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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뉴슈가 Dec 15. 2022

패션 퀴어

무성향 바이녀의 동성애 도전기

올해는 꼭 동성애하고 만다. 어느 3월 나는 트위터에 이런 결심을 올린다. 그 결심을 처음 하게 된 것은 친구 승연이 나를 패션 퀴어라고 놀렸을 때였다. 악의 없이 가볍게 휙 발신된 그 말은 나의 지난 연애사를 거쳐 나에게 꽤 무겁게 수신되었다. 한 번도 그에게 퀴어로 인정받겠다는 생각은 없었고 승연 또한 내가 여성들을 사랑해온 유구한 역사를 옆에서 지켜봐 왔으나 내 전 애인들의 부정할 수 없는 공통점: 성별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아니… 내가 좋아하는 여자들이 날 안 좋아하는 걸 어떡하라고? 안 팔리는 게 죄야? 억울하게 따지는 나에게 승연은 생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고는 짐짓 엄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어중간한 마음으로 여자를 사귀려고? 널 좋아할 만한 사람들을 찾아 나서야지. 맞아. 이제 나 이성애는 좀 그만하고 싶어. 이 넓은 세계에 나를 좋아해 주는 여자 한 명쯤은 있겠지. 하지만 자만추만으로는 어렵겠다. 플랫폼의 도움을 받겠어. 승연은 응원을 담아, 나는 다짐을 담아 맥주잔을 힘차게 부딪쳤고 그렇게 나는 레즈비언 온라인 데이팅 시장의 바다에 뛰어든다.


우선 탑엘은 제외. 탑엘을 떠올리면 어쩐지 지난여름에 간 홍대 레즈클럽에서 울려 퍼지던 강남스타일이 생각났다. 그리고 프로필에 나를 ‘한 글자’라고 소개하기엔 꾸밈 노동의 정도가 부족했고 ‘두 글자’라고 하기에는 이끄는 카리스마가 부족한 것 같고, 그렇다고 ‘무성향’이라고 쓰자니 그 둘을 넘어서는 매력을 갖춰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 끝에 조이와 틴더를 본거지로 삼아 열심히 좌우로 (주로 오른쪽으로) 스와이프를 하고, 매칭된 여성들과 고양이 너무 귀여워요, 저도 그 영화 봤어요 등등의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일단 먼저 만나자는 얘기를 꺼내는 사람이 (나 포함) 하나도 없었다. 남자들과 데이트를 하는 건 마치 거대한 이성애 사회가 밀어주는 그네를 타는 것과 같았다. 내가 ‘우왕ㅋㅋㅋㅋㅋ’라고만 답장을 해도 대화는 얼추 이어졌고 상대는 대부분 벌써 싶을 정도로 빠르게 만남을 제안해왔다. 데이트도 오래된 연극 시나리오처럼 매끄럽게 수행됐다. 그런 매끄러움은 징그러운 구석이 있었다. 그 안에서 나는 태연하게 이 배역이 내 것인지 모르는 척 하거나 상대의 역할을 종종 뺏어오거나 하는 식으로 시나리오에 균열을 내려고 시도하기도 했지만 그런 시도들은 극에 색다른 변주를 줄 뿐이었다. 내가 맡은 배역인 ‘여자’ 앞에 ‘당돌한’ 정도가 추가되는 정도로. 그런데 상대가 여자로 바뀌니 참고할 가이드는 사라지고 모든 행동을 내가 생각해서 결정해야 했다. 만약 사랑이라는 동력이 있었다면 그 과정이 규범을 벗어나 관계를 새롭게 창조하는, 해방감을 주는, 어쩌면 아름다운 일이 되었겠지만, 온라인 데이팅 상대와 그런 동력을 만들기란 어려웠다. 나는 처음 춤을 추는 사람처럼 관절을 삐걱거리며 어색하게 굴었고 그럼 그냥 수행 같은 거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자, 결심하면 로맨틱 텐션을 잃어버리고 친구 모드로 진입하기가 너무 쉬웠다. 몇몇 만남이 성사되어도 어려움은 데이트에서 더 증폭되었다. 프랑스인 클로이를 만나 나는 BTS는 잘 모르겠다고 말할 때쯤에는 이젠 정말 포기를 해야겠다 싶었는데 그날 밤 D 언니와 매치가 되었다.


프로필에 ‘거짓말을 싫어합니다’라는 말과 흐릿한 분홍빛 필터 셀카가 있는 D 언니는 돔 성향이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고 정말 언니에게서는 권위가 보이는 것 같았다. 나의 의견을 경청해 듣는 것 같다가도 한 번씩 자신의 주도권을 확인시켜주는 언니의 화법은 나에게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이러한 미묘한 상하 관계는 데이트에서도 섹슈얼한 텐션을 주었다. 그 장소가 성수 갈비 골목의 누룽지 통닭집이어도 말이다…. 모든 행동을 주체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에 알 수 없는 피로를 느끼던 나는 내가 취할 수 있는 안락한 수동성에 홀렸고 웬만하면 언니가 하는 제안에 네, 라고 대답했다. 우리 다음에는 언제쯤 만나요, 네. 장소는 여기가 좋겠어요, 네. 저에게 그런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네. 그러다 보면 언젠가 그럴듯한 연애 혹은 파트너 관계가 성사될 것만 같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언니와 삼성동의 어느 보험 회사 회의실에 있었다. 언니의 남자 상사도 함께 있었다. 매끈한 머리 스타일과 능숙한 언변술을 가진 그는 내가 가입할만한 보험 상품 몇 가지를 프리젠테이션하고 있었다. 언니, 분명히 저에게 도움이 될만한 그냥 재무 상담이라고 했잖아요…. 눈으로 이야기했지만 가닿지 않았다. 집에 가입 제안서들을 가져가 꼼꼼히 읽어보면서 내가 왜 이러고 있을까 싶었지만 정말 그 상품들이 도움이 될 것도 같았고 언니가 정말 나에게 도움을 주려고 했나 싶기도 했다. 이후 언니가 수줍은 듯 내민 예쁜 편지 봉투 안에는 ‘앞으로 쭉 같이 가자’라는 메시지가 담긴 두 줄 정도의 가입 축하 손편지와 약정서가 들어있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나는 여전히 언니에게서 연락을 받는다. 그 연락에는 코스피와 코스닥, 환율 등의 정보가 들어있다. 승연이는 아직도 나를 패션 퀴어라고 놀리고 나는 가끔 서글퍼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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