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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 Sep 06. 2019

파리 유학 일기 #1

8개월 만에 유학생 신분으로 다시 찾은 파리

C'est pas vrai...


파리 중심부와 교외 지역(Banlieue)를 남북으로 잇는 파란색 노선 RER B 기차를 타고 파리 샤를 드골 공항 l'aéroport Charles de Gaulle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길. 나는 연신 이 'C'est pas vrai 쎄 빠 브헤-' (말도 안 돼-) 소리를 멈추질 못했다. 워킹홀리데이 이후 귀국한 지 어느덧 8개월이 지났고, 이렇게 다시 파리에 돌아왔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서.


 한국에 돌아와 지내면서, 파리에서의 시간들이 꼭 선명하게 꾼 꿈같이만 느껴졌는데, 기차 벽에 붙은 노선도에 적힌 역 이름들이 익숙하고, 간간이 들리는 안내방송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걸 보니, 내가 여기에 정말 살긴 했구나 싶다. 이 곳 특유의 냄새가 코에 확 와 닿는데, 그 내음에 친숙한 기억들이 떠오르는 게 마음 한 구석이 뭉클했다. 또 무엇보다도, 나의 인복을 자부하게 해주는 소중한 친구가 공항으로 날 마중나와 이렇게 눈 앞에 앉아 있는 걸 보니, 워홀러로서의 1년도, 지금의 순간도 다 꿈은 아닌 게 분명했다.


 친구를 만난 기쁨도 잠시, 파리와 재회한 감격에 젖어들려는데, 순간 현실의 벽이 쾅 앞을 가로막았다. 지난 1년 그렇게 열심히 프랑스어에 매진했는데, 8개월간 거의 쓰지 않으니 프랑스어 고유의 소리들을 내뱉는 것도 어색하고, 프랑스어로 자연스레 사고하는 게 너무 어려웠다. 당연한 건데, 또 괜히 위축되고 자신이 없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해결될 문제들일 터인데, 역시나 걱정이 과하다. 


 



빛이 너무 예뻤던 파리


시내에 도착해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가난한 학생인 우리는 항상 슈퍼나 à emporter(테이크아웃)이 되는 가게에서 음식을 사들고 공원이나 강가에 앉아서 때우곤 했는데, 오늘은 파리에 돌아온 기념으로 레스토랑에 가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어디서 먹을까, 이리저리 길가를 헤매다가 Gare d'austerlitz 역 근처에 다다랐다. 우리 예전에 여기 왔었잖아! 하면서 추억을 되새기며 깔깔대는 와중에, 갑자기 내 오른쪽 다리가 퍽-하고 꺼졌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키가 작은 이상한 옷차림의 아줌마가 중얼대며 적개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 아줌마가 뒤에서 발로 내 뒷다리를 걷어찬 거였다. 화가 난 친구가 다가가자 아줌마는 저쪽으로 뒷걸음질 쳤다. 주변에 있던 두 세 사람은 싸움이 일어날까 중재하려 친구와 아줌마 사이에 끼어들었다. 친구의 반응에 놀란 나도 '그리 아프진 않았어서 괜찮아' 하며 친구를 말렸다. 정신이 없어서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너무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어찌저찌 상황이 종료되고 다시 걷기 시작했는데, 방금 전까지 맘에 드는 식당을 찾아내겠다며 들떠 있던 마음은 어느덧 싹 사라져 있었다. 식욕도 남아있을 리 만무했다. '그 사람이 아까 뭐라고 했어?' 묻자 친구는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인종차별 같은 거였니?' 하고 되물으니 친구는 그런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별달리 할 수 있는 말이 없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리는 한참을 헤매다가 결국 처음에 보았던 이탈리아 식당에 가서 나폴리 피자와 닭고기 판네 파스타를 먹었다. 지난 5일 간 베를린에서 "맥주를 물같이" 마시는 데에 단련이 되었는지 맥주가 고파, 이탈리아 맥주 Peroni 도 한 병씩 시켰다. 베를린에서 파리까지 30kg 넘는 짐을 가져오느라 정말 개고생을 한 하루 였는데, 맛있는 음식을 먹고 꼴깍꼴깍 맥주가 들어가니 조금 살 것 같았다. 


닭고기 들어간 크림 펜네 penne 파스타
앤쵸비와 케이퍼의 조합 Good good


 맛있게 식사를 마치고 친구와 바이바이 한 뒤, 내 방을 구하기까지 당분간 함께 묵을 다른 친구의 집에 도착했다. 자꾸만 아까 횡단보도에서 있었던 그 일이 마음속에서 윙윙 맴돌았다. 그래도 더 큰 일 없었던 게 어디야, 하면서 스스로를 달래 보려 했지만, 인종차별이나 폭력이라는 건 경중을 잴 수 없는 일이기에 이렇게 타협하며 스스로를 타이르는 게 옳지 않은 것 같아 씁쓸했다. 


 그래도 놀라운 건, 예전 같았으면 그런 일을 당하자마자 놀라서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손이 벌벌 떨렸을 터인데, 눈물만 뚝뚝 흘렸을 텐데, 오늘은 그 와중에 화가 난 친구를 말릴 정신까지 있었다는 사실이다. 일이 일어난 후에 뒤돌아보며 마음의 상처를 곱씹었지만, 실은 다리를 걷어 차인 그 당시에는 그렇게까지 놀라거나 겁을 먹지는 않았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음... 이런 맷집은 뭐, 굳이 필요 없는데. 


 그래, 액땜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 아줌마 같은 이상한 사람들보다는 좋은 사람들이 당연히 더 많으니까. 앞으로는 후자들을 더- 많이 만날 거니까. 그런 이상한 사람 때문에 비관 모드에 빠지기엔 지금 나한테 주어진 오늘들이 너무 아까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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