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간 빈에서, 파리에서 나만의 제시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본문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누군가 내 인생의 영화를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비포 선라이즈’라고 답할 것이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초기작 ‘비포 선라이즈’는 미국에서 온 남자 제시(에단 호크 분)와 파리로 가는 여자 셀린(줄리 델피 분)이 우연히 기차에서 만나 오스트리아 빈에 내려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 영화다. 영화는 비교적 긴 테이크로 두 사람의 대화를 보여준다.
이 영화는 화려한 볼거리도 엄청난 반전도 없는 그냥 그런 내용이다. 하지만 처음 만난 남녀가 쉴 틈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나에게는 미치도록 로맨틱했다. 이 영화는 나의 이성관까지 바꿨다. 나는 '비포 선라이즈'를 본 후 마주 앉아서 계속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 내 이상형이 됐다.
배경이 된 빈이 내뿜는 아름다움은 말할 것도 없었다. 특히 영화 중반, 레코드 가게 음악 감상실에서 제시와 셀린이 서로를 몰래 쳐다보는 장면은 심장이 터질 정도로 설렜다. 나는 제시가 셀린을 바라보던 눈빛을, 셀린이 제시를 바라보는 눈빛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두 사람 덕분에 빈은 내가 꼭 가보고 싶은 도시가 됐다. 막상 가보니 ‘모차르트’만 가득했지만.
20대 초반에 이 작품을 본 나는 영화의 모든 것이 ‘그냥’ 좋았다. 뭐라고 설명할 순 없지만 제시가 셀린에게 끌렸듯이, 셀린이 제시가 좋았듯이 나도 그냥 빨려 들어갔다. 이 영화에.
뒤이어 ‘비포 선셋’을 봤다. ‘비포 선셋’은 9년 뒤 파리에서 재회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다. 9년 전 빈에서 만났던 두 사람은 6개월 뒤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지만 안타깝게도 어긋난다. 거의 10년이 흐르고서야 만난 둘은 그때 같은 풋풋하기만 한 청춘은 아니다. 제시는 결혼해 아들이 하나 있는 유부남이 됐고, 작가로 성공했다. 셀린은 “결혼 따위는 필요 없어”라고 말하지만 자신을 ‘노처녀’로 보는 주변의 시선이 견디기 힘들다.
다시 만난 제시와 셀린은 여전히 서로에게 최고의 수다 상대다. 곧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제시의 비행 전, 두 사람은 9년의 묵은 한을 수다로 쏟아낸다. 카페에서, 파리 거리에서, 센 강변에서....
보통 속편은 전작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비포 선셋’은 내 두 번째 인생의 영화가 됐다. ‘비포 선라이즈’가 설렘 가득한 영화였다면 ‘비포 선셋’은 9년 전 설렘을 잊지 못하는 두 남녀의 이야기였다.
그렇게 두 편을 보고난 뒤 2013년 개봉한 ‘비포 미드나잇’을 보게 됐다. 하지만 여전히 20대 초반이었던 나는 이 영화에 빠질 수 없었다. 물론 이 영화는 평단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러나 중년 부부가 된 두 사람의 현실적인 삶은 20대 초반에게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내 기억 속 제시와 셀린의 모습은 빈, 파리에서 까지가 딱 좋았다.
나는 영화든 드라마든 소설이든 어떤 작품을 볼 때 창작자가 얼마나 관객, 시청자, 독자를 설득할 수 있느냐를 중요시한다. 막장 드라마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악역이 저렇게까지 악행을 저지르는 이유를 이해하기 힘드니까.
하지만 제시와 셀린이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100%, 200% 이해한다. 어떤 주제라도 신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에게 빠지는 건 매우 당연한 거니까.
언젠가 한번 내가 ‘비포 시리즈’에 이토록 열광하는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본 적이 있다. 어렵게 떠올린 이유는 “저런 사랑을 해보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었던 것 같다. 처음 만났지만 “이 사람이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그런 사랑. 9년이 지나도 9년 전 같은 설렘은 느끼는 그런 사랑. 그래서 부부로 함께 세월을 보내며 아이들을 챙기느라 진이 다 빠져버린, 설렘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별로였던 것 같다.
평범한 대학생에게 유럽 배낭 여행의 꿈을 심어주고 잠들기 위한 침대에서 쓸데없는 상상을 하게 한 이 시리즈는 이제는 고전이 됐다. 그러나 이제 ‘비포 선셋’의 셀린 나이쯤 된 나는 셀린처럼 어떤 낯선 장소에서 나만의 제시를 만날 수 있기를 아직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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