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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akonomist Feb 28. 2018

영어 못하는 유학생

부끄러움의 고백

    "야, 그 유학파 불러와!" 제가 인턴으로 일했던 곳마다 이런 일을 수도 없이 경험했습니다. 영어가 필요한 일이면 항상 저를 찾죠. 심지어 군대에 가서도 여기저기 한미 합동훈련으로 불려 가 통역을 했습니다. 제가 미국 대학교를 다니는 유학생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인턴을 하든, 저는 제가 그곳에서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직감할 수 있습니다. 보나 마나 번역과 통역이겠죠. 이제 영어는 제가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고백할 게 있습니다. 사실, 저 영어를 잘 못합니다. 아직도 (미국인) 룸메이트가 하는 말을 잘 못 알아들어, "Sorry, could you repeat?"을 반복합니다. 순간적으로 알아듣고 답해야 하는 전화보다는 생각할 시간이 있는 전자메일을 선호합니다. 토론이 많은 수업보다는 수학이 많이 필요한 수업을 주로 듣습니다. 길거리에서 누가 영어로 길을 물으면, 어딨는지 알면서도 모른다고 얼버무립니다. 



    저도 제 자신이 창피합니다. 자괴감마저 듭니다. 부모님이 고생해서 번 돈을 비싼 유학비로 지출하면서도 영어를 못하니 부모님께도 죄송스럽습니다. 미국 대학을 다니는 주제에 영어도 못한다는 말을 들으까봐 이젠 미국에서 공부한 사실을 숨기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저라고 아무 노력을 안한게 아닙니다. 이 자리를 빌려 제가 왜 영어를 잘 못하는지 구차한 변명이라도 한 번 해볼까 합니다. 



달라도 너무 다른 언어


    저도 예전엔 미국에 가면 마법처럼 영어가 늘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미국에만 가면 마법처럼 영어가 입에서 나오고, 마법처럼 뉴스가 들릴 줄 알았죠. 그런데 그게 다 '착각'이었습니다. 처음엔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늘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도 제 영어 실력은 제자리에서 벗어나질 않습니다. 오히려 퇴보한 느낌마저 듭니다. 신기한 건 제 한국어 실력마저 퇴보한 느낌입니다. 


    7개 언어를 구사하며 '언어의 귀재'라고 불리는 조승연 작가는 언어에도 사촌 언어가 있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한국어는 일본어, 중국어와 사촌 언어죠. 이 말은, 한국어와 일본어 중국어는 서로 여러 가지 공통점을 공유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한 가지 언어만 할 줄 알면 다른 언어를 배우기가 쉽죠. 실제로 저도 일본어 수업을 들었다가 문법적으로 한국어랑 거의 똑같아서 신기해했습니다. 한국어랑 똑같은 문법적 틀에 단어만 일본 단어로 바꿔 끼면 됐죠. 오히려 일본어를 공부하며 여러 한자를 배우게 돼 한국어에도 도움이 됐습니다. 그런데 영어는 그렇지 않더군요. 조승연 작가는 영어는 한국어랑 공통점을 하나도 공유하지 않는 언어라고 말하더군요. 미국에서 외교관이 되려면 FSI(Foreing Service Institute)에서 언어 수업을 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미국인 기준에서 한국어는 가장 배우기 힘든 언어로 분류돼, 2200시간 이상을 수강해야 통과할 수 있습니다. 한국어와 영어는 언어학적으로 스펙트럼 끝과 끝에 위치한 언어이다 보니 배우는 게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 어법은 '주어+목적어+동사'인데 영어는 '주어+동사+목적어' 순입니다. 또 한국에선 주소를 말할 때도 큰 개념에서 작은 개념으로 옮겨갑니다. 대한민국,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길 같은 순서죠. 그런데 영어는 작은 개념에서 큰 개념으로 옮겨갑니다. ~길, ~동, ~시와 같은 순서죠. 심지어 책 목차를 말할 때도 한국어론 '1장'이라고 말하는 반면 영어로는 'Chapter 1'으로 숫자가 뒤에 나옵니다. 이름을 말할 때도 성을 먼저 말하는 한국어에 비해, 영어에선 성(last name)을 뒤에 씁니다. 이런 사소한 것부터 둘 언어는 너무 다르니 영어를 배우기도 힘들고, 영어를 공부할수록 한국어마저 잊어버리는 기분이 듭니다. 



일상 영어와 대학 영어


    영어도 상황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상황마다 쓰이는 단어, 격식, 기대 수준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먼저 생활 영어는 가장 캐주얼한 영어입니다. 예를 들어 날씨에 대해 묻거나 물건 구매에 관한 영어가 여기에 속합니다. 생활 영어는 반복돼서 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배우기도 쉽죠. 물건을 구매하거나, 누군가를 만났을 때 안부를 묻는 정도는 미국에 조금만 살면 자연스레 할 수 있습니다. 늦은 나이에 이민을 간 이민자들도 이 정도는 어려움 없이 할 수 있죠. 더군다나 사람들의 기대 수준도 낮습니다. 제가 느리게 말해도 상대방은 느긋하게 기다려 줄 수 있습니다. 제 모국어가 영어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해 주죠.  


     그에 비해 대학 영어는 상황이 좀 다릅니다. 일단 사용하는 단어부터 다릅니다. 강의실 안에서 날씨에 대해 묻거나 물건 구매를 하진 않죠.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들에게도 생소한 전공 단어와 주제를 다루게 됩니다. 저는 이번 학기에 금융 경제를 수강하고 있는데 단어가 너무 생소해서 수업을 따라가는데 두배는 더 공부해야 합니다. 콜옵션, 풋옵션, 차익거래, 배당금 등등 한국어로 번역해도 생소한 개념을 영어로 배우려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또 대학에선 기대 수준도 상당히 높습니다. 토론을 할 때 영어를 못한다고 상대방이 느긋하게 기다려 주는 일은 잘 없습니다. 바로 말 끈고 공격이 들어오죠. 또 수강생이 100명이 넘는 수업에서 어눌한 영어로 질문을 하거나 발표를 하면 주위에서 킥킥대는 소리마저 들을 수 있습니다. 자신감이 실추될 수밖에 없죠. 


     저도 만약 대학을 다니지 않고 매일 일상 영어만 사용하며 살았다면, 제가 영어를 꽤 잘한다고 착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대학에 와서 전공서적을 읽고 토론을 하는 등 수준 높은 영어를 강요받게 되니, 제 영어 실력이 끔찍하다는 것을 자각하게 됐습니다.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비정상회담'에서도 외국인들이 일상적인 한국말은 잘해도 100분 토론처럼 수준 높은 토론을 하기는 힘듭니다. 


 


도대체 뭐라고 하는 겁니까?


    만약 제가 영어에서 한 가지만 완벽하게 할 수 있다면 저는 듣기(listening)를 완벽하게 하고 싶습니다. 애초에 상대방이 하는 말을 못 알아들으면 대화가 시작조차 될 수 없으니까요. 또 다른 이유는 개인적으로 가장 많이 공부해도 가장 늘지 않는 게 듣기였기 때문입니다. 천천히 말하거나 대사를 보면 아주 쉬운 단어임에도 그걸 빨리 말하면 전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미국인이 말하면 속도도 빠르지만, 소리를 뭉개버리기도 합니다. 마치 아기가 옹알이하는 것처럼 웅얼웅얼하는 소리처럼 들리죠. 예를 들어 'Everybody(에브리바디)'란 단어를 발음하면 'Evulbody(에불바디)'가 돼버리는 식이죠. 또 띄어쓰기도 잘 구별되지 않아 여러 개 단어가 한 단어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He will'이 'Hill'처럼 발음되죠. 또 전치사는 아예 발음을 하지 않거나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만 말합니다. 상황이 이러한데, 다른 이민족이 말하는 영어는 더 알아듣기 힘듭니다. 예를 들어 싱가포르 사람이나 인도 사람과는 대화가 더 어렵죠. 


    


    물론 이 글이 변명뿐이란 걸 알고 있습니다. 아니면 배부른 자의 푸념 정도로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누군가는 해외에서 영어 공부를 하고 싶어도 기회조차 얻기 힘든 경우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유학을 했다고 누구나 다 수월하게 영어를 배웠겠거니 하는 생각이 항상 맞는게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었습니다. 영어는 한국어와 정말 다른 언어고, 그걸 배우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야 하니까요. 또 저같이 수년을 미국에 살아도 영어를 잘 못하는 사람이 '꽤 많은 게' 현실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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