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eong Mar 28. 2019

[갑자기 여행] 어린아이가 된다는 것

스위스•이탈리아에서 21일간 잘 살아보려 합니다

스위스 인터라켄 아레강/사진=jeong

아침 일찍 일어나 씻고 옷을 입고 밖으로 나선다.
매일 타는 지하철이지만 어제와 같은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그렇게 홀로 덜컹이는 지하철을 타고 멍하니 서있다 보면 일터에 도착하고 정신없이 일을 시작한다.

누군가와 함께 점심을 먹는 것보다는 혼자가 편하다.
친하지도 않은 사람과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밥을 먹는 것인지 일을 먹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하고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날 맞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침대에 다시 몸을 뉘인다.

직업상 여러 사람을 만나야하기에 한국에서의 취미는 ‘혼자 있기’였다.

혼자 있는 게 두렵지 않았다. 익숙하고, 다 알고, 혼자서 뭐든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항구 도시 라스페치아의 오후/사진=jeong

하지만 낯선 환경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국에서는 나를 중심으로 관계가 형성되지만 유럽 대륙에서 나는 그저 이방인이고 비주류고 변방이다.

외로움을 잘 타진 않지만 온종일 혼자 걷고, 먹고, 쉬다 보면 한국말을 재잘거릴 수 있는 누군가가 절실해진다.

다행스러운 것은 다른 이들과 친해질 수 있는 기회가 많다는 점이 혼자 여행의 가장 큰 장점이라는 것.

루체른의 리기산을 오르는 여정 중 알게 된 스물넷의 한 청년은 근래 본 중 가장 순수한 인물이었다.
나이대에 맞는 풋풋함과 느릿느릿한 나른한 매력을 지닌 친구였다. 행동이 재빠르진 않았지만 배려심이 넘쳤고 처음 봤음에도 편안함을 주는 이였다.

인터라켄 숙소에서 만난 이는 에너지가 넘치고 생기발랄한 친구였다.
칭찬에 인색하지 않고 상대방을 기분 좋게 만드는 에너지가 가득했다.
에코백이 필요하면 에코백을, 세탁을 위한 세제가 필요하면 세제를 내 눈앞에 대령하는 ‘도라에몽 주머니’ 같은 존재였다.

이탈리아 밀라노 나빌리오 운하에서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사진=jeong

밀라노에서 알게 된 동행은 스위스의 한 대학에 머무르는 교환 학생이었다.
밀라노의 홍대인 나빌리오 운하를 바라보며 서로의 지난 연애 이야기를 숨김없이 꺼냈고, 와인바에서는 주문을 어떻게 하는지 몰라 함께 허둥댔다.
혼자라면 몇 번을 망설였을 밀라노의 밤거리도 든든한 한국 친구가 있으니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친퀘테레에서 알게 된 직장인 동행은 꽤 전문적으로 보이는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마을 어귀에서 산 레몬사탕이 맛있다며 나에게 한주먹 나눠주던 인심도 좋은 이였다.
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직장 생활에 대한 애환을 털어놓다 보니 친해지는 건 어렵지 않았다.

운이 좋게도 이 먼 이국땅에서 내가 만난 이들은 모두 좋은 친구들이었다.
기분 좋음을 느꼈는지 나도 모르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술술 해댔다.
한국에서라면 6개월은 알고 지내야 하는 이야기들이었다.

이탈리아 몬테로소 밤 거리/사진=jeong

한국에서는 무엇이든 척척 해내는 나지만, 여행지에 오면 어린아이가 된다. 방향 감각을 상실하고 때와 장소에 맞는 옳고 그름에 대한 개념조차 사라진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됐기 때문에 어린아이처럼 사람을 대하게 된다.

조금의 공통점이라도 있으면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네고, 함께 하기 위한 구실을 찾는다.

그리고 ‘같은 한국인’이라는 구실은 어떤 것보다 훌륭한 명분이 된다. 한국 땅에 있을 때는 눈곱만큼도 없던 ‘국뽕’이 차오르는 순간이다.

서울에 있었더라면 마주쳐도 스쳐 지났을 인연들. 하지만 아는 이 하나 없는 낯선 땅에서 그들은 나의 친구이자 길잡이이자 연인이자 하나님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갑자기 여행] 일상과 멀어지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