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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g Jan 25. 2018

룸 : 공분을 넘어 일상화된 용기로  


16년 3월 5일, 신의진 의원이 검색어 순위 상위권에 올랐다. 선거운동을 위해 그녀가 건 현수막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이 나영이의 주치의이었다는 사실을 플랜카드에 밝혔다. 나영이와 그 부모에게 동의도 구하지 않은 홍보물이었다. ‘조두순 사건’의 피해자인 그 ‘나영이’다. ‘조두순 사건’의 피해자는 십여 년이 지나 ‘선거 홍보물’에 의해 회자되었다. 피해자의 아픔은 언제나 이렇게 이용당한다. 그들을 도왔다는 ‘선의’의 인물들과 그 사건을 궁금해 하는 대중들의 ‘관음’ 사이에서 2차, 3차 피해가 발생한다. 그들이 짊어져야 할 고통과 상관없이 그들의 사건은 언제나 ‘관심’이란 이름으로 소환된다. 하지만 이런 식의 기억법에는 피해자를 위한 진정한 배려가 존재할 수 없다.
     
앞서 말한 정치인만큼은 아니지만 영화 역시 필연적으로 현실을 소환해야 하는 입장이다. 모든 현실은 영화의 재료가 되며, 자극적이고 엽기적 사건일수록 영화 창작자에게 재가공될 가능성은 높다. 그렇기에 영화는 언제나 도덕적 함정에 봉착해 있다. 영화를 통해 사건을 공론화하는 것은 공익인가? 아니면 피해자들의 아픔을 이용해 사사로운 이익을 얻을 뿐인가? 어쩌면 우리는 ‘공익’과 ‘선의’의 이름으로 후자와 같은 방식으로 일관했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입 밖으로 꺼내기 불편한 장면을 시각화했고, 이를 통해 우리는 피해자의 아픔을 ‘눈물’과 ‘쾌감’으로 소비해 왔다. 피해자의 아픔에 눈물을 흘렸고, 그들이 가해자를 용서하거나 처벌하는 방식을 통해 ‘통쾌함’을 느꼈던 우리의 태도에서는 피해자들의 아픔에 대한 진정한 공감은 존재하지 않는다. 
    



최근 개최된 제 88회 아카데미 영화제에도 실화를 바탕으로 한 많은 영화가 후보로 올랐다. 특히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룸>은 그중 가장 충격적인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이다. 24년간 자신의 딸을 감금하고 성폭행했고, 그 사이에서 7명의 아이들을 만들었던 사건. ‘엽기’라는 단어 외에는 묘사할 방법이 없는 이 충격적인 사건은 2008년 밝혀진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프리츨사건”이다. 이 실화는 소설로, 그리고 다시 영화로 각색되어 2016년 우리 앞에 등장했다.
     
몇 번의 구글 검색만으로도 피해자와 가해자의 얼굴, 그리고 그 사건이 일어난 지하 감금실을 찾아볼 수 있는 현실 속에서, 이 영화가 관객의 눈물과 분노를 유도할 것이라 예상됐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영화는 선정적 방식으로 사건을 소환하지 않았다. 비극적 사건을 다뤄왔던 종전의 영화에 존재했던 ‘눈물’은 결정적인 순간에만 나타난다. 가해자에게 가해진 처벌도, 혹은 그들을 용서하는 피해자들의 ‘관대함’은 존재하지 않았다. 영화는 대신 철저하게 두 주인공, 엄마 조이와 아들 잭에 집중했다. 사건을 ‘타자화’해 관객들의 눈물을 짜내는 방식보다, 비극적 사건을 이겨내고 치유해 가는 두 주인공의 성장 이야기에 집중한 것이다. 
   
 



이를 위해 영화는 피해자였던 5살 꼬마 아이 잭의 시선을 이용한다. 고통을 겪은 피해자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 아닌, 피해 당사자의 눈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특히 자신이 겪은 일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비극적인 사건인지 인지하지 못하는 아이의 순수한 시선에 따라 극이 진행되면서 통상적인 비극의 불편한 장면들은 사라진다. 왈가불가 사건에 대해 떠들어 대는 주변인들의 이야기도, 선의란 이름으로 피해자 주변을 맴도는 제3자의 모습도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피해자의 심경과 주변의 과도한 관심이 피해자에게 얼마나 큰 고통이 될 수 있는지를 담담히 그려낼 뿐이다. 
 




특히 엄마 조이를 대상으로 한 언론의 인터뷰는 비극을 소비하는 사회의 관심이 얼마나 잔혹한지 보여준다. 5살 잭이 보는 앞에서 방송기자는 어머니에게 묻는다.
     
“왜 아이를 탈출시키지 않고 4년간 함께 지내며 유년시절의 아들이 응당 가져야 할 행복을 빼앗았습니까?”
“숭고한 희생을 하지 않는 당신은 진정한 어머니라 할 수 있습니까?” 

     
사회의 시선은 사건의 피해자로부터 ‘타자화’된 비극을 소비하려고 한다. 그들에게 비극은 비극으로 영원히 남아야 한다. 결국 조이는 그날 밤 자살을 시도한다.
   


 
작은 방으로부터 탈출에는 성공하지만 비극은 끝나지 않는다. 작은 방에서는 탈출구이자 희망이었던 바깥세상은, 도리어 탈출구와 희망을 찾을 수 없는 거대한 감옥이 된다. 모자의 집을 둘러싼 대중의 관심 속에서 둘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이제 그들 앞에 기다리는 것은, 엽기적인 사건의 비참한 주인공으로 낙인찍혀 ‘비극의 주인공’으로 살아가야 하는 현실이다. 작은 방 안의 말 할 수 없는 고통도 이겨낸 억척같은 어머니는, 그토록 바랐던 바깥세상의 잔혹한 시선 앞에서 무너졌다. 
    


하지만 어머니는 다시 일어선다. 그런 어머니를 이끄는 건 물론 아들 잭이다. 어머니의 자살시도를 계기로 잭 역시 그동안 다가가기 어려웠던 세상에 한발 더 다가가려 노력한다. 그동안 자신을 가두었던 벽 바깥의 사람들과 어울리고, 그 동안 겪어보지 못했던 세상을 체험하려 한다. 이런 아이의 용기에 어머니 역시 벽 너머로 발걸음을 옮긴다. 자신들을 가두었던 ‘작은 방’, 즉 세상의 시선이 만든 감옥을 걷어낸 모자는 ‘비극의 주인공’이라는 굴레를 벗어 던진다.
     
이 영화의 미학은 여기에 있다. 자극적인 이야기이지만, 영화는 인생에 존재하는 불가항력적인 비극 속에서 성장을 극의 중심으로 가져온다. 고통과 낙오를 처참한 방식으로 그리는 대신, 아픔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전달한다. 조이와 잭에게 일상화된 고통 속에서, 그것을 이겨내는 ‘일상화된 용기’를 담담하게 그려낸다. 이런 전개를 통해 타인의 슬픔을 대하는 사회의 자세 또한 달라져야 함을 역설하기도 한다. 진부한 ‘신파’와 ‘공분’의 기억법을 넘어, ‘선의’로 포장된 ‘잘못된 관심’을 넘어,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고 이해하는 성숙한 시선이 필요함을 <룸>은 보여준다.
     
영화의 마지막, 모자는 수년 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감금실을 다시 찾아간다. 평생을 그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잭에게 그 방은 세상의 전부였고, 그만큼 영화의 초반부 그 방은 크게 그려졌다. 하지만 벽 너머 나아가기로 결심한 잭에게 그 방은 이제 초라하고 작은 방일 뿐이다. 한참을 방을 서성이다 잭은 엄마 조이에게 묻는다. “이 방이 우리 방이었어? 왜 이렇게 줄어들었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잭은 방에 있는 모든 사물과 작별인사를 나누며 그곳을 떠난다. 관객들도 비극적인 사건을 기억하는 대신, 잭의 시선을 따라 작은 방을 되짚는다. 그리고 우리에게 남는 것이 비극과 슬픔이 아님을 깨닫는다. 영화 <룸>은 아픔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성장에 관한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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