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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의 이방인 Nov 07. 2023

엄마, 안녕

불지옥 같았던 한국

엄마의 소식으로 인해 한 달 후 돌아가려고 했던 한국행 티켓은 바로 다음날로 바뀌었다. 슬프기보다 멍한 상태로 공항으로 가는 기차를 예매하고 눈에 보이는 대로 정신없이 짐을 쌌다. 그 사이 이미 다른 가족들은 장례식장에 가 있었고, 다음날 아침 헬싱키 공항으로 가는 기차를 탔을 땐 이미 입관이 진행 중이었다. 입관 전 엄마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싶어서 언니들에게 엄마의 모습을 담아줄 수 있냐고 카톡을 보내는데 그날따라 카톡이 느려서 기차 안에서 전송이 되지를 않았다. 미친 사람처럼 기차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겨우 카톡을 전송했다. 원래 헬싱키에서 인천까지 직항으로 8시간 반 정도 걸렸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아래쪽으로 빙 돌아가야 해서 직항이었음에도 13시간 정도가 걸렸다. 최대한 빨리 간다고 했는데도 인천 공항에 도착했을 땐 엄마를 이미 장지에 모신 후 다들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엄마의 장례식이 모두 끝난 후 뒤늦게 한국에 도착했다.


인천 공항 밖을 나오자마자 뜨거운 열기가 나를 감쌌다. 겨울에 태어나서 그런지 더위에 맥을 못 추는 나였기에 한국에 가더라도 늘 여름을 피해서 갔었는데, 어쩔 수 없이 몇 년 만에 만난 한국 여름의 열기는 여전히 숨이 막혔다. 재빨리 공항버스에 올라 집으로 향했다. 비행기에서 잠을 한숨도 못 잤는데 한국에 도착하니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뒤늦게 잠이 몰려왔다. 공항버스는 올림픽대로와 서울 시내를 정신없이 달렸지만 그래도 집까지 꼬박 두 시간이 걸렸다. 공항버스에서 내리니 오후 두 시의 뙤약볕에 여행의 피로와 함께 몸이 녹아내릴 지경이었다. 한국에 얼마나 머물지 몰라서 닥치는 대로 짐을 싸다 보니 꽉 차버린 무거운 캐리어 두 개를 질질 끌고 집으로 걸어갔다.

집에 도착하니 슬픔보다는 3일간의 장례식 후의 고단함과 피곤함이 가족들을 잠식하고 있었다. 언니와 형부는 장례비용을 정산하고 상조 회사 및 장례식장에서 받은 서류들을 정리하느라 정신없어 보였다. 조카들은 장례식 때 입었던 상복이 멋지고 예뻐 보였다고 해맑게 조잘거리며 나에게 사진을 보여주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엄마의 사망 소식을 듣고 집에 왔는데 모든 게 다 끝나있고 엄마는 이제 집안 어디에도 없다. 조심스레 안방 문을 열었다. 엄마가 투병하며 오래 누워계셨던 침대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아빠한테 이상하게 요즘 한국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사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날 비행기 티켓을 사놨다고, 아무래도 엄마가 가시기 전에 부른 것 같다고 말씀드리니 아빠도 사실은 오랜 간병에 너무 힘드셔서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 주말에 엄마를 요양 병원에 모시기로 결심을 하셨었다고 했다. 그래서 요양 병원까지 다 알아봤었는데 또 막상 요양 병원에 엄마를 도저히 보낼 수가 없어서 마음을 돌리셨는데, 그 마음을 아셨는지 엄마는 며칠 후 우리 곁을 떠나셨다.

방에만 오래 누워계셨던 엄마였지만 엄마가 있었던 집과 엄마가 없는 집의 공기 무게는 사뭇 달랐다. 처음 2주 정도는 혼자 주무시는 아빠가 걱정돼서 마루 소파에서 쪽잠을 잤다. 혹시나 아빠가 밤에 깨셔서 마루에 나오셨을 때 아무도 없는 것보다는 그래도 누군가 사부작거리면서 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어차피 시차 때문에 밤에 잠도 잘 안 와서 마루에서 그동안 보고 싶었던 한국 드라마와 예능을 실컷 봤다.

아빠는 빠른 속도로 엄마의 짐을 정리하기 시작하셨다. 만약 엄마가 갑자기 돌아가셨으면 충격과 슬픔에 엄마의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끌어안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랜 기간 동안 누워계셔서 이미 오래전부터 엄마가 입으실 수 없었던 옷과 신발, 물건들이었기에 우리 가족은 엄마의 물건을 정리할 마음의 준비이미 되어 있는 듯했다.

이번에 집을 정리하고 청소하면서 본 부모님의 집은 8년 전 이사 오셨던 그때 그대로 머물러 있는 듯했다.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음식들과 먼지가 수북한 물건들, 오래된 책들과 함께 이미 내려앉은 책장. 그렇게 우리는 고여있던 시간을 치우기 시작했다. 소소한 물건을 사는 걸 좋아했던 엄마였기에 소소하게 쌓인 엄마의 물건은 꽤 많았고, 집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잘 버리는 아빠와 아빠를 뛰어넘는 버리기 선수인 내가 만나 집은 빠른 속도로 정리되어 갔다. 엄마의 물건은 사라지고 엄마의 물건이 그대로 담겨있었던 가구들도 처분해 집은 점점 비워져 갔다. 정리 후 깔끔해진 집을 보니 마음이 허전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후련하기도 했다. 


그렇게 엄마를 보내며 나는  달 동안 한국에 있었다.




오랜만에 한국에 오래 있으면서 가족과 시간을 많이 보내고 친구들을 여유롭게 만날 수 있었다. 서로의 근황을 물으며 한국에 들어올까 한다는 나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애가 있어서 애 교육 때문에 외국 사는 것도 아닌데 남의 나라에서 고생하지 말고 그냥 들어오라는 친구도 있었고, 한국은 망하기 직전이니 지금 있는 곳에서 더 악착같이 버티라는 친구도 있었다. 다 이해가 되고 다 각자의 방법으로 위안이 되는 고마운 말들이었다. 하지만 내 마음을 가장 움직였던 건 아빠의 말이었다.


"나는 네가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지 안다."


아빠의 한마디 말에 나는 울컥했다.


"외국 가서 사는 게 참 어렵다고 하더라. 남의 나라에서 이방인으로 살아남는 게 어디 쉽겠어."


이렇게 말씀을 시작하셔서 나는 아빠가 그만 돌아오라고, 그만큼 했으면 됐다고 말씀하실 줄 알았다. 이제 집에서 혼자 지내셔야 하니 돌아와서 같이 지내자고 하실 줄 알았다. 그런데 아빠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40대 초반이면 아직 한창이야. 넌 아직 너무 젊. 핀란드 대학에서 공부 시작해 봐. 공부 끝내고 그때 한국에 돌아오고 싶으면 돌아와도 늦지 않아."

 

"아빠, 공부 끝나면 40대 중반인데..."


"아빠가 살아보니 40대면 아직 젊어. 100세 시대인데 아직 한창이야. 괜찮아. 그리고 ***(남편)는 거기서 아직 공부해야 되는데, 남편이랑 떨어져 사는 거 아니야."


이제까지 내 결정으로 후회 없이 살아왔던 내 인생이었지만 요즘 들어 자괴감에 휩싸여 있었던 나는 그저 '괜찮다'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 같다. 그제야 머릿속에 고인 물처럼 정체되어 갇혀있던 생각이 조금씩 풀리면서 머리가 좀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해서 편도로 끊어서 왔던 항공권은 왕복 항공권이 되었다.


이번에 내가 맛본 한국의 여름은 그야말로 불지옥 같 마라맛이었다.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더위는 장마로 바뀌었고 계속되는 비에 습도가 확 올라가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더워도 건조하고 뽀송했던 유럽의 여름에 그럭저럭 적응이 되어가고 있던 나는 이 고온고습한 장마 폭탄에 물에 젖은 이불처럼 축축 늘어졌다. 잘 때 에어컨이나 선풍기를 틀면 또 슬슬 춥고, 끄면 숨 막히는 공기에 아침에 일어났을 때 이미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게다가 집을 계속 정리하느라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장마가 끝나고 이젠 좀 괜찮아질까 했더니 바로 폭염이 시작됐다. 축축한 장마보다는 나았지만 연일 35도가 넘나드는 폭염이 계속되니 이번에는 더위에 지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느새 한국은 에어컨 없이는 절대로 살 수 없는 여름이 되어 있었다. 언니는 농담처럼 이런 날씨에 적응하고 살아남는 한국인은 어디 가서든 적응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이번 여름의 폭우와 폭염에 치여서 매년 여름이 이렇거나 이보다 더할 거라고 생각하니 한국에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조금은 줄어들었다. 

게다가 내가 한국에 있는 동안 발생한 서이초 사건과 연이어 발생한 칼부림 사건들을 보니 한국에 돌아오고 싶은 생각은 점점 사라져 갔다. 경쟁과 비교에 사로잡힌 분노와 혐오가 상상초월의 기이한 갑질과 무차별 살인으로 나타나는 한국 사회의 모습에 나는 별일 없이 사는 핀란드로 얼른 돌아가고 싶어졌다. 특히 칼부림 사건 이후에는 밖에 나가기가 무서워졌고, 어딜 려고 버스나 지하철을 타도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국에 다시 들어오라고 하던 친구들도 칼부림 사건 후에는 나보고 돌아갈 곳이 있어서 좋겠다는 말을 했다. 몸도 마음도 스트레스를 받아 힘들었는지 독일에 살았을 때 발생한 이석증이 한국에서도 재발해서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나는 다시 핀란드로 돌아왔다. 여름인데도 20도 정도의 선선한 날씨와 고요한 분위기가 나를 맞이했다. 처음엔 이 평화로움이 너무나 좋았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정신없고 복잡한 곳에 있다가 갑자기 너무 고요해져서 그런지 그렇게 힘들게 헉헉대던 한국의 쨍하고 숨 막히는 여름이 이상하게 그리워지기 시작했고, 핀란드의 차분함이 뭔가 지루하고 심심하게 느껴졌다. 역시 순한 맛보다 마라맛이 중독성이 강 것인가. 아니면 스트레스를 받았어도 내 나라인 한국에 있다가 온 이곳에서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것일지도 모른다.

벌써 그리운 한강과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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