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존재론의 부조리함을 드러내기 위한 '블랙 코미디' 장르를 비틀어, 연상호 감독은 국가 권력과 시장경제의 부조리함을 드러낸다. 그간 날 선 비판의식을 통해 깨어있는 영화를 만들어 왔던 연상호 감독의 신작 <염력>은 무거웠던 기존작품과 다르게 웃음을 통해 환멸과 냉소를 표현한다.
일찍이 사업 실패로 자신의 소시민적 운명을 받아들인 류승범은 자신의 아내가 죽은 날 얻은 염력을 통해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기 시작한다. 이미 몸에 체화된 수동적 인생관이 발목잡지만, 그는 끝내 재개발 현장에서 싸우고 있는 가족과 공동체를 지키기로 결심한다.
전작 <부산행>의 주인공이 현실에 맞서 싸워 가족을 지켰다면, <염력>의 주인공은 비판적 현실에 맞서 싸워 현실을 전복하고, 나아가 가족은 물론 공동체까지 지켜낸다. 전작 <부산행>에서 영화적 설정이 좀비같은 외부환경이었다면, <염력>에서의 영화적 설정은 주인공 능력과 동치된다.
강력한 능력을 지닌 히어로를 통해 연상호 감독은 전작보다 더 능동적인 세계관을 영화에서 구현한다. 사회를 적극적으로 변화시키는 연상호의 연출은 기존 그의 초-현실적 세계관과 사뭇 대조된다. 차가운 현실에 부딪혀 끝내 완벽한 해피엔딩을 쟁취할 수 없었던 기존 주인공에 비해, <염력>의 긍정적 결말은 상업적 색채가 강하다.
초월적 능력을 가진 영웅이 통쾌하게 악을 무찌름으로써 극적 효과는 증가되었지만, 기존 세계관과 다른 미화된 결말이 존재한다는 지점에서 연상호 감독은 '상업화되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떠오르는 9년전 기억
주인공이 가진 능력의 판타지성에 비해 현실을 묘사하는 그의 방식은 철철히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재개발 지역에서 자신의 터전을 지키려는 철거민과 이를 무너뜨리려는 시장경제와 공권력을 대척점에 두어 꽤나 익숙한 현실 광경을 재현한다.
이에 더해 연상호 감독은 여러 가지 상징을 통해 9년 전 발생한 용산참사를 영화 내내 오버랩 한다. 철거민들이 세운 망루와 망루를 뚫기 위한 경찰의 컨테이너 작전, 대치 중 발생한 화제와 목숨을 잃을 뻔 했던 젊은 경찰, 그리고 공권력을 동원해 결국 철거했지만 여전히 공터로 남아있는 재개발 부지까지.
상업적 색채를 띤 영화적 결말은 비판받을 수 있으나, 연상호가 보여주는 사회적 시선은 여전히 용감하다. 하지만 사회 고발성 영화가 하나의 장르가 되어버린 지금, 그가 보여주는 현실 묘사는 전작에 비해 날카롭다고 할 수 없다.
류승룡 x 심은경
연상호 감독의 전작이었던 <서울역>에서 부녀역할을 했던 류승룡과 심은경은 이번 영화에서도 같은 관계로 출연한다. <손님>, <도리화가>의 실패 이후 오랜만에 스크린을 찾은 류승룡은 자신을 주연급 배우로 부각시킨 <내 아내의 모든것>에서 보여준 능청스런 코믹연기를 소화한다.
눈에 보이지 않은 '염력'을 표현한 그의 코믹한 연기는 관객을 즐겁게 만든다. 웃음과 특수효과 속에서 심은경은 영화 전반의 감정선을 이끌어가는 역할을 자연스럽게 소화한다. 중요 시퀀스마다 보여주는 그녀의 감정선과 씩씩한 모습은 빈약한 플롯을 대체하며 관객들을 영화 속 이야기로 끌어주는 매개가 된다.
두 주인공의 적극적인 역할에 비해 상대적으로 영화 속 악역의 역할은 제한적이다. 건설사의 간부로 나오는 정유미와 그녀의 대사가 문득문득 통찰적이지만, 좋은 히어로물에서 볼 수 있는 입체적 악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연상호의 만화적 상상력과 통찰력은 유효하다
권선징악의 플롯과 입체적이지 못한 구성이 아쉽지만, 히어로를 통해 현실 사건을 재구성하는 연상호 감독의 시도만큼은 용감하고 개성있다. 의지만으로 절대 되지 않았던 현실의 바람이 연상호가 구현한 세상에서는 가능하다. 무고한 사상자가 존재하는 고통스런 현실이, 어떤 희생자도 없는 영화적 시간으로 치환된다. 어쩌면 그것이 연상호 감독이 세상에 던질수 있는 최소한의 영화적 위로일 것이다.
결국은 공권력과 자본의 논리에 의해 자신의 터전에서 쫓겨났지만, '병맛'같은 초능력을 통해 철거민들은 새롭게 살아갈 희망을 가지게 된다. 세상의 전복까지는 아니더라도, 가끔은 이 정도의 허구적 상상력만으로 우리는 충분하다. 여전히 영화 존재와 연상호의 만화적 상상력과 통찰력은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