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th 전주국제영화제 코리아 시네마 상영작
얼마전 전주국제영화제를 다녀왔습니다. 정형석 감독의 장편영화 '페르소나 이상한 여자'를 보고 생각이 많아져 글을 남깁니다[1].
적나라한 스포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나서 해석이 필요한 분들을 위한 글입니다. 저만의 해석(Opinion)과 함께, GV에서 나온 이야기(Fact)도 포함하였습니다. 영화의 풍미를 느끼는데 도움 되시기 바랍니다.
1. 영화의 구조
2. 영화의 메시지
1) 혼술의 의미; 자신과의 독대가 사라진 세상
2) 그녀가 카메라 렌즈를 응시한 이유
영화의 구조를 먼저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왜냐하면 친절한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현실(스토리A)과 비현실(스토리B)를 교차한 다음 의도적으로 그 경계를 지운(스토리C) 영화입니다. 저는 C를 보고 영화를 다 이해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이것이 착각이란 걸 GV 덕분에 알았습니다. 허허.
스토리A = 현실에 해당합니다. 정해영(박호산) 연극연출가는 대학로 연극판의 부조리에 염증을 느끼는 한편, 한 카페 알바생의 표정에서 영감을 받아 작품(스토리B)을 씁니다. 작품명은 ‘이상한 여자’입니다.
스토리B = 비현실에 해당합니다. 스토리A의 정해영 연출이 쓰고 있는 작품 ‘이상한 여자’의 본체입니다. 정해영 연출이 운영하는 대학로 극단에 서울대생 정혜리(전혜연)가 찾아오며 이야기가 시작합니다.
스토리C =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의도적으로 지워져있습니다. 관객은 정해영 연출과 서울대생 정혜리를 포함한 모든 인물이 등장하는 공간이 현실이라고 느낍니다. 결말에 다다라서야 현실과 비현실을 눈치챌 수 있는 힌트가 나옵니다(영화 식스센스를 생각하면 되겠네요).
영화를 보셨으니 내용을 자세히 서술하진 않았습니다. 혹시 영화 구조를 지금에야 깨달으셨다면, 위 내용을 참고해서 장면을 되새김질 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재미있는 발견이 꽤나 많을 겁니다.
A인지 B인지 명확히 구별되는 장면도 있지만 A인지 B인지 여전히 모호한 장면도 있습니다. 모호한 부분은 각자의 해석에 맡겨두더라도, A에 등장하는 정해영 연출이 어떤 마음으로 B를 썼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이 영화의 진짜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정해영(박호산) 연출은 현실과 비현실에 모두 등장합니다. 현실의 정해영 연출을 정해영 연출A, 비현실의 그를 정해영 연출B라고 표현하겠습니다[3].
정혜리는 정해영 연출A의 페르소나입니다[4]. 본인의 어린 시절을 닮은 가상의 인물이지요. 정해영 연출B가 정혜리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정해영 연출A가 자문자답하는 것이라 보아도 무방합니다.
정혜리가 정해영 연출B에게 묻습니다. “연출님은 예술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정해영 연출B가 말합니다. “혼술?”
혼술은 자신과의 독대를 의미합니다[5]. 네이버 국어사전에 따르면 독대는 ‘어떤 일을 의논하려고 단둘이 만나는 일’입니다. 예술은 어떤 일을 의논하려고 자기 자신과 단둘이 만나는 일이 되겠군요.
여러분은 종종 자기 자신과 단둘이 만나시나요? 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밖에서 답을 찾고 배움을 구했죠. 이런 제 성향을 기특하게 생각해왔는데, 아무리 배움을 구해도 삶은 혼란스럽기만 했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과 도대체 어떤 일을 의논해야할까요? 저는 이 영화가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해영 연출B와 정혜리의 독대 장면을 통해 정해영 연출A는 자신이 누구인지 자문(自問)하고 있습니다. 예술가가 자화상을 그리는 행위와 동일합니다. 법정스님이 말씀하셨다죠.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으라.’[6]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으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 경험을 말씀드리면, 최근 몇개월 시간이 생겨 제 자신과 대화를 나누었고 덕분에 혼란스러웠던 많은 것들이 정리되었습니다.
자신과의 독대가 사라진 세상입니다. 이것이 비단 요즘만의 문제는 아니었지만, 우리를 둘러싼 빅데이터가 이를 손쉽게 방해하는 건 맞는 것 같습니다.
예술가가 자화상을 그리듯
정해영 연출A가 ‘이상한 여자’를 쓰듯
정형석 감독이 영화 '페르소나 이상한 여자'를 만들었듯
여러분도 자신과 독대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이 영화에서 부조리는 꽤나 중요한 키워드입니다[7]. 정혜리는 정해영 연출A가 본인을 둘러싼 세상의 부조리를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낸 페르소나이기도 합니다.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내용은 제 해석이 강하게 반영되어있습니다.
영화 마지막 장면은 정혜리가 카메라 렌즈를 응시하며 끝납니다. 비현실 속 정혜리인지 현실 속 카페 알바생인지 모호하지만, 저는 비현실 속 정혜리라고 해석합니다.
정혜리는 본인의 본래 이름(김지숙)을 버리고, 서울대 학위로 누릴 수 있는 것을 포기하고 대학로 연극판에 찾아왔습니다. 본인이 살던 세상의 부조리에서 벗어나 본성을 따르는 자유를 얻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연극판에서도 또다른 부조리를 경험하고 힘들어 하다가, 어느날 강렬한 햇빛에 이끌려 그곳을 떠납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갑자기 증발해버립니다.
정혜리는 정해영 연출A가 창조한 페르소나입니다. 정혜리의 행동은 정해영 연출A의 선택과 닮았습니다. 혜리가 사라진 다음 장면에서, 정해영 연출A는 절필을 선언합니다. 혜리를 증발시킨 뒤 절필을 선언한 정해영 연출A 때문에 ‘이상한 여자’는 미완성으로 남습니다.
증발한 혜리와 절필을 선언한 해영은 부조리를 느껴 절망한 인간으로 보입니다. 알베르 까뮈는, 부조리한 세상에서 인간은 다음 3가지 즉, 자살(절망), 반항, 희망(자기기만) 중 반항하는 것을 선택해야한다고 했습니다[8,9]. 알베르 까뮈의 바람과 달리 이 영화는 인간의 절망을 보여주며 끝나는 걸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절필을 선언하고 내려오는 길에서 정해영 연출A는 본인에게 영감을 주어 ‘이상한 여자’를 쓰게 만든 카페 알바생을 쳐다봅니다. 무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하다 찰나의 미소를 짓습니다.
그리곤 상상합니다.
증발한 혜리는 어딘가에서 카페 아르바이트를 한다. 혜리는 카페 테이블을 닦다가 손님이 놓고간 책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을 펼쳐 읽는다.
정해영 연출A는 이방인을 읽던 정혜리가 고개를 들어 카메라 렌즈를 응시하도록 함으로써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정혜리가 카메라 밖의 세상을 인지했단 사실은, 그녀가 더이상 작품 속 등장인물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혜리는 정해영 연출A의 페르소나가 아니라 정해영 연출A 그 자신이 된 것은 아닐까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에 스스로 답한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카메라 렌즈를 응시한 혜리를 클로즈업한 마지막 장면은 이 모든 것에 대한 메타포일 것입니다.
알베르 까뮈는 부조리한 세상에서 반항하는 인간이 되라고 했습니다[9]. 부조리를 직시하고, 삶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살라는 것입니다.
정해영 연출A는 (부조리와 삶의 무의미에 현타를 느껴 방금 전 절필을 선언한 것에 무색하게) 결국 메타포로써 ‘이상한 여자’ 이야기를 완성했습니다. 아무 의미없는 작품이지만 그냥 완성했습니다. 그렇게 앞으로도 아무 의미없는 작품 활동을 계속 할 겁니다. 이것이 까뮈가 이야기한 부조리한 세상을 향한 반항이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영화 ‘페르소나 이상한 여자’는 부조리한 세상에서 반항하는 한 예술가를 보여준 영화라 할 수 있습니다.
[1] 페르소나 이상한 여자 Persona a strange girl | 감독 정형석 JUNG Hyungsuk | 24th JEONJU IFF OFFICIAL TRAILER https://youtu.be/-4ddkDG-sCo
[2] 김후인 "137년만에 찾은 반 고흐 '자화상'…'농부 여인의 초상' 뒤에 숨어있었다" 서울경제. 2022.07.16. https://n.news.naver.com/article/011/0004076828
[3] 정형석 영화감독은 박호산 배우에게 정해영 연출A와 B를 동일하게 연기해달라고 주문했답니다. 하지만 박호산 배우는 살짝 톤을 다르게 연기했다고 하네요(관객이 쉽게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만).
[4] GV에서 감독님이 말씀해주셨습니다. 영화 제목이 ‘이상한 여자’가 아니라 ‘페르소나 이상한 여자’인 이유입니다.
[5] 저는 혼술의 의미를 몰랐는데, GV에서 박호산 배우께서 한말 덕분에 이해했습니다. 예술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묻는 관객에게 박호산 배우는 ‘거울’이라고 답하며 ‘혼술’과 같은 뜻이라고 덧붙였습니다.
[6] 네이버 블로거 더위사냥. ‘명상책 추천 ㅣ 산에는 꽃이 피네, 법정스님’ 2023.03.26. https://m.blog.naver.com/arumuzzang/223055609147
[7] GV에서 정형석 감독님이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이 영화를 한 줄로 줄이면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의 예술가의 고뇌'이다."
[8] 유튜브 지혜의 빛 : 인문학의 숲. “알베르 까뮈 - 부조리한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 2022.02.01. https://youtu.be/_yuiN0U4HIg
[9] 유튜브 5분 뚝딱 철학. “나는 반항한다. 고로 존재한다.” 2022.04.13. https://youtu.be/EMxxuzgJ6N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