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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사원 모모씨 Aug 05. 2023

내가 싫었던 하루

몇 년전 크리스마스 때, 소개팅을 한 적이 있다. 그 전날인 이브에는 만났다 하면 우울한 얘기만 하는 친구들과 밤새 술을 마셨다. 분명 핫한 곳에 가서 우리도 우리의 젊음을 제발 한번이라도 즐겨보자라고 모인 거였는데, 어딜 가도 사람이 너무 많고 정신이 없길래 또 집에 일찍이 들어왔다. 한껏 꾸민 채로 우울한 얘기만 했다. 그러다가 누군가 이럴 거면 화장을 지우고 옷도 갈아입자길래, 한껏 편한 채로 또 우울한 얘기만 했다.


누가 누가 더 우울한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생각이 어디까지 깊어질 수 있는지, 이렇게까지 생각한다고를 경쟁하는 식의 대화였다. 자랑을 하자면, 거의 언제나 내가 이긴다. 지금도 그렇다. 어쨌든 크리스마스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첫차를 타고 귀가했다. 집에서 쪽잠을 잤지만 단장은 열심히 했다.


날밤을 샌 거치고 컨디션이 나쁘진 않았다. 미리 골라둔 옷은 내게 찰떡이었고 머리 컬도 괜찮았다. 뾰루지도 나지 않았고 화장도 잘 먹었다. 밤 새 술 마신 거 치곤 몸 상태도 좋았다. 문제는 밤새 우울한 얘기만 한 기억들이었다. 소개팅 자리에서 난, 친구들과 떠들었던 우울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술은 거의 마시지도 않은 채 진지하게 말이다. 술이 덜 깼을 지도 모르겠다. 뜬금 없이 나의 심연을 드러냈다. 주선자 친구랑 10년을 넘게 알고 지내면서도, 그에게는 말하지 않았던 나의 마음들을 말이다.


명색에 크리스마스고 소개팅인데, 고민상담소가 되어버린 것이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또 나인 게 어쩔 땐 싫어요. 지겹잖아요. 내 성격이 내 불행을 만들죠. 모든 상황이 바뀌어도 나는 그대로인 거 잖아요, 그러면 결국 내가 문제인 거죠. 성격은 타고나는 거죠. 제 괴이한 마음을 아무도 이해 하지 못하지 않을까요. 슬픔을 나누면 배가 되죠 같은 것들.


다행히도 그 분은 착했다. 그걸 다 들어줬다. 그것도 아주 잘. 그래서 내가 우울의 심연을 더 깊이 파고 들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나보고 울면 시력이 좋아지는 말까지 해줬다. 굉장히 참신한 위로라 아직까지 기억한다. 지금도 종종 울고 나서 시력 좋아졌겠네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 자리에 5시간 가까이 있었는데, 거의 일방적으로 내가 맘에 안 드는 나의 성격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불행에 관해 토로하고 그는 위로하는 식이었다. 몇 년이 지나도 내 말을 듣던 그의 태도가 기억난다. 얼굴은 당연히 기억이 흐릿한데, 그 태도만은 잊히지 않을 것 같다. 그게 꽤 부러웠기 때문이다. 나의 어떤 말에도 공감하지 못하는 것 같은 그의 태도가. 그래도 차분히 나와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들어주며 어떻게든 위로해주려는 그가, 너무, 너무너무 부러웠다.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는 완벽한 타인이었다. 그는 이 감정을 모른다. 느껴본 적이 없다. 앞으로도 모를 것이다. 어쩌면 영영. 세상에 그런 사람도 있었다. 그는 내가 얼마나 괴롭고 외로운지 모른다. 내가 삶을 가끔은 어떻게 얼마나 힘들게 버티고 있는 지 가늠하지 못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시간을 쓰고 있는 지도. 그래서 그는 날 동정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내 말을 크게 불편해 하지 않고 다섯시간을 내리 들어줄 수 있었을 지도. 모르니까. 알 수가 없으니까. 겪어본 적도 없고, 짐작도 안되고. 한창을 떠들고 나서야 후회했다. 괜히 말했다고. 이제껏 잘 사람 봐가면서 고백한 나의 맘을, 오늘 뭔 바람이 들어서! 갑자기?


실컷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그것도 크리스마스에, 우는 얘기만 5시간 쏟아냈으면서, 위로와 격려도 잘만 받아놓고 나는 집에 오는 길 내내 그냥 화가 났다. 그를 시샘했다. 잘 들어갔냐는 그의 카톡을 미리 보기로 읽고 답하지 않았다. 혹여 전화가 올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폰도 꺼버렸다. 눈을 감고 맘속으로 또 펑펑 울었다. 내가 싫었다.


그렇다고 주선자 친구와의 인연을 망칠 순 없었다. 소개팅한 사람에게도 예의가 아니었다. 집에 도착해서 좀 누워 있었다. 감정을 좀 가라앉힌 후 핸드폰을 켰다. 그에게 1시간 텀으로 잘 들어갔냐고 카톡이 와있었다. 부랴부랴 폰이 꺼졌다고 미안하다며 답장을 했다. 귀가하는데 2시간이 넘게 걸렸다고 짐작하길 바랐다. 어땠냐는 주선자의 카톡에는 뭐라 말할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냥 코가 맘에 안들었다고 했다. 생각해보니 코가 내 스타일이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주선자가 다시는 소개를 안시켜주겠다며 내게 욕을 했다.


최악의 크리스마스다. 이제 소개팅 안 할 거야. 짜증나. 나만, 또 나만, 엉망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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