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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의 이방인 Aug 26. 2023

새로운 도전이냐 돌아갈 것이냐

이리저리 치이는 이민자의 삶

한국에 있을 때 나의 직장 생활은 사람 때문에 쉽지 않았을 때가 많았다. 끌어주려는 상사보다 밟아주려는 상사를 만난 적이 더 많았던 데다가 강강약약인 내 성깔도 한몫해서 이 바닥에 다시는 발 못 붙이게 하겠다는 말까지 듣기도 했었다. 나름 다사다난했던 한국 회사 생활은 이제 '그땐 그랬지' 하는 추억으로 남았지만 한국에서 회사 생활을 하면서 제대로 된 어른이나 상사를 만나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이전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독일에서 만난 나의 팀장은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에겐 최의 팀장이었다. 일본에서 심리학을 공부하고 핀란드 남편을 만나 독일에 정착해 살고 있는 분이었는데, 사람을 잘 파악해 어떻게 다루고  잘 알고 계시는 분이었다. 예를 들면, 주어진 일을 빠릿빠릿하고 성실하게 잘하는 사람들에게는 별다른 피드백을 주지 않았다. 내가 처음에 일을 시작했을 때 미팅 때도 그냥 힘든 일 없는지 물어보고 수다만 떨 뿐 팀장님의 피드백이 거의 없어서 '이건 두 가지 경우다. 내가 일을 너무 잘하거나, 아니면 아웃 오브 안중이어서 프로베 기간 후에 나를 바로 내보내기로 이미 결심하신 거다'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나중에 팀장님께 물어보니 내가 일을 알아서 잘하고 있어서 굳이 피드백이 필요 없었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약간 꾀를 부리거나 일을 설렁설렁하는 사람에게는 나노 단위로 피드백을 주면서 엄청 빡빡하게 구신다는 것을 나중에 다른 사람을 통해 들었을 때 약간 놀라기도 했다.

회사를 그만둘 때도 팀장님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었다. 앞으로 이렇게 나를 잘 이해해 주고 인정해 주는 상사를 만날 수 있을까? 사실 회사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가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핀란드로 다시 옮기기로 해서 재계약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말씀드리자 팀장님은 서운해하셨지만 나의 도전을 응원해 주셨다. 그리고 핀란드 남편 덕분에 핀란드 상황을 잘 알고 계셨던 팀장님은 나에게 자기 딸은 핀란드인인데도 재취업에 8개월이 걸렸다면서 핀란드는 특히 외국인이 취업하기 정말 쉽지 않으니 IT나 다른 쪽으로 공부를 더 해볼 것을 추천하셨다. 그렇게 팀장님과의 미팅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핀란드 대학 검색해 보았는데 신기하게도 그때가 마침 딱 핀란드 대학 지원 시기였다. 핀란드에서 공부하고 있는 남편한테 '나도 IT 쪽으로 다시 대학 지원해 볼까?'라고 농담처럼 말을 던졌는데, 어느새 나는 지원서를 열심히 작성하고 있었다.




그렇게 대학 지원서를 제출한 후 핀란드로 옮길 준비를 하면서 핀란드 대학 시험을 쳤다. 지원한 전공이 ICT(Information and Communication Technology) 쪽이었기 때문에 시험 과목은 논리적 사고, 영어, 수학, 물리였다. 수학과 영어는 자신이 있었지만 학교 다닐 때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물리는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시험 결과, 영어, 수학은 예상대로 점수가 좋았 의외로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던 논리적 사고 점수가 낮아서 충격이었지만 다행히 합격 커트라인을 통과했다. 그 후 면접 invitation을 받았고 Zoom으로 1시간 정도 영어로 그룹 토론 면접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이 끝이 아니었다. 내가 지원한 대학 중 한 곳에서는 입학시험의 과정으로 database 수업을 제공했다. 두 달 동안 그 수업을 들으면서 매주 주어지는 과제를 모두 제출해야 했고 모든 수업이 끝난 후 그 수업에 대한 시험을 보고 나서, 최종적으로 면접을 한 번 더 본 후 입학 여부가 결정되었다. 핀란드로 옮긴 후 주소 등록, 거주 허가증 신청 등 행정적인 업무를 하면서 입학시험까지 준비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독일에서 주는 실업 급여를 받으려면 핀란드에서 구직 활동을 해야 해서 구직자 등록, 구직 센터 담당자 상담, 구직 활동에 면접도 보느라 알차고 바쁜 백수 생활을 보냈다.

안타깝게도 취업은 감감무소식이었다. 하지만 공부운은 있는지 지원한 대학들 중에 다행히도 두 곳에서 study offer를 받았다. 일단 무엇보다 어딘가에서 누군가 나를 받아주었다는 사실에 너무 기뻤고 감사했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현타가 또 슬슬 몰려오기 시작했다.


'공부를 끝내면 40대 중반인데 아무리 IT를 공부했다고 해도 누가 나를 써 줄까?'

'자식뻘 되는 친구들이랑 공부하면서 내가 과연  따라갈 수 있을까?'

'공부할 체력이 되나? 허리는 이미 안 좋고 슬슬 노안도 올 텐데'

'남편이랑 둘 다 공부를 하게 되면 세에 생활비는 어떻게 감당하지?'

'내가 굳이 대학 학위가 또 필요한 걸까? 그냥 코드 캠프 같은 데서 혼자 빡세게 공부할까?'

'이렇게 또 학위를 시작하면서까지 핀란드에 붙어있을 필요가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은 이번 핀란드 총선 결과를 본 후 점점 더 심각한 고민으로 깊어져 갔다. 지난 4월에 있었던 핀란드 총선 결과, 중도우파인 국민연합당과 극우파인 핀인당이 원내 1, 2당을 차지했고, 향후 이민자들에 대한 정책이 점점 더 까다롭고 엄격해질 예정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영주권(permanent residence permit)을 신청할 수 있는 체류 년수를 기존의 4년에서 6년으로 변경하고, 시민권(citizenship)을 신청하려면 기존에 5년이었던 거주 기간을 8년으로 늘릴 것과 충분한 재정 능력 및 핀란드어 실력을 증명해야 하는 등 외국인이 핀란드에 정착하는 데 더 까다롭고 오랜 시간이 걸리도록 정책을 변경할 예정이라고 한다. 또한 취업 비자로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이 실직 후 3개월 이내에 다른 일을 찾지 않으면 그 비자는 3개월 후 만료될 것이라고 한다. 이민자들은 제대로 일을 하고 세금을 내지 않을 거면 핀란드에서 나가라는 의미인데, 가뜩이나 취업이 힘든 외국인들에게 3개월이란 시간은 사실 말도 안 되게 짧은 기간이다. 이런 숨통을 조이는 정책들이 연일 발표자 헬싱키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Protesters march over government immigration plans | News | Yle Uutiset


APN Podcast: Foreigners protest as Finland turns right | News | Yle Uutiset

얼마 전에는 핀란드어나 스웨덴어를 못하는 사람은 핀란드어나 스웨덴어를 하는 사람들보다 실업 급여를 덜 받게 하겠다는 새로운 반이민 정책 방향이 뉴스에 발표돼 또다시 논란이 되고 있다.

Government wants to tie unemployment benefits to language skills | News | Yle Uutiset

사실 핀란드의 이런 태도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독일에 살면서도 느꼈지만 유럽으로 계속해서 몰려드는 난민과 그들을 계속해서 받아들이면서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막대한 비용이 그들에게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 이후 회복 중이긴 하지만 자국민도 먹고살기 힘든 상황이라 남의 집 사정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기에 이번 핀란드 총선 결과가 한편으로 이해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핀란드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와 남편의 입장에서는 이런 정책들이 현실화된다면 이곳에 정착할 것이 더 길고 힘들어질 건 확실한 일이었다. 게다가 우리가 떠나온 독일에서는 반대로 시민권을 신청할 수 있는 독일 거주 기간을 8년에서 5년으로 축소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니 뭔가 나의 모든 선택이 잘못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와중에 한국에서 같이 석사 공부를 했던 친구에게서 갑자기 연락이 왔다. 마음이 맞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는데 한국에 돌아와서 자기랑 같이 일해볼 생각이 없냐고. 사실 내 인생 최대의 암흑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힘들었던 석사 공부였기에 내가 들인 시간과 돈이 아깝긴 했지만 졸업 후 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른 길로 떠났었다. 하지만 또다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 같은 지금 상황에서는 참으로 달콤한 제안이었다. 이 친구와 일을 하게 되친구가 고용주이기에 채용까지 소모되는 에너지와 시간 낭비 없이 일을 바로 시작할 수 있다. 국가 자격증이 있는 나름 전문직이 내가 전에 했었던 일이니 기억을 다시 되살려 다시 돌아가면 된다. 이제는 3~4차에 걸친 길고 지친 면접 과정 속에 구구절절 내 자신을 설명하고 포장할 필요도 없고, 언어 때문에, 외국인이기 때문에 늘 리셋되곤 하는 junior position을 더 이상은 기웃거리지 않아도 된다. 내 모국어인 한국말로 편하게 일하고 늘 그리워했던 한국 음식을 매일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 그리고 더 이상 주변인, 이방인이 아닌 내 나라로 돌아간다는 생각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남편도 좋은 기회인 것 같다며 여기서 내가 맘고생하며 끙끙대는 것보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좋은 것 같다고 했다.

포기하고 돌아갈까.

화창하고 따뜻한 봄날이 오고 있었지만 내 마음은 계속해서 너덜거리고 있었고 한국에 가고 싶은 마음은 눈덩이처럼 점점 더 커져서 한국에 돌아가야겠다는 집착으로 변해갔다. 그러다가 여름이 다가올 무렵 결심을 했다. 일단 한국에 가서 좀 있어보자. 가서 좀 쉬면서 지내다 보면 생각이 좀 정리되겠지 생각하고 한국행 편도 티켓을 끊었다.


그날밤 오래간만에 조금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잠들었다. 그런데 다음날 일어나 보니 언니들에게 카톡이 와 있었다.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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