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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과카몰리 Nov 18. 2019

봄을 닮은 고양이

예방 접종하는 날 묘생 처음으로 봄을 보았고, 내 삶엔 봄이 찾아왔다.

겨울에 태어난 새하얀 고양이 슈네가 집에 온 지 한 달 정도 지났을 무렵, 우리 자매에게 미션이 주어졌다. 3차에 걸친 예방접종.

이 집에 온 후 처음 밖으로 나가는 고양이는 바깥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호수처럼 푸른 눈에 토끼 같이 쫑긋 세운 분홍 귀, 복슬복슬하게 솟아난 털의 여린 생명체. 여기에 주삿바늘을 꽂아야 한다는 것만도 마음이 아픈데 병원을 오가는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진 않을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최대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고 병원 후기도 꼼꼼히 찾아보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슈네라면 바깥세상을 재미있어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입양되던 날 집에 오자마자 마치 원래부터 제 집인 것마냥 돌아다니고 발라당 대자로 뻗어 자는 이 친구의 태평한 성격을 미루어 짐작해보면 외출도 흥미로워하지 않을까?


막상 병원 진료 디데이가 다가오자 고양이보다 집사가 더 떨고 있었다. 택시로 10분이 채 안 되는 거리. 이동장 겉을 담요로 둘러싸 시야를 가렸는데 슈네에겐 그게 더 답답했던 것 같다. 낑낑대는 소리를 내며 불안해하여 담요를 걷고 이동장을 무릎에 올려 창 밖을 보게 해 주었다. 휙휙 지나가는 차와 사람, 풍경을 보는 고양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세상에나 이게 다 뭐람!" 하는 듯이 호기심에 가득 차 고개도 왔다 갔다 하며 신나게 바깥 구경을 했다. 역시나, 이 친구는 모험가 스타일이었다.

병원에 내려서도 슈네는 용감했다. 몸집 큰 개들이 왈왈 짖는 환경에서 코를 킁킁대며 바깥 친구들을 구경했고, 데스크에서 예약명을 잘못 들어 '순대'로 예약되어 있었지만 하나도 기분 나쁜 기색 없이 씩씩하게 진료를 받으러 들어가는 모습은 늠름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이 작은 아이는 바늘에 꾹 찔릴 때 깨갱 한번 하더니 의사의 손이 멀어지자 금세 안정을 찾았다. 옆에서 집사만 "어떡해~~ 미안해~~" 호들갑을 떨고 있을 뿐.


1차 예방 접종 후 약기운이 도는지 봄볕을 받다가 어느덧 잠든 슈네.

주사를 맞고 돌아오는 길의 햇살은 무던히도 포근하고 따뜻했다.

"우리 바람 좀 쐬다 들어갈까?"

슈네는 아련한 눈빛으로 이동장 밖을 바라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우리는 집 앞 놀이터에 내려 빛이 따뜻하게 내려앉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연두색 새싹들 사이로 철쭉이 화려하게 피어있었다.

이제 시작하는 봄처럼 막 세상 밖으로 나온 고양이.

햇빛에 얇고 길어진 동공, 훈훈한 바람에 이따금씩 흔들리는 솜털, 신기한 듯 이것저것 건드려보는 몸짓을 보고 있자니 묘한 생동감이 느껴졌다. 평화롭고 신선한 시작의 기운.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시냇물 소리처럼 맑게 흘러 다니고 포근한 냄새가 주변을 맴돌았다. 십여분 정도의 마실이지만 함께 벤치에 앉아 까무룩 잠이 들기도 하고.

묘생처음 보는 꽃과 통성명하는 중. 철쭉은 독성이 있어 고양이가 먹었을 때 치명적이니 절대 먹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날 이후 슈네와 병원 가는 날은 부담스럽기보다 즐거운 일이 되었다. 작은 몸에는 압도적으로 느껴질 바깥 풍경에 쫄기보다 신기하게 관찰하는 아이, 병원에서 다른 고양이를 만나도 웅크린 채 얼음이 되기보다 먼저 손 내밀어 툭툭 인사하는 아이. 비록 주사 맞는 일은 끔찍이도 싫겠지만 그곳을 오가던 길의 기억만은 슈네에게 새로운 자극이 되어주었을 것 같다. 슈네는 처음 경험하는 봄의 기운을 어떤 모습으로 기억할까? 내년 이맘 때쯤이면 지난 시간을 떠올리며 봄을 기다릴까?

두 번째 접종 후 병원 근처 공원에 마실 나온 슈네. 팔뚝이 굵어지고 뽀시래기 시절에 비해 전체적으로 단단하게 자란 것이 느껴진다.

봄과 고양이와 낮잠.

이 세 단어의 공통점이라면 지난한 삶의 고됨을 잠시나마 잊게 해 준다는 것이 아닐까.

이쯤 되면 어른인가 싶다가도 여전히 방황하며 살아가는 삼십 대, 어떻게든 벌어먹고 살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은 이십 대 중반을 지나는 자매에게 다가온 따뜻하고 포근한 위로의 시간.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게 해주는 휴식 같은 존재들. 잿빛 같은 날들 속에서 눈송이처럼 새하얀 고양이는 우리에게 봄처럼 스며들고 있었다.


우리가 살아 있는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계와 다를 테니
그때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어 만나자

무심함을
단순함을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 만나자

저녁 빛이 마음의 내벽
사방에 펼쳐지는 사이
가득 도착할 것을 기다리자

과연 우리는 점 하나로 온 것이 맞는지
그러면 산 것인지 버틴 것인지
그 의문마저 쓸쓸해 문득 멈추는 일이 많았으니
서로를 부둥켜안고 지내지 않으면 안 되게 살자

닳고 해져서 더 이상 걸을 수 없다고
발이 발을 뒤틀어버리는 순간까지
우리는 그것으로 살자

밤새도록 몸에서 운이 다 빠져나가도록
자는 일에 육체를 잠시 맡겨두더라도
우리 매일 꽃이 필 때처럼 호된 아침을 맞자

-이병률, 이 넉넉한 쓸쓸함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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