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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현 Mar 14. 2023

플레이타임


모더니즘 건축가 르 코르뷔지예는 20세기 초 대담한 도시 계획을 발표한다. 당시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파리의 중세 건물들을 모두 허물고 그 자리에 초현대적인 건물들로 세워놓자는 것이었다. 일명 부아쟁 계획 (Plan Voisin)이다. 본 제안에 따라 파리는 용적률이 높은 십자가형 고층 빌딩들을 각 구간마다 짓되 그 외 대부분의 면적들은 모두 녹지로 조성하고 도시 지역 간 이동이 용이하도록 효율이 높은 교통 체계를 구축할 예정이었다. 심지어 거의 모든 도로는 지하에 두고 지상은 공원과 숲, 그리고 운동 시설로 만드는 등 사람들의 활동을 기준으로 도시에 엄격한 위계를 적용했다는 것도 인상적이다. 그의 방식대로 재개발된 파리는 이론적으로 300만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정작 본토에서는 채택되지 못한 이 도시 계획은 이후 소련이나 체코슬로바키아 같은 동유럽을 시작으로 아시아나 남아메리카 개발 도상국에 차례대로 영향을 끼쳤다. 르 코르뷔지예의 의도가 그러한 과정 속에서 변질되어 이제는 콘크리트 정글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수반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부아쟁 계획이 표상하는 합리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사고는 모더니즘의 핵심이다. 높은 건물들과 분주히 돌아다니는 자동차들, 그리고 복잡한 기계적 절차들을 우리는 겁낼 필요가 없다. 이들은 전부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기 때문이다. 르 코르뷔지예는 목재나 벽돌 대신 차갑고 비인간적인 느낌을 주는 유리를 주재료로 건축물을 도배했다고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유리를 많이 사용한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건물 내 모든 거주자들에게 따뜻한 햇살이 닿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플레이타임>은 모더니즘에 대한 우리들의 선입견을 일정 부분 받아들이면서 시작한다. 자크 타티의 전작들에서 찾을 수 있었던 소박한 전원의 풍경은 여기에 없다. 대신 인물들을 사분면의 한 구석으로 몰아넣고 압도하는 현대 건축물의 거대한 공간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화면에 이를 담는 70mm 필름 프레임이 존재감을 과시한다. 원근법은 극대화되어 개인들 간의 거리를 벌려놓고 그들을 고립시킨다. 영화의 사운드도 그렇다. 남편의 비행에 대해 노심초사하는 아내의 목소리는 공항 내에 울려퍼지는 안내 방송에 의하여 곧 묻히고 만다. 타티의 카메라는 어느 누구에게도 능동적으로 초점을 맞추지 않고 다만 배치된 위치에 따라 눈 앞의 상황들이 풀려나가는 장면을 그대로 담는다. 이를 통해 현대 시스템의 다양한 상호작용을 보여주면서 인간의 생활 양식의 변화가 화면 구도 안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한다. 이 새로운 환경 속에서 어떤 이들은 능숙하게 제 갈 길을 찾아가는 반면, 말없는 산책자 윌로씨는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어리둥절한 그의 시선으로 이 공간을 헤매고 다니며 파리의 여러 단면들을 지나쳐 간다. 효율을 중시한 나머지 많은 것들은 오히려 그 반대의 결과를 초래하거나 (바로 옆에 있는 자료도 동료에게 전화를 걸어 전달받는 직원), 군중에 휩쓸려 개인의 행방이 묘연해지고 (관광객들의 행렬 속에 휘말려 엉겁결에 버스에 타게 되는 윌로씨) 정작 만나야 하는 사람들 대신 이상한 우연들이 누적되며 관계가 단절된다 (계속 동선이 엇갈리는 회사 면접관과 길에서 마주치는 군대 동기 셋). 이러한 대목들은 당연히 모더니즘, 그리고 그것이 파생시키는 다양한 부차적인 현상들 - 관료주의와 테크놀로지의 경도, 이웃 무관심 등 - 을 비판의 시각으로 바라본다고 주장할 수 있겠다. 기본적으로 도시는 너무 크고 복잡한데다가 그 속을 돌아다니는 우리는 실수투성이다. 그 간극에서 오는 거리감을 극복하지 못해 현대의 시민들은 공통의 증상으로 혼란과 소외감을 앓는다. 영화 전반부를 구성하는 여러 코미디적인 상황들에 마냥 웃고만 있기에는 어딘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드는 이유다. 윌로씨는 물론 어리숙한 사람이다. 그가 길을 잃는 구간이야 <나의 아저씨>에서도 있었고 <축제일>에서도 있었다. 그러나 <플레이타임>에서 그의 미아는 마치 시대의 징후처럼 다가온다.


그러므로 영화 중반부 이 도시의 길 잃은 자들이 한 곳에 모이는 로열 가든은 특별하다. 획일화된 형식미와 도회적인 감성으로 완벽하게 정돈된 이전의 공간들과는 달리 로열 가든에 들어서면 일단 바닥의 대리석부터가 관리인의 신발에 들러 붙어서 말썽이다. 이곳은 부실공사의 대표적인 예로 여기저기서 문제가 발생하고 제 구실을 하는 부분을 찾기가 힘들다. 때문에 지금까지 엄격한 조형적 구도를 유지하던 타티의 카메라가 이 장소에서 장장 40분간 머무를거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로열 가든의 예측불허한 속성은 그 40분 내내 갈굼을 당하는 이름 모를 건축가의 허술함에서 비롯된다. 그는 본의 아니게 스스로의 불완전성을 건물에까지 전이시키고 만 것이다. 그 결과 로열 가든은 인간의 모난 부분들까지 모두 감싸 안을 수 있는 매우 독특한 구조의 건축물이 되었다. 그래서 사고가 끊임없이 생긴다. 투명한 외관에 속아 방문객들이 부딪히는 바람에 현관의 유리문은 박살나고, 너무도 뾰족한 의자는 그 사이를 조심성 없이 돌아다니는 웨이터들의 옷을 찢는가 하면, 윌로씨가 과일 장식을 따내려 하자 반대로 천장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그러나 재미있는건 그 다음부터다. 사람들은 이렇게 만들어진 건물의 틈새들을 자신들의 상상력으로 메꾸기 시작하는 것이다. 문지기는 시치미를 뚝 떼고 현관 손잡이를 잡아당기는 척하는 일종의 마임극을 통해 현관문을 되살려낸다. 천장의 나무판자들은 칸막이가 되어 특수한 클럽 공간을 구성하고 의자가 새겨놓은 옷의 자국은 그 클럽 회원들만이 공유하는 표식이 된다. 이렇게 인물들은 로열 가든 안에서 발생하는 돌발 상황들에 유연하게 대처하며 전혀 새로운 기회와 아이디어를 창조해낸다. 건축과 사람들은 부정교합을 넘어 서로의 부족한 부분들 속으로 포개어 들어가 하나의 숨쉬는 생명체처럼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해나간다. 아마도 자크 타티는 인간의 문명이 가진 이 경이로운 자정 작용에 주목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들은 밤새도록 춤을 춘다.


날이 밝아오자 로열 가든의 맞은편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도시의 건물들이 달라보인다. 건조하고 삭막했던 공기는 어디가고 모든 것이 오렌지색으로 조용히 빛난다. 그것은 르 코르뷔지예가 일찍이 알아보았던 모더니즘의 양면성이다. 다채롭고 생동감 넘치는 로열 가든 역시 이 도시의 일부다. 일종의 변증법적인 마술을 통해 파리는 일순간에 타티빌이 되고, 그 속에서 자크 타티는 인간의 도시가 지닌 무한한 낙관의 가능성을 엿보았을 것이다. <플레이타임>은 그 도시의 구석구석을 빠짐없이 찾아가서 던지는 그의 따뜻한 시선이요, 희망의 찬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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