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극장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도현 Mar 14. 2023

현기증


그리스의 영웅 테세우스가 긴 여정을 마무리하고 고국으로 돌아온다. 아테네 사람들은 그를 기리기 위해 그가 타고 온 배를 수백년간 보존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배가 점점 낡자 그들은 썩은 나무판자를 떼어내고 보다 튼튼한 나무판자를 그 자리에 박아넣었다. 그런 식으로 하나 둘씩 나무판자들을 교체하다보니 어느새 배에는 테세우스가 출항했을 당시의 나무판자들이 한조각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배를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를 수 있는가. 반대로도 생각해볼 수 있다. 테세우스의 배에서 떼어낸 나무판자들을 버리거나 태우지 않고 다시 원본 모습 그대로의 배를 그 옆에 만들었다고 치자. 이제 배는 두 척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배가 테세우스의 배인가.


사물의 본질은 규정될 수 없으므로 결국 인식의 한계를 벗어난다. <현기증>은 이 형이상학적 역설을 놀라운 방식으로 스크린 속에 재현한다. 알프레드 히치콕이 그의 필모그래피를 통해 거의 완벽에 가깝게 연마한 장르적 문법과 관객 심리학은 이 영화에서 정점을 찍는다. 기본적으로 범죄 스릴러와 로맨스의 장르를 표방하나, <현기증>은 어느새 그 틀을 넘어서 그 어떤 영화도 가보지 못한 지점에 도달하고 만다. 은퇴한 형사 존 스코티 퍼거슨의 시선을 따라 전개되는 전반부는 그가 친구의 의뢰를 받아 그의 아내인 매들린 앨스터를 미행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녀는 그의 남편의 말마따나 뭔가에 홀린 듯이 샌프란시스코 등지의 미술관과 교회, 공동묘지, 수녀원 그리고 호텔 등을 떠돌아다닌다. 그 동선은 19세기에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이민자 여성 카를로타 발데즈의 것을 따른다. 그가 모르는 것은 관객들도 모르므로, 순차적으로 입수되는 정보에 따라 모든 것을 추측할 뿐이다. 따라서 앨스터가 사건을 의뢰할 때 넌지시 던졌던 힌트 - 매들린이 유령에 의해 정신을 지배받고 있는 것 같다 - 로 인해 달리 명확한 논리가 없어보이는 매들린의 행방은 초자연적으로 다가오며, 스코티 또한 그 이론에 점점 동화된다. 이후 카를로타에 대한 사연을 알게 된 스코티는 그녀의 후손인 매들린에게도 자살 충동이 있음을 유추하고, 덕분에 그녀를 구하게 된다. 여기까지 이르는 동안 스코티는 스스로의 이성에 대하여 의심이 없었을 것이다. 그는 수년의 수사 경력을 보유한 베테랑 형사이며 눈 앞에서 목격한 몇가지 단서들 - 초상화와 매들린과의 유사성, 그녀의 수상한 행동패턴, 카를로타와의 가족 관계 등 - 을 토대로 앨스터와 상반되는 이론을 만들어낸다. 즉, 매들린은 한 세기 전 불행한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었던 그녀의 조모에 대한 죄책감과 연대 책임에 과몰입한 나머지, 스스로를 카를로타로 여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스코티는 매들린을 카를로타로부터 분리시켜 이 이상한 현상의 실체를 정확히 포착한다. 정신분석학에 의거한 그의 이론은 제법 이치에도 맞아 보이며, 그는 실제로 그 사고의 연장선상에서 매들린을 추적한 끝에 그녀의 익사를 막는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그가 매들린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이태껏 냉철한 관찰자로 존재했던 스코티는 어느새 스스로와 그녀와의 경계를 이전처럼 엄격하게 세우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이 둘은 금지된 사랑을 나누게 되지만, 그 순간 카를로타의 유령이 되살아나 매들린의 목숨을 빼앗아간다. 영화는 이성적이었던 스코티를 감정의 포로로 만든 후 그를 폭력적으로 뒤흔들어 놓는다. 잇따른 재판에서 그녀의 죽음은 스코티의 증언들이 뒷받침하는 그의 이론 - 매들린은 정신병으로 인해 자살했다 - 이 채택되면서 신속히 마무리된다. 법관들과 배심원들 그리고 미행을 의뢰했던 앨스터까지도 사건을 깨끗하게 정리하지만, 오직 스코티만이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는 죽어버린 매들린에 완전히 사로잡히게 되다. 매들린의 생전에 그녀를 미행했던 경로를 헤매며 그는 그 시간들을 머릿속에서 반복시킨다. 유령은 그렇게 스코티에게 전이된다.


이 시점에 스코티는 이미 관객의 입장에서 믿을 만한 화자가 아니다. 그는 본 사건의 충격으로 인해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했으며, 이후에도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매들린을 처음 보았던 레스토랑인 어니스에서 그녀의 환영에 시달린다. 눈의 초점이 흔들리면서 초현실적인 이미지들이 그의 의식 속으로 난입하는 모습을 히치콕은 애니메이션 시퀀스까지 동원하여 보여준다. 주디는 그러한 맥락 속에서 그의 서사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영화의 중반부가 넘어서 등장하게 되는 주디라는 여성은 매들린과 묘하게 닮은 인물인데, 이 둘의 유사성은 불완전한 화자인 스코티가 보이는 확증편향적 태도 때문에 오히려 신뢰를 잃는다. 정신 상태로 본다면 주디는 누구보다도 정상적이며, 그녀는 자살 충동에 시달렸던 매들린은 물론, 과거의 환상에 볼모로 잡힌 스코티와도 대비된다. 반대로 스코티의 사고체계는 오염되었으므로, 그가 적극적으로 주디에게 구애를 하는 그 과정 속에서 관객은 은연 중에 몰입의 대상을 스코티에서 주디로 전환하게 된다. 스코티를 향해 또박또박 자신의 신원을 밝히는 그녀의 모습에서 우리는 누구의 말을 더 믿어야 할지 마음 속으로 정하게 된다.


때문에 스코티가 떠난 후 그녀가 밝히는 사건의 진상을 듣게 될 때 우리는 이를 침착하게 받아들인다. 사실 주디는 매들린이 맞았고, 그녀는 앨스터의 사주를 받고 그의 아내처럼 행동하여 스코티로 하여금 거짓 알리바이를 서술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의 전반부를 장식했던 19세기 유령과의 추격전은 그 순간에 그저 비열한 치정극에 불과했다는 점이 드러난다. 탐정 소설에서도 곧 잘 쓰이는 이 수법을 통해 <현기증>은 장르의 궤도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그 안정성을 기반으로 서술자인 주디에 대한 의심도 거두어진다. 그녀가 자신의 고백을 담은 편지를 결국 찢어버리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히치콕은 진실이 스코티에게 전달되지 않았음을 관객들 앞에서 명백히 하는 동시에 주디의 진정성 -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편지를 찢을 이유도 없다 - 을 확보한다. 이 시점에서 영화는 인식론적으로 갈라지게 된다. 첫번째는 주디와 매들린을 동일 인물로 보는 관점이며, 이는 주디 본인 그리고 관객들의 인식과 일치한다. 두번째는 이 둘이 전혀 다른 두 인물이라고 보는 관점이며, 이는 스코티의 인식과 일치한다. 따라서 단순한 앎과 모름의 차이로 발생하는 인과로만 예측해보자면, 이야기는 여기서 종결되어야 마땅하다. 주디, 아니 매들린의 비밀은 유지되며, 스코티는 그저 사람을 잘못 본 것이다.


인식은 우리가 가진 유일한 도구이므로, 현상의 분석은 모두 우리가 아는 선에서만 이뤄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종종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외부로부터 침투하여 시스템을 고장낸다. 그것은 여러 이름을 갖고 있다. 신념, 야망, 공포, 후회, 사랑 등등. 그때부터 시스템은 모든 데이터를 무시하고 눈 먼 황소처럼 오직 한 방향으로만 폭주한다. 주디를 만난 후의 스코티가 바로 그렇다. 그는 주디를 다른 누군가가 아닌 그녀 본인으로 봐주겠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그녀와의 저녁 식사를 허락받는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녀는 이미 그를 사랑하는 상태이므로, 스코티는 죽은 매들린이 아닌 살아있는 주디와 함께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된 셈이다. 심지어 이 둘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 히치콕은 장르적 편법을 통해 두 여인들이 결국 동일 인물로 하나가 되는 영화적 조건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스코티가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의 여정은 본질적으로 완성된다. 매들린은 죽지 않았고, 그의 곁에 주디라는 이름으로 남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 이것이 그의 시스템을 완전히 망쳐놓는다. 모든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이미 주디를 본 모습으로 보지 못하는 그는 강렬한 감정에 따라 그녀를 매들린으로 확신한다. 그러나 그는 이 사실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는 반드시 이를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스코티는 주디를 매들린으로 바꾸는 작업에 착수한다. 그녀에게 회색 드레스를 입히고, 꽃다발을 선물하는가 하면 갈색 머리를 노랗게 염색하도록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헤어스타일까지 매들린이 했던 방식 그대로 뒤로 묶게 한다. 그렇게 스코티는 나무판자를 하나 둘씩 바꿔 끼우면서 자신만의 테세우스의 배를 만들어간다.


그리하여 등장하는 주디, 아니 매들린의 모습은 경악 그 자체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봐야할까. 그녀는 주디이자 매들린이고, 죽음과 삶, 앎과 모름, 안과 밖이 중첩된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19세기 유령이 그 위에 이중 노출처럼 덧씌워진다. 이는 집착과 죄책감 그리고 뒤틀린 사랑이라는 감정의 썩은 고깃덩어리들로 이루어진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다. 인식론의 극단까지 밀어붙인 결과 이 세상에서 가장 기이하고 초자연적인 존재가 탄생했다. 스코티는 자신의 앞에 선 이 여성, 아니 이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이후 전개되는 줄거리에서 그는 목걸이를 통해서야 비로소 주디가 매들린임을 알아채게 된다. 그러므로 이 광경을 처음 볼 때 그는 주디가 매들린이라는 사실을 여전히 알지 못한다. 다만 이 순간 그는 자신의 믿음에 99%에 부합하는 모습을 제 눈 앞에 재현해내고 만 것이다. 그 1%의 차이가 궁금하다. 본질과 인식이 그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우리는 본질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가. 우리의 앞에 선 이 배는 과연 테세우스의 배가 맞는 것인가. 영화사에 길이 남을 이 명장면은 매체가 가진 경계선을 넘어 높은 곳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아래를 바라본 우리는 이만 머리가 아득해져 중심을 잃고 만다.

매거진의 이전글 자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