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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과카몰리 Dec 16. 2018

온전한 밤과 사슴
그리고 라나이

하와이의 작은 섬 라나이는 여전히 생장하고 있다.

숨을 뱉으러 파도 위로 올라오는 돌고래의 모습처럼,
생장을 위해선 누구에게나 온전한 밤이 필요하다.


지프를 빌려 타고 비 갠 후의 라나이 섬을 달렸다. 


호놀룰루에서 마주친 예상치 못한 비구름은 6개월에 한두 번 비가 내린다는 섬 라나이까지 따라왔다. 하와이 제도에서 여섯 번째로 큰 섬이자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던 척박한 땅.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의 배경이 되기도 한 이 섬은 마우이 섬의 서쪽 가까이 위치한다. 한때 거대 식품회사 돌 Dole의 세계 최대 파인애플 생산지여서 ‘파인애플 섬’이란 별명으로 불렸던 화산섬. 소프트웨어 브랜드 오라클의 CEO이자 2017년 기준 세계 7위의 부자로 꼽히는 래리 엘리슨 Larry Ellison이 섬의 97%를 매입한 후 라나이는 자연 친화적인 고급 휴양 리조트 관광지로 변하고 있다. 작고 아담한 라나이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저녁이었다. 이곳의 밤은 말 그대로 먹물을 쏟아부은 듯한 어둠이다. 면적이 싱가포르의 절반 정도 되는 이 붉은 섬에 포장된 도로는 고작 48km. 신호등도 대중교통 수단도 없다. 축축이 젖은 라나이에서 우리를 가장 먼저 환대해준 건 수십 마리의 사슴 무리. 차의 전조등 불빛 외의 어떤 빛도 침범하지 않아 동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던 찰나 눈앞에 작은 연녹색 불빛들이 총총 드러났다. 

“디어 트래픽.” 

운전기사가 차를 멈추자 족히 50마리는 되어 보이는 사슴 무리가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이 섬에는 3200여 명의 주민보다 더 많은 수의 사슴이 살지요.” 

라나이 섬에 처음 정착한 것으로 알려진 카메하메하 대왕에게 1850년경 선물로 들어오면서 살기 시작한 사슴은 개체 수가 늘며 사람보다 훨씬 많아졌다. 습기 찬 어둠 속을 두리번거리다 망설임 없이 길을 건너는 사슴들. 그것이 이섬의 첫인상이었다. 


새벽녘 어슴푸레 동이 트고 있는 라나이 섬. 화산재로 이뤄진 흙은 폭신폭신했다. 



라나이 섬은 빌 게이츠가 결혼식 때 파파라치를 따돌리기 위해 섬을 통째로 빌린 곳으로 유명세를 탔다. 그가 결혼식을 올린 포시즌스 리조트 라나이의 마넬레 골프 코스 12번 홀은 잭 니클라우스가 설계한 코스로 한쪽으로는 깎아지르는 해안 절벽이, 반대편으로는 라나이 섬의 명소인 푸우페헤 바위가 보이는 탁 트인 바다 풍광을 자랑하는 곳. 현재 하와이의 골프장 중 모든 홀에서 바다가 보이는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 골퍼라면 한번쯤 방문해야 할 성지 중 하나. 포시즌스 리조트 라나이는 레노베이션 중인 포시즌스 로지를 제외하면 현재 섬의 유일한 리조트다. 라나이에 오면 이곳에 묵을 수밖에 없는 구조. 역시 래리 엘리슨의 소유로, 초승달처럼 완만하게 꺾인 해안가 만 안쪽 조금 높은 지대에 바다를 포근하게 감싸듯 자리해 있다. 


라나이에 딱 하나뿐인 리조트 포시즌스 호텔 라나이. 울창한 자연 속에 들어온 듯한 조경이 인상적이다.


환영 인사로 건네주는 플루메리아 꽃을 엮어 만든 목걸이를 목에 걸자 꽃대궁에서 부드러운 버터 향이 훅 올라왔다. 213여 개의 객실과 45개의 스위트, 2개의 풀장과 9개의 레스토랑, 스파, 18개의 챔피언십 골프 홀로 구성된 럭셔리 리조트. 리조트보다 좀 더 위쪽 빌라 형태로 자리한 독채 가운데에는 엘리슨의 별장이 있다. 기본 룸이 1박에 100만원이 넘는 가격대지만 조용하고 한가로운 해변에서 프라이빗한 휴식을 원하는 이들은 하와이의 어떤 곳보다 라나이를 즐겨 찾는다. 그런 이들을 위해 엘리슨은 리조트의 정원을 자신의 정원에서 느낄 수 있는 이국적이고 싱그러운 정취를 공유할 수 있도록 비슷하게 꾸몄고, 객실의 실내 디자인이나 배치, TV 사이즈도 실제 그의 별장에서 사용하는 것과 동일하게 구성해 특별함을 더했다. 

“하와이, 일본, 프랑스 등 다양한 형태의 정원뿐만 아니라 리조트 내외부의 모든 식물을 관장합니다. 멸종 위기에 놓인 하와이 식생부터 라나이에서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종을 시도해보죠. 자급자족을 위한 농장을 운영하는 것과 더불어 재생 가능한 섬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에요.” 호텔의 조경 매니저 로버트 우드맨 Robert Woodman이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리조트를 제외한 자연 그대로의 섬은 흡사 아프리카의 초원, 황량한 구릉의 연속일 뿐 익히 아는 하와이의 우거진 식생과는 다른 양상을 띤다. 때문에 생긴 라나이 섬의 독특한 풍경 중 하나가 바로 쿡 소나무길이다. 1890년 라나이 섬에 이주한 뉴질랜드의 자연학자이자 코엘레 농장의 주인이었던 조지 먼로가 우연히 이곳에 심었는데, 이 나무가 잎에 수분을 머금었다 조금씩 떨어뜨려 땅을 적신다는 걸 발견한 것. 그 후 쿡 소나무를 건조하고 척박한 섬 전역에 심었고, 라나이 어디에서도 줄지어 자라난 쿡 소나무를 볼 수 있다. 조지 먼로의 이름을 딴 먼로 트레일은 섬에서 가장 높은 고도인 해발 1027m까지 올라가는 것으로 라나이 섬의 가장 유명한 트레일 장소다. “식생을 가꾸는 데 가장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자연친화적인 면모는 호텔 기둥, 연못의 잉어, 캘리포니아 새 보호 센터에서 데려온 앵무새들 등 곳곳에서 드러나지요.” 우드맨이 화석이 된 나무로 만들어 저마다 결이 다른 기둥을 가리키며 말했다. 


모든 홀이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오션뷰가 특징인 포시즌스 라나이 호텔의 마넬레 골프 코스는 잭 니클라우스가 설계했다.



바람이 모이는 신들의 정원

여전히 비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어 절경이라는 푸우페헤 바위의 일출을 목격하진 못했다.


다음 날 새벽 6시, 일출을 보기 위해 리조트에서 나와 해변을 따라 10여 분을 걸었다. 해변에서 이뤄지는 선라이즈 요가를 하러 나온 몇몇이 백사장에 어슴푸레 앉아 있었다. 홀로포에 비치를 지나 사랑하는 연인들의 안타까운 전설이 전해지는 하트 모양의 바위 푸우페헤가 보이는 절벽까지 다다랐을 때 우리는 모두 해돋이를 보지 못할 것임을 직감했다. 하늘과 풍경은 계속 푸른 잿빛이었다. 절벽 아래로 밀려드는 파도를 보며 하얀 파라솔 아래 반라의 남녀가 바다를 바라보며 늘어지게 누워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신선한 포케 볼(하와이 전통 음식)을 나눠 먹고 요가를 하고 신들의 정원으로 ATV를 타러 떠나는 이들을. 


날씨가 좋은 날엔 사진처럼 하트 모양을 닮은 푸후페헤 바위 위로 붉은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으레 하와이란 그럴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노르웨이가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꾸준한 라나이의 잿빛 뉘앙스는 이 섬의 해안가 어디에 떠 있다는 난파선처럼 어색하게 다가왔다. 리조트 내에서 하와이 스타일의 로미 로미 스파로 묵은 피로를 말끔히 풀었을 때에도, 신선한 생참치를 썰어 셰프와 함께 포케 볼을 만들어 먹을 때도, 중간중간 실내 요가 클래스를 챙겨 들을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하와이안 포케 볼 만들기

포시즌스 라나이에서 하와이안 포케 볼 만들기. 눈 앞에서 호텔의 레스토랑 셰프가 슥슥 썰어주는 생참치가 매우 신선했다.
해조류, 빻은 견과류 등을 넣어 담백한 스타일과 매콤한 마요 소스, 아보카도와 날치알 등을 곁들여 감칠맛 좋은 스타일 두 가지 포케 볼을 만들었다. 밥에 얹어 먹으면 꿀맛!



섬의 유일한 마을, 라나이 시티

섬에서 유일한 마을인 라나이 시티는 리조트에서 차를 타고 15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다. 해발 1027m 

라나이할레 산맥으로 둘러싸여 산 중턱쯤에 자리해 밤낮으로 기후가 서늘하다. 이곳에 3200여 명의 주민이 모여 산다. 아름드리 전나무들과 소담한 목조 가옥은 한적하고 고요하게 자리해 있다. 섬 내에 주유소 하나, 식당 몇 개, 경찰서와 교회, 은행, 카페, 작은 학교 등 삶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을 최소한으로 갖춘 풍경은 전혀 요란하지 않다. 여느 휴양지처럼 관광객 취향에 맞춰 바꾸거나 어색한 조화를 이루는 대신 본디 제 역할을 다하고 있을 뿐. 섬 전체가 한 개인의 소유이고 마을 주민 대부분이 엘리슨 소유의 회사에서 일한다. 그럼에도 불만을 갖기보다 대부분이 엘리슨을 반기고 고마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라나이를 돌보고자 하는 그의 비전을 믿기 때문이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를 간직한 라나이의 매력을 살리는 데 중점을 두고 태양열과 재활용 에너지를 사용하는 친환경적이고 재생 가능한 섬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이를테면 100% 친환경 커뮤니티로 경제적 활동을 가능케 하고자 하는 것. 이곳 사람들에게 원시적 바람처럼 섬의 풍요를 기원하는 일은 지나온 과거가 아니다. 교회에 모인 사람들이 이렇게 기도할 정도라고 하니까. “하늘에 계신 아버지. 미스터 엘리슨에게 은총을 내려주시옵고 그가 하는 일과 모든 계획을 도우시어 라나이를 풍요롭게 하소서.” 


라나이 시티는 한두 시간 정도 돌아보면 둘러볼 수 있는 아기자기한 마을이다.


시내 투어 후 라나이에서의 짧은 일정 중 마지막인 선셋 세일링을 하기 위해 항구로 향했다. 비가 흩뿌리고 있었지만 비구름 너머 있을 빛을 찾아나서는 여정. 요트 안에는 코나 맥주와 신선한 프티 푸르가 준비되어 언제든 먹을 수 있었다. 섬을 등지고 울렁이는 검은 파도를 30여 분 헤치고 갔을까, 선장은 선셋 대신 돌고래를 보여주겠다며 뱃머리를 돌렸다. 다시 라나이를 향해 동쪽으로 가는 길. 얼마 지나지 않아 경쾌한 몸짓으로 바다를 가로지르는 돌고래 떼가 나타났다. 모두가 그 힘찬 생명력에 기뻐했고 우리는 돌고래 무리와 비슷한 방향으로 함께 나아갔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라나이의 일부가 뿌연 장막을 친 듯 비구름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발길이 닿기 전 라나이 태초의 모습 같았다. 검은 파도와 비구름 속에서 숨 쉬는 화산섬. 다음 날 아침, 섬을 떠나기 직전 그토록 바라던 해가 쨍하게 뜨자 모든 것이 완벽히 연출된 영화 속 한 장면처럼 한순간에 바뀌었다. 두근거리는 라나이의 반짝이는 빛. 반라의 연인들. 그런데 왜일까 전날 보았던 비구름 속 라나이의 잔상이 계속 맴돌았다. 이 섬과 라나이 사람들이 사는 법, 인간이 자연과 공존하기 위해 다가가는 최선의 방식이 아닐까. 숨을 뱉으러 파도 위로 올라오는 돌고래의 모습처럼, 생장을 위해선 누구에게나 온전한 밤이 필요한 것처럼. 


*본 글은 <HEREN> 잡지 2017년 12월호에 쓴 글을 재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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