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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혜경 Jul 28. 2022

우리는 어리석게 사랑하고 어리석게 살아간다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과 <이터널 선샤인>

※ 해당 원고는 출판사 '은행나무'에서 출간된 앤솔러지 <AnA Vol.02-우리는 서로를 보살피며>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74~83쪽)


※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과 <이터널 선샤인>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어리석게 사랑하고 어리석게 살아간다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2003)과 <이터널 선샤인>(2004)


출처: 네이버 영화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언뜻 비이성적인 행위로 보인다. 어떤 형태든 사랑을 하면 쓸데없는 일에 시간과 감정을 소모하고, 별것도 아닌 일로 목소리를 높이고,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내면의 격랑 안에서 울고 웃고 화를 낸다. 극단적인 감정 표출을 꺼리는 나 같은 사람에게 사랑과 그로 인해 촉발하는 행위 전체는 성가신 과업처럼 여겨진다.


그럼에도 나는 사랑받기를 갈구하며 진정을 다해 사랑하기를 원한다. 사랑했고, 사랑하고, 사랑할 것이다. 왜일까. 왜 이렇게 비이성적인 일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을까.


겨울이 오면 생각나는 영화가 둘 있다. 하나는 이누도 잇신 감독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하나는 미쉘 공드리 감독의 <이터널 선샤인>이다. 매번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바닷가 풍경과 <이터널 선샤인>의 몬톡 해변을 동시에 떠올리는 건 비단 시간적 배경 때문만은 아니다.


두 영화는 닮았다. 두 영화가 내 인생영화로 자리한 건 사랑을 소재로 사실 삶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불가피성과 변화. 그 변화를 통한 성장.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과 <이터널 선샤인>은 불가피하게 마주하는 어떤 것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성장하는지를 가르친다. 나는 두 영화를 보면서 '모두 사랑에 공감하고 사랑을 경험하면서도 사랑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건 사랑이 곧 삶의 축소판이어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나'인 것을 알게 되는 순간 '나'로 살 수 있다


출처: 네이버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마작 게임장에서 심야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 츠네오가 손님들로부터 이상한 할머니가 끌고 다니는 유모차에 대한 소문을 듣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어느 날, 츠네오는 소문으로만 듣던 그 유모차와 마주치게 된다. 유모차 안에 있는 건 소문처럼 어마어마한 돈도, 마약도, 어린 손주도 아닌 체구가 작은 성인 여성이다. 그녀의 이름은 조제. 츠네오는 그날 조제의 집에서 아침식사를 얻어먹게 된다.


조제는 걷지 못하는 장애인이지만 할머니가 주워 온 헌책들을 읽어 매우 박식하며 요리 실력도 수준급이다. '달걀말이가 맛있다'고 칭찬하는 츠네오에게 조제는 '당연하지, 내가 만들었는데 맛없으면 이상하지'라고 대답한다. 츠네오는 독특한 조제에게 어쩔 수 없이 이끌려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조제를 남들 눈에 띌까 봐 새벽에만, 그것도 천으로 가린 유모차로만 밖에 데리고 나가는 할머니에게 츠네오는 평온한 일상을 위협하는 총각일 뿐. 할머니는 더 이상 조제에게 다가오지 말라고 충고하고, 츠네오는 억지로 조제를 잊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우연히 조제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된 츠네오는 조제를 찾아가고 둘은 서로의 감정을 인정하고 연인이 된다.


츠네오와 조제의 관계에서 배제할 수 없는 요소가 하나 있다. 조제가 장애인이라는 것이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처음 보는 관객도 자연스럽게 둘의 이별을 짐작한다. 영화 시작부터 '겨울여행을 갔다. 무척 추웠던 게 기억난다. …… 그립다'라고 츠네오가 독백하기 때문이다. 츠네가 장애인이어서 그렇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지만, 영화가 진행되면 자연스럽게 조제의 장애와 그 이별을 연결 지어 상기하게 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러나 츠네오와 조제가 이별한 이유는 조제가 장애인이어서가 아니다.


모든 사랑은 본질적으로 같은 이유로 끝난다. 사랑이 끝났기 때문이다. 조제와 츠네오도 마찬가지다. 츠네오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겠지만 사실 단 하나였다. 내가 도망쳤다'라고 이별의 원인을 독백했으나 사랑을 해본 관객이라면 안다. 츠네오는 한 여자를 사랑한 일반적인 남자다. 비난받을 이유도, 독려받을 이유도 없다. 그렇다면 조제는. 조제는 어떨까.


출처: 네이버 영화


벽장 안에 갇혀 할머니가 주워 온 헌책들로 세상을 배운 조제는 츠네오를 만나 처음으로 동물원에 가서 호랑이를 본다. 조제에게 호랑이는 '꿈에 나올까 무서운' 존재다. 한 번도 제대로 마주한 적 없는. 조제는 여기서 츠네오에게 "좋아하는 남자가 생기면 제일 무서운 걸 보고 싶었어"라고 말한다. 조제는 츠네오를 통해 벽장에서 나와 무섭기만 했던 세상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츠네오와 조제는 동물원에서 호랑이를 같이 봤지만, 함께 떠난 겨울여행에서 보기로 한 수족관의 물고기들은 보지 못한다. 수족관이 휴관했기 때문이다. 이때 조제가 어린아이같이 말도 안 되는 짜증을 부리는데 츠네오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는 걸 볼 수 있다.


원래 이 겨울여행은 고향에 계신 츠네오의 부모님에게 조제를 소개하러 가는 길이었으나 츠네오는 조제가 화장실에 간 틈에 동생에게 전화해서 고향에 가지 못할 것 같다고 말한다. 조제 역시 차에 타자마자 행선지가 입력되어 있는 내비게이션을 끄고 "바다를 보고 싶어"라고 말하는데 이는 조제가 이미 츠네오의 마음을 읽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둘은 바다를 함께 보고, 원래 가기로 했던 온천 여관으로 가는 길에 충동적으로 물고기 성 모텔에 들어가 하룻밤을 묵는다. 조개 모양의 침대 위에서 먼저 잠든 츠네오에게 조제는 말한다.


출처: 네이버 영화


언젠가 네가 사라지고 나면 난 길 잃은 조개껍데기처럼 혼자 깊은 해저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겠지. 그것도…… 그런 대로 나쁘지 않아.


조제가 혼자가 될 것을 예감하는 이 장면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본래 조제는 혼자였던 존재다. 다시 말해, 조제가 혼자로 돌아가 그 자신이 혼자라고 직면할 수 있는 건 츠네오를 만났기 때문이다. 혼자가 아닌 시간을 보냈기에 혼자를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세상을 마주하지 못한 벽장 속의 조제와 세상을 마주한 뒤 다시 혼자가 된 조제는 엄밀히 말하면 같은 사람이되 다른 사람이기도 하다.


이 대목에서 묻고 싶다. 사랑을 하면 진정으로 혼자가 아니게 되는가?아니면 홀로일 수밖에 없는 불가피성을 깨닫게 되는가?


모든 종류의 직면은 단 한 가지 결과를 불러온다. 변화다. 그 변화는 붕괴일 수도 있고, 성장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변화하지 않을 수는 없다. 내 안을 제대로 바라보고 만 순간 우린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외면치 못하기 때문이다.


조제는 변화한다. 조제는 되고 싶었던 조제가 되어간다. 무슨 말이냐면, 조제는 사실 그녀의 본명이 아니다. 조제의 본명은 구미코. 조제는 구미코가 제일 좋아하는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에 나오는 여자다. 소설 속의 조제는 이별과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츠네오와 담백한 이별을 치러낸 조제도 조제에게로 한 발짝 다가간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과 나란히 휠체어를 타고 거리를 누빈다. 휠체어 밑에 스케이트보드를 대고 달려주던 남자가 없어도, 자신이 부끄러워 새벽에만 밀어주던 할머니가 없어도 조제는 세상을 마주하게 되었다. 제 몫의 생선만을 구워 끼니를 챙기는 사람이 되었다. 생선 반 토막을 담담히 굽고 의연하게 '쿵' 제 몸을 홀로 내딛는 조제는 더 이상 이전의 구미코가 아니다. 조제다.


출처: 네이버 영화                                


삶이라는 단어에는 '살아 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살아 있는 것은 고정되지 않는다. 변화한다. 조제는 사랑을 통해 변화한다. 로맨스 영화지만 사실 성장담에 가까운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볼 때 내가 삶을 반추하는 이유다.




그럼에도 "Ok"할 수밖에 없는


출처: 네이버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구성은 독특하다. 처음 영화를 본 사람들은 어려워하기도 하는데, 과거와 현재를 정신없이 오가는 전개 구조 때문이다. 조엘은 기억을 지워주는 첨단 기술 회사 라쿠나를 찾아가 헤어진 연인 클레멘타인의 기억을 지우기로 결심한다. 그가 그렇게 결심한 건 클레멘타인이 먼저 라쿠나를 통해 조엘과의 기억을 다 지웠기 때문이다. 


영화는 조엘이 클레멘타인에 대한 기억을 지운 다음날 아침부터 시작한다. 조엘은 전혀 충동적인 사람이 아닌데도 그 아침에 충동적으로 회사를 결근하고 몬톡 해변으로 향한다. 그리고 거기서 클레멘타인을 만나 다시 사랑에 빠진다.


이후 조엘이 기억을 지우는 장면이 전개되는데,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과 행복한 기억들, 싸운 순간들이 정신없이 지나간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엘은 기억이 사라져갈수록 기억을 지우고 싶지 않아져 도망친다. 그러나 주지했듯이 조엘의 기억은 모두 사라진다. 다시 사랑에 빠진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이전에 서로 연인이었고, 기억을 모조리 지울 만큼 안 좋게 헤어졌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는다. <이터널 선샤인>은 이를 통해 묻는다. 당신을 지우면 이 아픔도 사라질까요?


출처: 네이버 영화


우리는 답을 알고 있다. <이터널 선샤인>이 여기에 답하기 위해 만든 영화니까. 물론 그 답이 우리 개개인의 답은 아닐 수도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진실을 알게 된 클레멘타인은 조엘에게 "잘 있어요"라고 말하고 그의 집을 나선다. 이미 실패한 사랑에 다시 뛰어들지 않겠다는 의미다. 그러나 조엘은 클레멘타인을 붙잡는다. 제발 기다려달라고 말한다. 클레멘타인은 혼란에 빠진 표정으로 알겠다고 대답한다. 이때 그녀는 몹시 슬픈 것 같기도 하다. 마주 본 두 사람. 클레멘타인이 말한다.


나는 완전하지 않아요.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는 망가진 여자일 뿐이죠. 완벽하지 않다고요.


그러자 조엘은 대답한다. "당신에게서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을 찾을 수가 없어요. 안 보여요." 클레멘타인이 격앙된 어조로 소리친다. "보일 거예요. 곧 거슬리게 될 테고 난 지루하고 답답해하겠죠. 나랑 있으면 그렇게 돼요." 조엘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다.


Ok.


그러자 잠시 말을 잃었던 클레멘타인이 고개를 끄덕인다.


……Ok.


둘은 울음 섞인 웃음을 터뜨리고, 클레멘타인은 다시 한 번 더 말한다.


Ok.


그리고 둘은 서로를 보고 한참을 웃는다. 눈이 쌓인 몬톡 해변,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이전처럼 즐겁게 뛰어다니는 장면으로 영화가 끝난다.


<이터널 선샤인>은 사랑에 대해서만 묻는 게 아니다. '끝을 알아도 같은 선택을 할 수 있느냐'는 보다 심오한 질문을 던진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끝을 알고 난 뒤에도 서로를 선택한다. 이것이야말로 비이성적이다. 그런데 삶은 때때로 이런 비이성적인 순간들로만 설명할 수 있다. 그건 모든 사랑에 끝이 있듯 모든 삶에도 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끝이 내정된 것들은 우리를 절박하게 만든다. 이성적인 선택으로만 삶을 채운다면 그 삶은 윤택할지도 모른다.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최대한 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무슨 의미인가. 클레멘타인과의 기억을 지울 때 조엘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도 잃어야 했다.


출처: 네이버 영화


I'm just…… happy.
I've never felt that before.
I'm just exactly what I've wanted to be.

행복과 아픔은 공존한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아픔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꼭 아파야만 행복할 수 있는가, 공분하여 따지고 싶을 수도 있다. 왜 그렇게 해야만 하는지 묻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설명할 길이 없다. 그건 사랑을 할 때 우리가 행복하고 아프며, 아프고 행복하듯이 삶 역시 그러하기 때문이다. 평행으로 배열된 세로로 난 실(경사)과 직각의 가로로 난 실(위사)이 교차되어 한 직물이 직조되듯이. 삶은 그러하다. 그러니 우리는 끝을 알아도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살아야만 한다. 행복하게 아프게.




행복하게 아프게, 아프고 행복하게, 어리석게도 어리석게


출처: 네이버 영화


원래 나는 사랑이 사람을 성장시킨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차라리 퇴행에 가깝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이 말을 제멋대로 해석해 '사랑이 가지고 있는 삶의 속성이 사람을 가르친다'는 말로 바꾸면 믿을 수밖에 없다.


사랑은 삶을 닮았다. 어쩌면 삶은 곧 무언가를 사랑하는 일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거기에서 할 수 있는 건 그 불가피한 변화 앞에서 최선의 방향으로 걸어가는 것일 터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구미코가 사랑을 통해 조제가 되고 <이터널 선샤인>의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어리석게도 'Ok'하여 사랑의 불가피함을 받아들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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