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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시온 Nov 11. 2024

ENFJ로 위장한 INTP의 고백

걷는다고 나름 서둘렀는데 미로에 갇힐 때가 있다. 답답한데 도무지 뭐가 답답한지 알 수 없을 때, 뭘 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는 시간은 사람을 무너뜨린다. 그런 시기를 되돌아보면 결국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나를 이해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부족함, 서툰 선택과 실패, 결핍. 나를 외면하며 걸을 때 길은 곧 미로가 된다.


처음 성격심리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 에니어그램을 통해서였다. 당시 나는 회사와 일에 권태를 느꼈고. 원인 모를 불안과 답답함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직 준비를 위해 신청한 코칭 클래스에서 DISC 검사를 했지만 2% 부족한 느낌이었다. 그러던 중 팟캐스트 '어느 별에서 왔니'를 통해 에니어그램이라는 새로운 이론을 알게 되었다. 타고난 기질, 성격 원리를 통해 나의 진짜 욕망과 결핍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은 곧 희망이 되었다.


* 에니어그램 : 인간의 성격 및 행동 유형을 9가지로 분류한 이론.


그런 희망에도 불구하고 내 진짜 유형(참유형)을 찾기까지 에니어그램은 1년, MBTI는 꼬박 6년이 걸렸다. 매번 아리송한, 그러니까 대충 맞는 거 같은데 속 시원하지 않은 느낌이었다. 알고 보니 그게 다 스스로 씌워놓은 가면에 속은 덕분이었다. (스스로 만든 가면에 자신도 속는 것은 에니어그램 3번의 특징 중 하나다.)


시온님은 무조건 ENFJ 아니면 INFJ에요!


가면은 생각보다 많은 성과를 냈다. 회사 동료, 모임, 친구, 나 자신까지 골고루 영향을 주었는데. 그 중엔 '자칭 MBTI 선무당'이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이젠 슬쩍 보기만 해도 특정 유형의 냄새가 난다고 했다. 그런 그들이 주장한 내 유형은 ENFJ였다. (나도 헷갈렸지만 결국 난 INTP다.) 이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자신과 타인의 유형을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가장 흔한 경우가 변화에 관한 것인데. MBTI 유형이 바뀐다거나 검사 시기, 인간관계, 상황에 따라 유형이 모두 다르다고 한다. 왜 그럴까. 답은 가유형, 직업유형에 있다.



1) 가유형 : 가짜 유형

- 자신의 선천적 선호경향과 반대되는 행동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환경에서 생활할 때 만들어지는 유형

2) 직업유형

- 직업에서 요구하는 특성으로 인해 나타나는 유형

3) * 참유형

- 선천적으로 타고난 자신의 진짜 유형


청소년 코칭, 강의, 교육 회사 운영을 하기 전 나는 안과 밖 모두 완벽한 T 인간이었다. 성장하는 학생들의 (그것도 F 유형 학생들) 담당 코칭 선생님이 대문자 T라고 상상해 보자. 그야말로 눈물바다가 따로 없었다. 결국 나는 말투, 표정, 행동을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이 과정은 큰 에너지 소비와 스트레스를 안겨주었지만 결국 대충 보면 F 같은 인간이 되는 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 성공은 기어코 나 자신도 속였다.


참유형을 알기는 참, 어렵다. 아니 두렵다. 이해하려면 우선 알아야 하는데. '어떠한 나'라도 인정하겠다는 마음을 가지는 것 자체가 두려운 일이다. 때문에 참유형을 '진짜' 찾겠다고 다짐할 땐 지식도, 강의도 아닌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조차 잊고 살았던 가장 어린 시절의 나, 가장 서툰 시절의 나를 만나도 괜찮다는 애틋한 용기 말이다.


네가 뭔데 나를 판단해.


MBTI로 섣불리 자신을 판단하는 게 싫다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런 현상은 자칫 위험해 보이기까지 한다. 일단 짐작한 그 유형이 가유형인지, 직업유형인지, 참유형인지도 타인이 알 수 없고. 어쩌다 참유형이 맞다 하더라도 평가 수단이 된 MBTI는 폭력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평가하기 위해 달려드는 사람에게 선뜻 용기를 내어 줄 사람은 없다. 그게 자기 자신이라 하더라도.


진짜 나를 만나고 싶다면 앞으로 치켜세운 마음의 검지 손가락을 내려야만 한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보자. 그저 알아주겠다는 다짐과 미소, 끄덕임. 그래야 MBTI가 나를 만날 수 있는 '진짜 수단'이 된다. 그 비로소 이해는 다정이 된다.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참유형을 알고 자신답게 성장하기를,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MBTI가 흉기로 변질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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