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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akonomist Aug 23. 2019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으로 본 인간 유형

자본주의 속 여러 인간상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미야자키 하야오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인생작을 자처할 만큼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영화의 매력 포인트 중 하나는 개성 넘치는 등장인물들입니다. 예를 들면 목욕탕 주인 유바바, 그의 뚱뚱한 아들 보우, 얼굴 없는 가오나시, 돼지로 변해버린 주인공의 부모님 등이 있죠.


최근 유튜브에서 이 영화에 관한 해설 영상을 보았습니다. 영상을 보고 이전에는 몰랐던 감독의 의도들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감독은 각각의 등장인물을 통해 자본주의에서 만날 수 있는 여러 인간 유형을 그려놓고 있었습니다. 조지 오웰이 쓴 '동물농장'처럼 말이죠.  


테마파크: 탐욕으로 부푼 버블

영화는 주인공 치히로와 그녀의 부모님이 버려진 테마파크에 들어가면서 시작합니다. "이건 테마파크 잔해야,"라고 치히로의 아버지가 말합니다. 일본 버블 경제가 터지면서 함께 무너진 테마파크. 1980년대 버블경제 당시 집값은 아직도 회복하지 못했다는 말이 나올 만큼 높았습니다. 경제가 좋아지자 자산 가격이 상승했고, 단기 차익에 눈먼 사람들이 너도 나도 빚을 내 투자를 했습니다. 경제 호황은 사람들의 탐욕에 의해 거품으로 바뀌었고, 거품은 언제나 그렇듯 터지고 말았죠. 영화는 이 버블 경제를 상징하는 테마 파크를 배경으로 설정해 앞으로 전개될 내용이 사람들의 탐욕과 관련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돼지: 노동하지 않는 인간

영화는 일하지 않으면 동물로 변한다는 설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치히로의 부모님이 주인 허락도 받지 않고 차려진 음식을 먹자 서서히 돼지로 변합니다. 노동을 하지 않고 다른 누군가가 차려 놓은 음식을 먹는 것은 가축과 같다는 것을 희화화해 표현했습니다. 돼지로 변한 부모는 딸이 애타게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음식에만 넋이 팔립니다. 탐욕에 눈먼 인간은 주변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유바바: 냉혈한 자본가, 돈을 좇다 중요한 걸 잃어버린 사람

유바바는 목욕탕을 소유하고 사람을 부리는 자본가를 상징합니다. 그녀는 충성을 바쳐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다 다친 부하(하쿠)를 쓰레기장으로 보내버리는데요. 노동자를 기계나 부품처럼 취급하는 그녀는 칼 마르크스 책에 나올 법한 무정한 자본가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자신의 진짜 자식이 사라져도 가게에 생긴 적자 생각만 하는 그녀를 보면 무정하고 이기적인 탐욕에 눈이 팔려 자신에게 정작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도 눈치 채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직원들: 정체성을 잃은 사람

유바바의 온천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유바바와 처음 계약을 맺을 때 본인의 이름을 빼앗기고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습니다. 치히로는 센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았죠. 이는 마치 일제시대 창씨개명 같습니다. 창씨개명은 이름을 바꿈으로써 조선의 정체성을 빼앗는 행위였습니다. 유바바는 직원들이 자신들의 본래 정체성을 잊고 자신의 노예가 되어 착실하게 일해주길 바랬을 것입니다.


온천에서 치히로를 돌봐주는 유이는 소망이 있습니다. "언젠간 때려치우고 그곳에 갈래." 언젠가 돈을 많이 모으면 일을 그만두고 바다 건너 마을에 가겠다는 소망입니다. 언젠가 일을 그만두고 떠나는 것, 온천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모두 이런 소망 때문에 돈에 혈안이 돼 일을 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유이는 그 소망을 이룰 수 있을까요? 아니, 자신의 정체성을 빼앗기기 전에 그 소망을 이룰 수 있을까요?


치히로는 유이의 소망을 대신 이룰 기회를 갖게 됩니다. 기차를 타고 다른 마을로 떠나게 되죠. 하지만 치히로가 기차를 탔을 때 같이 탄 승객들을 보면 모두 몸이 투명합니다. 마치 자신의 색깔, 즉 정체성을 잃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처럼 말이죠. 유이의 소망이 초라결과를 맞이할 임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가오나시: 관심을 갈구하는 인간

가오나시는 영화에서 가장 독특한 캐릭터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만큼 해석의 여지도 많은 것 같습니다. 먼저 가오나시를 소외와 관심의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영화 초반에 소외된 인물이었습니다. "외롭다"는 말을 넋두리하듯 내뱉기도 합니다. 그래서 치히로가 처음으로 그에게 관심을 주자 마치 애정결핍이 있는 아기처럼 치히로의 관심을 갈구합니다.


그는 물질로 그녀의 관심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잘못된 생각은 그를 점점 추악하게 만들어 갑니다. 애정에 대한 욕구는 집착으로 바뀌고 결국엔 폭력성을 띄게 됩니다. 감독은 가오나시를 통해 물질을 통해 좋은 관계를 형성할 수 없음을, 또 관심에 대한 욕구가 집착으로 변했을 때 그것의 비참함과 폭력성을 말하려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가오나시는 탐욕으로 부푼 일본 버블 경제를 온몸으로 표현하는 캐릭터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가오나시는 자신의 공허함을 물질로 채우고 점점 비대해집니다. 불어난 몸은 일본의 버블 경제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그 버블이 공허하고 추악하다는 것을 가오나시를 통해 말하는 것 같습니다.   


비유의 힘은 대단한 것 같습니다. 영화는 판타지적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지만 현대 자본주의라는 사회상과 비교했을 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더 많아집니다. 저는 캐릭터들의 숨은 의도를 알고 제가 노동도 하지 않고 탐욕만 채우는 돼지가 아닌지, 탐욕에 눈이 멀어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유바바가 아닌지, 시스템의 노예가 돼 정체성을 잃어버린 직원들이 아닌지, 주변의 관심에 목말라 추악한 꼴을 보이는 가오나시가 아닌지 돌아보게 됐습니다. 영화는 각기 다른 탐욕으로 각기 다른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는 캐릭터들을 통해 탐욕의 비루한 결말을 보여주려 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혹은 이 영화의 배경이 일본 버블 경제임을 생각했을 때 지나친 탐욕은 버블, 즉 공허한 것이고 언젠가는 터질 운명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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