나'하는 묘한 애정과 안온함이 보였거든요.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촬영장의 기억들이 떠올라서 기분이 따뜻해져 버렸습니다.
'잭'은 그 직후에 생을 마감하지만, 그래서 그 장면이 더 다채로운 온도로 느껴졌습니다.
12. 셰젤 감독의 다섯 번째 장편영화지만, 아마 대부분의 한국 관객들에게는 <위플래쉬>와 <라라랜드>에 이은 세 번째 영화 정도로 느껴질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세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셰젤 감독이 무엇보다 '상승의 욕망'에 대해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표현하는 감독이라는 점입니다.
감독 스스로가 '<바빌론>을 15년 전부터 구상했지만, 이런 영화를 만들려면 그럴 수 있는 위치에 와야 했다'라고 말한 걸 보면 아마 그 역시도 강렬한 상승욕망으로 스스로를 추동한 것 같습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요. 저랑 동년배인데 너무 부럽습니다.
그런데 그의 세련된 전작들에 비해 이 영화에서는 어쩐 일인지 다소 교조적이고 선언적인 대사가 몇 차례 등장합니다. '잭'이 영화의 가치에 대해 설파하는 장면이 그렇고, 평론가인 '엘리노어'가 '잭'에게 '배우의 불멸성'에 대해 타이르는 장면이 그렇습니다. <위플래쉬>에서 '플래시' 교수가 윽박지르는 설교들은 감독의 생각과 똑같다고 보긴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바빌론>에서 등장하는 연설들은 어쩐지 감독도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물론 교조적인 걸로 따지만 마지막 명장면만큼 교조적인 것도 없겠지만요.)
그중에서도 '엘리노어'의 힘을 준 설교는, 제게도 굉장히 크게 남았습니다. 배우는 영화를 통해 불멸을 얻는다는 이야기요. 우리도 자주 느끼잖아요. 지금은 주름이 자글자글한 동시대 배우들의 리즈시절 작품들을 보면 느껴지는 묘한 그 시간의 어긋남.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조언들 중에 흘러가지 않고 꾸준히 거론되는 것이 있습니다. 부모님 건강하실 때 모습을 '영상으로' 많이 찍어놓으라는 것. 사진으로 보는 거랑 또 다르게, 살아서 움직이고 말하는 목소리를 듣고 싶은 그리움이 너무나 크다는 겁니다. 부모님의 생전 모습은 단편적으로만 찍어놓아도 우리는 그 삶을 아니까 우리에겐 의미가 있습니다. 부모를 모르는 이들에겐 그저 큰 의미 없는 파편들이겠죠.
하지만 영화는, 배우의 생생한 모습을 찍어두긴 하지만 실은 영화 속에서는 전혀 다른, 독립된 하나의 인생을 그립니다. 시대를 훌쩍 뛰어넘은 누군가가 봐도 마치 자기 일처럼 감정을 몰입하게 되는 불멸의 삶으로요. 그래서 때로는 배우들이 너무나 부럽기도, 혹은 무섭기도 하죠.
이 영화에서 대사 하나를 고르라면 그 장면을 고르고 싶습니다. '엘리노어'의 대사만큼 영화에 대한 강렬한 찬사는 없을 것 같아요. 흘러간 빛나는 영화들을 볼 때마다 느끼는 아득함과 처연함의 이유를 조금 더 분명하게 알려준 것 같기도 하고요. 영화는 그렇게 불멸로 남지만, 그 시절의 우리는 기억 속으로 사라져 버리니까요. 그나마 그 시절의 영화를 다시 찾아보며, 거기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기억들을 모아 간직하는 기쁨과 슬픔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 아닐까 합니다. 확실히 예찬할 만해요, 영화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