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회사에서 감정을 보이면 안 되는가?
짚고 가자. 직원은 사용자가 아니고, 회사생활 UX란 말은 없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직원 경험(EX: Employee eXperience)이라고 써야 맞을 것이다. 그러나 난 HR 전문가가 아니며 이 내용은 사용자가 어떤 행동을 하기를 바라면서 UX를 설계하는 그 관점을 회사생활에도 적용한 것이라 이상한 표현을 사용했다.
회사에서는 감정을 보이면 안 된다.
회사 생활 관련하여 킴이 의아해하는 말이 몇 개 있다. “회사는 일하는 곳이지 배우는 곳이 아니야.” “회사에서는 울면 안 돼.” 그중 두 번째 말이 다시 생각났다. 바로 지난주에 회사에서 거의 울 뻔했기 때문이다. 뭔가가 잘 안 풀리고 있었다. 감정이 북받쳐 오르고 목소리가 떨려왔고 당혹스러웠다. 상식적인 상황이었고 이성은 침착했다. 왜 눈물이 나오려고 하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킴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조건에서도 잘 해낸 적이 있었다(‘잘’이 무엇인지는 넘어가자). 화가 나거나 속상한 것도 아니었다.
논쟁은 작은 기능 하나에서부터 엎치락뒤치락하며 시작되었다. 입으로는 하던 논의를 이어갔지만, 요 근래 느끼고 있던 업무 능률과 관련된 고민이 머리를 지배하면서 일정 조율 과정이 까다로운 것에 짜증이 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머릿속이 복잡해졌고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자잘한 일들이 너무 많았고 각각은 정해진 마감이 있었으며 어떤 것들은 급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이나 그 뒤의 작업에 영향을 줄 수 있었다. 정리를 할까 싶으면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고, 해결하고 치우려고 한 일도 꼬리를 물고 끝나지 않았다. 정리에 대한 욕구 때문이었을까 일주일 내내 휴가를 쓰고 방청소를 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일 진행에 문제가 없느냐는 말을 들을 때마다 끝이 보이지 않음에도 마감을 지킬 수 없는 것이 두려워 그렇다고 얼버무리곤 했다. 그날 아침에도, 그 전날에도, 그리고 그 전날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에 가서 쉬고 다음날 아침에 회사에 출근하면 회복될 감정 상태였다. 그 기능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킴은 횡설수설하며 기능 대신에 혹독한 일정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킴은 논의에 협조적이지 않았고, 상대의 말투가 고압적으로 바뀌었다. 울컥할 수도 있고 그냥 넘길 수 있는 몇 마디를 들었다. 감정의 항아리는 넘실넘실하여 고작 그 몇 방울에도 위태롭게 버티고 있었다. 킴은 진심으로 논의 중에 울고 싶지 않았다. 울기 시작하는 순간 말 자체보다는 말을 하는 사람에 집중하게 된다. 이야기는 힘을 잃고 전문성으로부터 오는 신뢰가 떨어질 것이다.
애초에 킴의 잘못이었다. 서둘러 귀가하여 쉬고 싶은 마음에 설득을 할 준비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다시 이야기드리겠다고 얼버무리고 도망치듯이 퇴근했다. 귀갓길에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회사에서 안 울어서 다행이지 뭐.
진짜 문제는 무엇이었는가?
킴이 칠칠치 못하게 회사에서 울 뻔한 것? 회사라는 공적인 공간에서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다니! 아니다. 눈물은 오히려 결과에 가깝다. 킴은 자신이 벅찬 것을 알았고 생산성이 떨어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대신에 개인의 탓으로 돌리며 스스로 감당하려고 했다. 그때그때의 현황이 곧 그 사람의 절대적인 능력은 아니다. 일의 목적을 알고 있고, 걸릴 시간을 잘 계산하여 차근차근 할 때와 수시로 우선순위가 높(다고 여겨지는)은 일이 생길 때의 생산성과 결과물은 다르다. 동일한 사람이 일주일 동안 같은 양의 일을 했더라도 전자에 걸리는 시간과 후자에 걸리는 시간은 같기 어렵다.
킴은 주어진 일을 잘 해내고 싶었고, 약점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혼자 조금 고생하면 되겠지 싶었지만 생산성은 계속해서 떨어졌고, 해결해야 할 일들은 점점 늘어났다. 일 량이 많았기 때문이 아니라 제어할 수 없었기에 피로감이 쌓여갔다. 업무의 우선순위가 동일하게 느껴졌고, 내가 당장 해내지 않으면 일정에 큰 차질이 생길 것만 같았다. 이 상태에서 스스로에게 책임을 강조해봤자 업무 효율이 좋아지지는 않는다.
이미 정해진 일정 내에서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만약 전 주에 휴가를 다녀와 상태가 매우 좋았더라면 가능했을 수도 있고, 일들이 중간에 계속 바뀌지 않았으면 가능했을 수도 있다. 일에 대한 열정에 막 불타오르고 있었다면 또 가능했을 수도 있고, 업무 속도가 빠르거나 능력이 더 뛰어나다면 가능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상태도 상황도 아니었다. 환경과 계획, 역량이 서로 맞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을 오로지 스스로만 알고 있었다. 이전에 이와 관련된 논의를 할 때마다 부담과 압박이 느꼈고, 그래서 오히려 혼자 해결을 해야 한다고 느껴서 그렇게 행동했다고 하면 변명일까? 그 어떤 이유에도 상관없이 킴은 설득을 할 수 있는 침착함과 논리를 가지고 이야기를 꺼내고, 그리고 조정을 했어야 했다. 그 대신 표류하고 있었다.
일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둔다면
내 탓을 한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열심히 일한다. 벅차다. 일의 우선순위를 파악할 수 없다. 모든 일이 지연된다.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않다. 자신감이 사라진다. 일을 많이 한다. 회복이 더디다. 언제나 지쳐있다. 회사에 오는 것이 기쁘지 않다. 일하기 싫다. 행복하지 않다. 머리가 아프다. 체력이 내려간다. 해내지 못할 것 같다. 일이 많아진다. 내가 병목이 된다. 나 때문에 전체 일정이 변경된다. 나에 대한 평가가 나빠진다. 나는 일을 못하는 사람이 되어있다. 처음에는 내 잘못이 아니었지만 마지막 상황에서는 너무 명백하게 내가 문제가 되어버린다.
일을 관리할 수 없는 상태에서 가장 쉬운 방법은 어떻게든 시간을 더 들여 혼자 해결하는 것이다. 여기서 쉽다는 것은 일의 난이도가 아니라 일차원적인 접근이라는 의미에서 사용했다. 고민을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두는 것은 쉽다. 아무것도 변경하지 않고 해내는 내가 책임감 있다고 생각될 것이다. 관련된 누군가를 설득하는 수고를 들일 필요가 없으니 더 좋다. 반대로 일을 진행하기 어렵다고 말하거나 조정하면 일을 요청한 상대는 난처할 것이며 나와 상대 모두 내가 무능력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런데 지금의 내가 좋은 품질의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정말 그렇게 진행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리고 다른 이야기지만 나를 바쁘게 만든 그 요청은 정말 필요해서 들어온 것인가?)
상태를 챙긴다는 것
약간의 긴장상태는 업무에 도움이 된다. 집중력이 올라가고 새로운 생각들을 떠올릴 수 있게 된다. 반면 너무 강박적이고 생각 중인 그 개념만을 고집하며 주변을 둘러보지 못하게 되기도 한다. 일을 잘하기 위해서는 경험을 쌓고, 능력을 쌓아나가는 것도 필요하지만, 내가 일을 잘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거나 문제를 관련자에게 공유하여 모두가 상황을 이해하고 계획을 변경하도록 하는 것도 필요하다. 일은 불어난다. 마치 (제작 중인) 제품의 기능과도 같아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순식간에 감당할 수 없게 늘어나 있다.
과거의 어느 팀장은 내가 불가능한 일정을 가지고 부담을 느끼는 것을 알았을 때, 내 책임감을 강제로 내려놓는데 시간을 쓰기도 했다. 그는 내가 행복해야 일을 잘할 수 있으며 스스로에게 거는 압박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으니, "이 일을 어떻게든 해낼게요." 대신에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하라고 시켰다. “하지만." 아니, 하지만은 없다. 나는 결국 아무 단서도 붙이지 않고 그 팀장 앞에서 그 말을 했다. 내 마음은 편안해졌다. 그다음에 어떻게 되었을까? 일을 잘했다. 팀장님, 감사합니다.
스스로 조절하면 되는 문제를 쓸데없이 키운다고 말할 것인가? 개인은 자신의 상황에 빠져있기 때문에 멀리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동료나 상사의 도움이 필요하다. 친목을 쌓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객관적일 수 있도록 약간의 손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물론 자신의 상태를 파악하는 것도 필요하다. 지금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내가 왜 일이 잘 안되는지를 지속적으로 점검하지 않는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을 껴안고 침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협조적인 회사 분위기가 가장 중요하다. 일을 잘하는 것에 대한 철학이 없다면 일정을 맞춘다가 일 잘한다가 되기 쉽다. 직원이 무엇에 집중해야 할지 선택하고 그럴 수 있는 상황을 만들고 싶어도 회사 분위기가 협조적이지 않다면 조정을 시도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도 상식적인 이야기를 왜 시간을 들여 쓰고 있나 싶다. 반대로는 어떠한가? 각자 자신의 일을 맡아 책임을 지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정을 맞추며, 혹 지연이 될 이유가 있다면 개인이 더 노력한다. 맞는 이야기가 아닌가?
우리 사회는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인간보다 기술의 필요성을 더 강조하게 되었다. 인간은 기계 중심적 삶에 부적합하니 보조적인 역할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더욱 심하게는 기계 중심적 관점이 인간을 기계와 비교하면서, 우리가 정교하고 반복적이며 정확한 행동을 할 수 없는 부족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는 것이다. 비록 이것이 자연스러운 비교이자 지금 이 사회에 만연해 있는 사고방식이긴 하지만, 또한 인간에 대한 가장 부적절한 관점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도널드 노먼, 도널드 노먼의 디자인 심리학 - UX와 HCI를 위한 인지과학 교과서, 유엑스리뷰, 2018, 7쪽.
원서 : Things that Make Us Smart: Defending Human Attrivutes in the age of the Machine, 1993.
우리는 일을 잘하고 싶다.
생각보다 많은 일들이 감정이나 강박으로 이어질 필요가 없다. 적극적인 해소나 조치가 필요할 때도 있지만, 단순한 마음의 변화만으로도 해결되는 일이 더 흔하다. 지금 나는 개인의 행복이나 복지가 아니라 생산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어느 회사에서 직원에게 어떤 일을 맡겼는데 일을 집중해서 할 수 없거나 불안하게 만드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면? 어디선가 들어온 불필요한 감정 소모 때문에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면? 대체 왜 이 일을 방치해야 하는가? 1~2시간만 투자하면 일주일 동안의 효율이 올라갈 텐데 말이다.
이 글은 입증된 연구가 아니며 경험에서 온 생각의 파편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내 사건이 일어난 지 1주일이 지난 시점에서 친구가 일이 너무 많아 그 어느 것도 스스로 생각한 일정에 맞추지 못했는데 우선순위가 낮은 일에 대한 재촉이 들어온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보편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화를 할 생각은 없다. 이 내용이 모두에게 맞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일정을 완전히 무시하거나 자신의 일을 타인에게 미루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감정을 무기로 휘두르는 사람도 있다. 모든 상황에 맞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감정은 본능적인 신호라 그 사람의 상황보다는 사람 자체에 집중하게 된다. 하지만 회사에서 감정을 보였을 때 그가 공적이지 않거나 나약하다는 데 초점을 맞춘다면 원인은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다치면 피가 나듯이, 어딘가가 아프면 눈물이 나온다. 눈물은 귀한 정보이다. 직원의 힘듦에 표가 난 것이다. 그 직원이 무엇 때문에 힘이 드는가? 이 지점을 찾아 개선한다면 그 직원은 훨씬 더 평온한 마음 상태가 되어 잘 일할 수 있지 않겠는가.
결론만 따지면 민망하고 부끄러웠지만 눈물을 보인 뒤부터 일정 조정이 내가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것보다 적극적이고 원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 또한 감사합니다.
UX 실무를 시작한 뒤부터, 킴은 세상 모든 것에 관점과 방향성, 그리고 그 형태에 따라 응당히 이어지는 결과가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라고 다르겠는가. 내 하루는 내가 설계하고, 일상의 깨달음은 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